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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들려오는 코로나19 소식에 마음이 잿빛이다. 2월말 지역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예술영화관이 모두 휴관할 때는 '2주 정도 지나면 다시 열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길어질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의 물기가 자꾸 말라가는 기분이다. 물론 매주 미술관, 박물관에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안 가는 것과 못가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자꾸 강팔라지는 것 같다.

도서관이 휴관하기 전, 빌려왔던 <가장의 근심>을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었다. 충남대학교 독문과 문광훈 교수가 쓴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에세이집인데, 처음에 이 책을 펼칠 때만해도 '이 와중에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게 맞나' 싶었다. 세상은 온통 난리속인데 나만 속 편하게(?) 문학, 영화, 음악이라니...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럴 때일수록 꼭 읽어야할 책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 첫 줄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무엇보다 내 스스로를 지탱하고 내 삶을 견뎌내기 위해 쓴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을 읽고선 나는 이 책을 진지하고 차근차근히 읽어내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 그저 아무렇게나 감각하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없어져 좋은' 그 무엇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아니면 안 될, 아니 '오직 이것이어야 한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을 나는 묻고 느끼고 생각하며 쓰고자 애쓴다. 그러면서 글에 기대어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을, 이 현존적 삶의 놀라운 생기를 누리려한다' - p.577
 
제인 오스틴의 소설 <노생거수도원>, 헤르만헤세의 <유리알유희>, 카프카의 <가장의 근심>,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같은 서양 문학부터 윤동주의 시세계, 채만식·서정주에 이르러서는 '과연 한 문학가의 작품과 역사관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에 이르는 담론까지.

혹은 바흐의 <마태수난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란델의 연주와 같은 서양 고전음악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유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스러움, 그리고 율곡 이이의 철학까지 그야말로 동서양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광대무변, 종횡무진 자신의 예술관과 철학을 녹여낸다. 덕분에 도서관과 미술관과 박물관, 클래식 공연장을 몇 번이고 더 다녀온 충만함에 배가 부를 정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의 장르도 다양하고 소재도 다채롭다. 윤리, 종교, 사회, 공동체, 신념, 정의 등... 그러나 그 많은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의 삶에서 집요하리만치 찾아내려 했던 것은 결국 '인간답게 사는 법'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장르와 성격에 따라 다양한 빛깔로 나타났지만 결국은 삶을 사랑하는 태도로 귀결된다. 현실이 고달프고 각박할수록 예술가들은 더욱 삶을 치열하게 살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일상의 편린에서 시작한 예술론
 

이 글은 딱딱한 예술론이나 철학론이 아니다. 글의 시작은 대개 작가의 일상의 작은 편린에서 시작한다. 그가 보고 듣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우리를 실망시키는 정치인들의 언행, 독일의 오랜 지인에게서 받은 편지,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것, 가족들과 나눈 대화, 피붙이의 죽음, 연구실에서 바라본 풍경, 초가을 집에서 선풍기를 닦던 순간 등이 글의 소재가 된다.

우리가 소위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무용 등은 단지 예술 자체로서가 아닌 삶에서 체화하고 다시 삶에 녹여낼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나는 것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보자. 예전에 나는 마태수난곡이 난해하고, 고급스럽고, 종교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가 쓴 '마태수난곡 예찬' 부분을 읽은 뒤, 마태수난곡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바흐를 들으며 삶의 고결함이 고통 없이, 이 고통 속의 인내 없이 불가능할 것임을 깨닫는다. 「마태수난곡」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단순히 교회음악의 어떤 기념비적인 대작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이고 그 죽음이며, 이 죽음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연약한 것은 이 근본 조건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고귀한 것은 이 한계 속에서도 그 조건을 쇄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태수난곡」이 주는 감동의 깊은 곳에 고결함이 있다면 이 고결함은 현실의 비참을 견디는 데 큰 힘이 되지 않는가 나는 생각한다.' - p.226

'현실의 비참함'을 견딜 수 있는 힘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현실의 비참'을 견딜 수 있는 것은, 힘든 와중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모으는 많은 사람들, 기운 한 줌이라도 더 짜내어 버티면서 눈물겹도록 애쓰는 사람들의 숭고함 덕분일 것이다. 어찌 예술이 꼭 미술관이나 극장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고상한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티비만 켜면 뉴스에서 들려오는 코로나19 소식과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속보. 행정에서 보내는 긴급재난문자, 아이들 학교에서 오는 안내 문자 등을 접하며 세상이 온통 한 가지 색깔로만 보이기 시작했다. 더 두려운 것은 혹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었다. 근거 없는 루머와 가짜뉴스를 접할 때마다 '말도 안 돼'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금슬금 불안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자꾸 꾸깃해져갔다. 파란 하늘과 꽃향기, 사람들의 시끌벅쩍한 이야기소리, 웃음소리, 함성을 외치며 다같이 응원하며 으쌰으쌰하는 모습들, 활기차게 학교를 뛰어가는 아이들... 그런 풍경들이 그리웠다.

마치 이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기라도 하듯, 저자는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티고네>의 주인공 심리를 독일 철학자 헤겔의 미학을 연관지어 설명해준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마음의 가벼운 우울증 치료(?)를 그리스 시인과 독일 철학자 헤겔에게서 듣게 되다니.
 
'비극적 주체가 쾌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유 속에서 자신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삶의 한계에 휘둘리지만 고통 속에서도 고요의 쾌활성을 누릴 수 있다. 이 고요의 쾌활성이 중요하다. 왜 고요이고 왜 쾌활인가? 고요가 필요한 것은 생활의 무거움 때문일 것이다. 혹은 삶의 한계 조건에 대한 신중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의 무게를 고요 속에서 조용히 받아들이고 밝은 마음으로 그 너머를 향해 옮아가야 한다' - p.206

고요하게, 하지만 쾌활하게 '고요의 쾌활성'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지나치게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신중하게 현실을 마주하되, 쾌활함을 잊지 말 것. 여기에서 쾌활함은 웃고 떠드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며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 아닐까.
 
 '보자르 트리오에서 53년 동안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던 메나헴 프레슬러는  2013년 90살 나이로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다시 솔리스트로 데뷔하면서 음악의 메시지는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p.99

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삶을 즐거워해야 한다.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순간도 있다. 적어도 삶의 아름다움만은 잊지는 말아야할 것이다. 그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예술의 힘이 아닐까. 우리가 끝까지 인간다움, 아름다움, 예술의 힘을 놓지 않으면 '현실의 비참함'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고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가장의 근심

문광훈 (지은이), 에피파니(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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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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