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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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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9월 1일 『황성신문』, 『대한민보』, 『대한신문』을 폐간하고,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을 빼고 『매일신보』로 제호를 고쳐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충성한 어용지 노릇을 충실히 하였다.

10월 1일 데라우치 미사다케가 초대 총독이 되어 혹독한 무단 통치를 자행하고, 구한국 고관 76명(이중 4명은 거부 또는 반납)에게 일본 작위를 주었다. 조선귀족령을 공포하여 친일매국노들을 알뜰 살뜰히 대접하였다. 총독부 경무총감부는 주시경의 국문관련 서책을 비롯하여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서적 45종을 압수 또는 발매 금지시켰다.

주시경도 직격탄을 맞았다. 병탄 직후 총독부는 학부의 국문연구소 칙임위원직을 해임하고, 연구소를 폐지시켰다. 3년여 몸 담고 연구하면서 일정한 급료를 받아 생계를 유지했던 것이 모두 박탈되었다.
  
1939년 차남 한웅의 결혼식 때 한복을 차려입은 최남선의 모습. 당시 최남선은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 1939년 차남 한웅의 결혼식 때 한복을 차려입은 최남선의 모습. 당시 최남선은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1939년 차남 한웅의 결혼식 때 한복을 차려입은 최남선의 모습. 당시 최남선은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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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최남선의 주도로 이 해 10월 중순 조선광문회가 설립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구국을 위한 국민계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 국사연구도 민족정신과 자존심을 드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면서 광문회가 발족되었다. 광문회는 우리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 고전을 간행ㆍ보급하는 한편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하였다.

주시경을 비롯하여 박은식ㆍ현채ㆍ장지연ㆍ유근ㆍ이인승ㆍ김교헌 등 민족주의 학자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국치와 함께 일제가 진귀한 서적과 문화재를 반출해가면서 이에 대응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주시경은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어휘수집 등의 책임을 맡았다.

광문회는 『대한역사』, 『대한지지(大韓地誌)』, 『동국통감』, 『동사강목』, 『삼국사기』, 『삼국유사』, 『훈몽자회』, 『이충무공 전서』 등을 편찬하고, 각종 도서와 잡지 『소년』을 발행하고, 민족전통의 계승을 위한 고전 간행과 보급을 하였다. 주시경은 권덕규ㆍ이규영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편찬을 시도하다가 몇 년 후 돌연한 죽음으로 끝을 맺지 못하였다.

그는 가는 곳 마다 하는 일 마다 그 중심은 우리 글, 우리 말의 연구에 있었다. 나라가 망하자 가장 시급한 것이 우리말 사전의 편찬 작업이었다. 일제의 하는 꼴을 볼 때 필연적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리라 내다보고 우리말 사전 편찬을 서둘렀다.

배제학당에 다닐 때에는 같은 학교 학생들과 같이 의논하여 협성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신문사의 일을 맡았을 때에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합하여 국문동식회를 이끌어 갔으며, 상동에 사설 학원이 설립되매 국어문법과를 따로 설치하게 하고, 당시 의학교에 뜻이 통하는 벗이 있으매 그 안에 국어연구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밤에는 야학강습소를, 그리고 일요일에는 일요강습소를 설립 운영하였고, 지금의 문교부에 해당하는 당시의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개설되었을 때는 그 연구의 핵심이 되었으며, 외국인들 사이에 한어연구회가 생겼을 때에는 그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에 대하여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표준이 되었고,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국어과 과정을 가르치게 함과 동시에 그 일을 스스로 맡아 뿌리를 기르고 근원을 키우는 것과 같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조선광문회가 설립되자 한국의 말과 글에 관한 문서 교정의 일이나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것을 뿌리내리기 위한 운동으로는 조선어강습원을 창립하여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가르쳐 이끄는 일에 정성을 다하니, 배움에 싫증을 느끼지 않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은 그 지극한 정성이 한 몸의 처지를 이렇듯 수고롭게 하였던 것이다. (주석 6)


주시경이 광문회에서 시작한 국어사전 편찬을 위해 준비한 원고는 그의 사후인 1927년 계명구락부로 넘겨지고, 그것은 다시 1921년 우리 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어학회로, 다시 1929년 국어보호ㆍ보급운동의 일환으로 국어사전 편찬을 위해 만든 조선어사전 편찬회로 이어졌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정신을 잇고자, 그의 제자들인 장지영ㆍ김윤경ㆍ이윤재ㆍ이극로ㆍ최현배ㆍ이병기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한편 1927년 2월부터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의 편찬사업에 착수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판하지 못했다. 또한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는 등 꾸준히 한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30여 명이 일제에 의해 검거ㆍ투옥되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한편 역시 주시경의 제자인 이극로ㆍ이윤재ㆍ정인승 등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고 준비 작업으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등을 마련, 사전편찬사업을 진행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

해방 후 이들 조직의 후신인 한글학회가 설립되어 사업을 이어받아 1957년 『큰 사전』 6권을 발간하였다. 주시경이 뿌린 씨앗이 뒤늦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주석
6> 임홍빈, 앞의 책, 25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조선광문회, #조선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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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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