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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몽골여행을 하다 한국인의 뿌리가 몽골이라고 여겨 한국 속에 깊이 스며든 몽골문화를 탐색하기 위해 제주문화원에서 구한 <제주도지>를 탐독하고 쓴 글입니다. -기자말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번지에 있는 항파두성 모습. 몽골에 저항한 삼별초군이 끝까지 항전해 싸운 곳이다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번지에 있는 항파두성 모습. 몽골에 저항한 삼별초군이 끝까지 항전해 싸운 곳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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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유사 이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를 세웠다고 평가된다. 몽골 제국의 영향력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 평원에 접해 있었다.

몽골의 영향권에 든 지역은 한반도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몽골은 고려 고종 18년(1231년)을 시작으로 고종 46년(1259년)까지 무려 6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의 힘에 밀려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가 몽골과 화의를 맺고 몽골의 요구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1270년)했다. 이에 무신정권을 지탱하는 한편 대몽항쟁을 주도해왔던 삼별초가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과 함께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고려조정과 몽골에 대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근거지를 진도로 옮겼으나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흔도, 홍다구 등이 이끄는 몽골군의 연합작전에 의해 배중손과 승화후가 살해되었고, 남은 군대가 김통정 지휘 아래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고려 조정과 몽골은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1273년(원종 14) 2월 고려-몽골 대규모 연합군이 제주도를 공격해 삼별초군을 대패시키고 김통정은 자결함으로써 3년여에 걸친 삼별초 항쟁은 종식되었다.

제주 삼별초의 항몽활동 유적...항파두리, 애월목성, 환해장성
  
항파두성에서 삼별초군을 진압한 몽골은 제주도가 남송과 일본을 잇는 요충지임을 알고 100여년간 직할통치했다. 몽골은 제주도에 '동아막, 서아막'의 두 개 '아막'을 설치하고 몽골국립목장을 설치했다. '아막'은 몽골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우리의 '도'에 해당되며 약 1400여명을 파견했다. 제주박물관에서 촬영했다.
 항파두성에서 삼별초군을 진압한 몽골은 제주도가 남송과 일본을 잇는 요충지임을 알고 100여년간 직할통치했다. 몽골은 제주도에 "동아막, 서아막"의 두 개 "아막"을 설치하고 몽골국립목장을 설치했다. "아막"은 몽골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우리의 "도"에 해당되며 약 1400여명을 파견했다. 제주박물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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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한반도와 중국 및 일본을 잇는 중간 지점이고 멀리 동남아 지역으로도 열려있는 해상요충지다. 삼별초는 남송(南宋), 일본과 손을 잡고 항몽연합전선을 꾀하고자 제주를 선택했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주력했던 일은 방어시설의 구축이었다. 이들 방어시설은 항파두성, 애월목성, 환해장성 등이 있다.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번지에 있는 항파두성은 해발 150~200m에 있다. 성은 남쪽이 북쪽보다 50여m 정도 높은 지형 그대로 축조했다. 길이 약 6㎞, 면적 34만 4000여 평에 자리한 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으로 쌓여졌다. 외성은 흙으로 만든 토성이고, 내성은 돌로 쌓은 둘레 750m의 정사각형 석성이었다. <제주도지>가 밝힌 항파두성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다.

▶몽골어 관련: 몽골은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큰 용사'라는 뜻의 '바투'호칭을 부여한다. 여•몽 연합군의 몽골 측 장군 '홍다구'도 제주 삼별초 평정의 공으로 '홍바투'칭호를 받게 되어 '항파두성'도 '홍바투'의 전공을 기려 '홍바투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대항해 싸우는 삼별초군 모습. 항파두리성 전시관에서 촬영했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대항해 싸우는 삼별초군 모습. 항파두리성 전시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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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차용과 제주어 관련: '항파두리'는 '항바두리'의 한자차용 표기로, '항'은 항아리, '바두리'는 '테', 혹은 '테두리'의 뜻을 가진 제주 방언 '바위'에 대응해, 지형이 '항에 죽 둘린 가장자리'와 같다는 데서 연유.

애월목성은 삼별초가 애월포에 나무로 쌓은 목성이었다. 이 성은 애월포가 삼별초 수군병력의 거점이자 항파두성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관문의 하나였기 때문에 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애월목성은 조선초기까지 그 절반에 해당하는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없어지고, 그 위에 돌로 만든 애월성이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환해장성은 제주 전제 해안을 300리 둘러친 장성이다. 이 성은 삼별초의 진도거점 시기에 개경정부가 보낸 관군이 삼별초 진입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제주에 진입한 삼별초가 개경정부군과 몽골군 공격에 대비해 계속 환해장성을 쌓았고 조선시대에도 보수 작업이 행해졌다.

환해장성은 제주시 화북동, 삼양동, 북제주군 애월읍 고내리, 조천읍 북촌리, 신촌리, 신흥리, 함덕리, 구좌읍 김녕리, 행원리 등 지역에 남아 있으며, 남제주군 성산읍 신산리, 온평리, 남원읍 하례리, 대정읍 일과리, 영락리, 서귀포시 보목동 등의 지역에도 흔적이 남아있다.
     
제주도에 있는 환해장성 모습. 삼별초군이 건설한 방어시설이다
 제주도에 있는 환해장성 모습. 삼별초군이 건설한 방어시설이다
ⓒ 이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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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해장성은 자연석을 적당한 크기로 분류해 쌓아놓았다. 높이는 대략 2m 안팎이나, 화북동의 경우는 2.8m, 함덕리는 최고 4m의 경우도 있다. 환해장성은 성밖은 경사지고, 성안은 높은 것, 또는 성밖은 경사지고 성안은 평탄한 것 등의 다양한 형태가 있다.

