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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8일부터 2월 25일까지 페루 도자기여행을 다녀왔다. 2월 첫주 페루의 쿠스코주, 피삭에서 열린 제 1회 라틴도예가들의 축제 “잉카 길의 흙 Barro del Qhapaq Nan' 참여를?시작으로 그 곳에서 인연이 된 도예가들과 남미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연이 닿은 '흙'을 재료 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여정은 짧게 나마 '잉카의 길'을 걸어보는 시간과 같았다. 그 만남의 이야기를 담았다.?[편집자말]
스페인에서 도예를 배울 때 세비야 도예 선생님과 함께 리투아니아 도예가들의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다.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전통 방식의 도자기 장식 기법을 시연하는 중간에 간단한 흙 오카리나를 만드는 워크숍이 있었다. 오리 모양의 흙 오카리나였는데 설명하는 대로 구멍을 뚫어도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결국 도예가가 일일이 소리 구멍을 맞춰주어야 했다.

아주 짧은 경험이었지만 흙으로 만든 무엇이 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었다. '흙악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잠깐씩 참여를 해보았지만 한두 번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악기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연주해내는 것이 동반되는 작업이어야 더 의미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나에게 '흙악기' 작업은 가까이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조금은 먼 친구, 하지만 늘 흘끔거리며 곁눈질 하게 되는 친구와 같은 것이었다.

페루 피삭에서 열린 '제1회 라틴아메리카 도예가 축제' 프로그램이 공유되었을 때 여러 워크숍 중에 가장 먼저 동그라마를 쳤던 것이 '흙악기 소개와 간단한 워크숍'이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나뿐 아니라 다른 참여 도예가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행사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워크숍이기도 했다.
 
흙악기 워크숍 중인 도예가 타키 루나(Taki Runa)
 흙악기 워크숍 중인 도예가 타키 루나(Taki Runa)
ⓒ 신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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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악기를 만드는 도예가 타키 루나(Taki Runa, 아래 타키)는 도예 축제가 열리는 페루 쿠스코 주 피삭 마을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꼬야Coya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다양한 흙악기들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소리를 들려주고,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과 멋진 하모니를 만드는 작은 흙악기 연주회도 즉석에서 열었다. 흙악기 만드는 법을 소개할 때는 도예가로, 연주할 때는 음악가로 자연스럽게 역할이 옮겨가는, 내가 생각했던 흙악기를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도예가의 모습이었다.

짧은 프리젠테이션과 연주회 후에 본격적으로 작은 흙 공 두 개를 연결해서 소리가 나는 호루라기를 만드는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워크숍이 시작되고 나를 포함하여 여기저기 '삑삑' 하는 어설픈 소리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야 할 소리가 나지 않고 헛 바람소리만 휙휙 나는 안타까운 소음 안에서도 '신남'이 그대로 담기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그의 작업을 잠깐의 워크숍만 보기 아쉬워 따로 약속을 잡아 타키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한창 우기 시즌이라 어김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 오후 시간, 타키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코야 마을 초입에 위치한 작업실은 넓은 공터에 초가집 모양의 두 건물이 붙어있는 독특한 곳이었다.
 
페루 쿠스코 주 꼬야에 위치한 타키의 작업실
 페루 쿠스코 주 꼬야에 위치한 타키의 작업실
ⓒ 신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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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코카 박물관을 지으려고 만들어 놓은 곳인데 계획이 연기되면서 친분이 있던 건물 주인이 몇 달 전 부터 타키에게 공간을 내어 주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의 조각하는 예술가와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다.

타키는 본래는 회화 작업을 하던 예술가였다. 그러다가 조각과 조형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회화에서 조형으로 작업을 전환했다. 주로 큰 조형물을 만들고 돌조각 작업을 주로 했다. 그러다 도시의 삶이 문득 싫어져서 자연이 있는 곳을 찾아 한동안 떠돌며 작업을 했고 그 여정을 통해 점점 자연 재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흙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흙으로 조형작업을 주로 했죠. 그리고 최대한 흙의 성질을 변형시키지 않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옛 도자기 작업 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고대 흙악기를 모티브로한 타키의 악기들
 고대 흙악기를 모티브로한 타키의 악기들
ⓒ 신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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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도자기에 대한 기술과 모양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고대 흙악기들의 형태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옮겨 갔다. 평소 취미로 음악을 했고,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던지라 본인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흙으로 만드는 작업이 그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10년, 흙으로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저에게 도자기는 흙의 소리를 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 소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흙악기라고 생각하고요. 형태에 따라, 흙에 따라,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를 상상하고, 혹은 의도하지 않는 소리를 발견하는 일이 여전히 즐겁죠."

오랫동안 이곳저곳 떠돌며 작업하던 그는 몇 달 전 이곳에 안정적인 자리를 찾게 되면서 머무르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머무름 안에서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었다.

개인 작업을 하는 것만큼이나 가르치고, 함께 소리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지금의 공간에 더 많은 사람을 모아 작업을 공유하고 싶다. 조금더 시간이 쌓이고 공간이 정리가 되면 멀리서 오는 작업자들의 레지던시로 활용해 보는 것도 계획중이라고 했다.

"결국 제가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예술학교예요."
   
흙의 소시를 만드는 도예가 타키루나
 흙의 소시를 만드는 도예가 타키루나
ⓒ 신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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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소리를 만드는 도예가 타키 루나
 흙으로 소리를 만드는 도예가 타키 루나
ⓒ 신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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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고 힘들이지 않고 내뱉는 타키의 꿈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그게 뭐 그리 쉬운 일이겠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라 흠칫했다. 너무 쉽게 여러 핑계와 한계들을 내세우며 아예 허황된 꿈이라고 지워버리는 태도에 익숙해진 나에게 타키의 거침없는 꿈꾸기와 그것을 눈치 보지 않고 드러내는 경쾌함이 낯설면서 부러웠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선언된 꿈은 형태를 만들어 가겠구나 싶었다. 그것은 마치 무의 소리에서 유의 소리를 찾아 탐험하는 타키의 흙의 소리를 찾는 작업과도 닮은 것이기에 더 믿음직스러웠다.
 
타키의 흙 악기들
 타키의 흙 악기들
ⓒ 신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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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연주에 소질이 없는 나는 타키의 악기 중 그나마 불기 쉬운 악기 하나를 골랐다. 그가 흙에 담은 소리를 나에게로 가지고 와서 나도 그처럼 결연하게 무언가를 꿈꿔볼 에너지를 불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지구 반대편의 흙의 소리가 그 반대편으로 넘어와 무언가를 꿈꾸는 소리가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Qhapaq Ñan 까팍 냔 : 페루 원주민 언어 케추아어로 ‘잉카의 길’을 뜻한다. ‘qhapaq’는 ‘부’를 의미하고 ‘ñan’은 길을 의미하여 ‘부의 길’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잉카 제국시절 새로이 만들어진 길이 아닌 이미 존재했던 길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4만 킬로미터가 넘는 길로 알려져 있다. 


태그:#페루도예가들, #페루여행, #남미여행, #흙악기도예가, #타키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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