제주 지정학적 가치 파악한 몽골... 몽골군 파견과 몽골국립목장 설치

제주가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라는 걸 파악한 몽골은 제주를 남송과 일본 정벌의 전초•병참기지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원은 제주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해 몽골 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 하나로 여겨 제주 경영에 적극나섰다.

두 차례의 일본 정벌이 실패하고 황제 쿠빌라이가 충렬왕 20년(1294년)에 세상을 뜨자 제주가 고려에 환속된 적도 있으나 얼마 후 몽골에 다시 귀속되었다. 이로부터 80여 년간 제주는 고려와 몽골을 오가며 수차례 귀속되었다.

몽골이 제주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탐라 국립목장이었다. 제주에 천연 방목지가 널려있음을 깨달은 몽골은 충렬왕 2년(1276년)에 본국의 말을 갖고 와 제주 서쪽 수산평(동아막)에 풀어놓았다. 이로써 몽골식 목마장이 제주에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다음 해에는 제주 동쪽 고산리(서아막) 일대로 확대 분화됐다.

몽골이 제주를 직할 통치하며 몽골국립목장을 설치하면서부터 제주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충렬왕 26년(1300년) 무렵 우마 등이 크게 증가하고 사육시설과 운영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동•서 목마장을 건설하고 동•서 아막(阿幕)을 설치했다.

'아막'은 몽골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우리의 '도'에 해당하며 영어로는 '아이막(Aimag)'으로 표기하지만 몽골인들의 발음을 들으면 "애막"으로 발음한다. 현재 몽골에는 21개의 '아이막'이 있다. 몽골인들이 제주도에 '아막'을 설치했다는 건 몽골을 직접 통치했다는 걸 의미한다.

동•서 아막의 소와 말들은 몽골족 '하치'에 의해 사육 방목되었다. 이들은 몽골족 가운데서도 목축 기술이 뛰어나 선발되어 제주에 왔던 자이고, 목호(牧胡)로도 일컬어졌다. '하치'는 몽골에서 파견된 우마사육 전문가이다. 당시 제주인구가 3만여 명인데 말도 이와 맞먹는 2~3만 필에 달했고 소도 들판에 가득했다.

몽골이 제주에 남긴 문화유산

1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대립과 갈등 관계였지만 우마사육이 제주의 전통적 산업이 되어 경제력이 신장되었고 인구가 늘어나는 등 제주사회를 크게 변모시켰다. 특히 많은 몽골족이 들어와 정착하고 제주지역 산촌 형성도 목축업의 번성 때문에 가능했다.

2014년 (사)제주학회 주최 춘계심포지엄에서 제주한라대학교 오영주의 <제주-몽골 학술문화교류를 위한 탐라 몽골학 기반조성> 자료에는 몽골이 제주에 남긴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있다.

원나라 시절 제주도에 입도한 몽골인은 군인, 수행원, 목수, 죄수 등을 포함해 약 1400명에 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조선시대 제주의 성씨분포를 보면 원(元)을 본관으로 삼은 조,이,석,초,강,정,장,송,주,진 등과 운남(雲南)을 본관으로 삼은 양,안,당,대 등이 있었다.

몽골 교류를 통해 생겨난 음식으로는 아이락, 순다리, 고소리술, 타라크, 오츠, 돔베괴기, 보츠, 말고기육포, 호쇼르, 불떡(만두), 구릴타이슐, , 람사, 고기죽, 슐루, 상애떡 등이 있었다.
  
1950년대까지 제주 중산간 부락에 존재했다는 말코지집/ 사냥꾼의 집으로 몽골의 게르처럼 방 한 가운데 외 기둥이 세워져있다.
 1950년대까지 제주 중산간 부락에 존재했다는 말코지집/ 사냥꾼의 집으로 몽골의 게르처럼 방 한 가운데 외 기둥이 세워져있다.
ⓒ 신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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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주는 제주여인들이 물건을 옮기기 위해 등에 짊어진 '구덕'은 몽골어 'guduk'에서 차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문자, 박경윤 공저 <몽골이 제주방언과 문화에 끼친 영향>에는 우리 언어 중 몽골어에서 전래된 단어가 외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나라 전체로 500단어 정도이고 제주 방언 중에는 240여 개 단어가 있다.
  
제주 박물관 앞에 세워진 돌하르방 모습
 제주 박물관 앞에 세워진 돌하르방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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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수흐바타르 지방 다리강가 솜에 있는 석인상으로 제주도 돌하르방과 유사하다
 몽골 수흐바타르 지방 다리강가 솜에 있는 석인상으로 제주도 돌하르방과 유사하다
ⓒ 저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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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고향이라고 여겨지는 몽골 율리아스타이 인근에 있는 석장승 모습.
 훈족의 고향이라고 여겨지는 몽골 율리아스타이 인근에 있는 석장승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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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우리말 '바른쪽으로'는 몽골어 '바른죽으로'와, '왼쪽으로'는 '준죽으로'와 비슷하다. 위에 든 예문은 우리말과 몽골어가 방향을 나타내는 어휘가 비슷할 뿐만아니라 '으로'라는 토씨까지 동일하다. 몽골인들이 발음하는 말(馬)은 제주 방언과 똑같이 '아래아' 발음과 같은 모음이 있다.

오늘날 제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돌하르방은 몽골의 '훈촐로'가 돌하르방과 비슷하다. '하르방'의 어원이 몽골어 '하라(망보다, 파수보다)'와 '바라칸(신,왕)의 합성어로 '하르방'이 수호신의 성격을 갖는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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