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이라는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노골적인 영화는 같은 주제를 다루었던 여타의 콘텐츠들과 조금은 달랐다. 영화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에 흔히 난무하는 혐오와 폭력적인 논쟁이 타오르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적대하지 않으며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온전히 여성을 비추며 여성을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시나몬 홈초이스

 
신화 새로 쓰기

영화는 신화를 새롭게 쓰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가 차용하는 신화는 그리스 신화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이다. 음악가이자 시인인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다. 노래와 리라 연주로 저승의 신 부부를 감동시킨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갈 수 있게 된다. 다만, 완전히 저승을 나가기 전까지는 아내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승을 눈앞에 두고 아내가 걱정이 된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고 아내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간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향한 오르페우스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감동을 주는 이야기이다. 음악은 그의 헌신적인 사랑과 비극에 따른 낭만을 극대화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르페우스에서 시작해 오르페우스로 끝이 난다. 그 어디에서도 에우리디케의 생각이나 의지를 찾아볼 수 없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서사를 위해서만 존재하며, 전통적으로 여성은 그러한 방식으로 소외되었다. 영화는 스토리에 존재하나 실상 서사에 어떠한 기능도 해내지 못한 채 배제된 에우리디케를 새롭게 살려낸다.
 
리라 대신 캔버스를 든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분)는 저승으로 에우리디케를 구하려 간 오르페우스로, 외딴 섬에 갇혀 원치 않은 결혼을 해야 할 엘로이즈(아델 하에넬 분)는 죽음을 맞이한 에우리디케로 변주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와 노래는 에우리디케를 구해내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오르페우스의 천부적인 재능을 강조할 뿐이다. 반면, 마리안느의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사지로 몰아넣지만 엘로이즈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시나몬 홈초이스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그녀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녀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사용된다. 얼굴이 없는 초상화나 마리안느가 몰래 그린 초상화 속 엘로이즈는 마치 신화 속의 에우리디케처럼 그려진다. 그 그림 속에 욕망과 의지를 가진 엘로이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초상화들은 정해진 틀 안에 갇혀 제 뜻대로 삶을 운영해 나갈 수 없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나아가 그러한 방식으로 '취급되었던' 수많은 여성들을 대변한다.

마리안느는 자신의 시선에만 의지해 그린 그림에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엘로이즈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엘로이즈 역시 그림 속의 자신을 의아해하며 마리안느를 향햔 실망감을 주저없이 표현한다. 마리안느가 그린 첫 번째 초상화는 엘로이즈 없이 그려져 불 속에 던져진, 얼굴없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리안느가 결국 자신이 그린 초상화의 얼굴을 지워버린 것은 이를 잘 드러낸다.

엘로이즈는 누군가의 눈에 비친 대상이었으나 동시에 누군가를 바라보는 주체이다.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두 번째 초상화는 그녀를 주시하는 마리안느의 시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리는 마리안느에 대한 엘로이즈의 시선의 교차로 완성된다. '네가 날 보는 동안 나도 너를 보고 있었다'는 엘로이즈의 말은 서로에게 대상인 동시에 주체인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동등한 위치를 잘 나타낸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어떠한 기여도 감상도 남기지 않으며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에우리디케와 엘로이즈는 달랐다.

이후 엘로이즈는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엘로이즈를 사랑한 마리안느는 자신의 바람을 그녀에게 투영해 엘로이즈가 결혼을 강하게 거부하기를 내심 바란다. 그러나, 엘로이즈의 지적으로 자신 역시 그녀를 틀 안에 규정하려 했음을 깨닫는다. 그녀들의 갈등은 사랑이 상대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며 제뜻대로 바꾸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이것은 어딘가에서 여성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사랑이 상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듯 주의나 주장도 누군가를 구속할 수 없다. 혹여 소신과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구속을 만드는 덫에 빠진 것은 아닌지 끊임없는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시나몬 홈초이스

 
외딴 섬 저택 안 네 여성

영화는 외딴 섬 저택 안의 네 여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여성들만 존재하는 저택은 필요 이상의 구속과 차별이 존재하는 기존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다. 영화는 여성들이 한층 더 차별과 억압에 시달렸다는 비교 우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여성 그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남성을 배제한다. 여성들만 존재하는 세상이 결코 유토피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화한 오르페우스 마리안느는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달리 끊임없이 엘로이즈를 의식하며 엘로이즈를 속이려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속내를 내보이며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진다. 서로를 동등하게 인식하는 두 사람에게 귀족과 화가라는 신분은 관계에 그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는 화가 마리안느와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의 뜨거운 로맨스를 표면에 내세운다. 금지된 그녀들의 사랑은 계급이 존재하던 당시 현실과 맞물려 억압받는 현실에 눈뜬 여성들의 도피처이자 이상형처럼 안타깝게 그려진다. 그러나, 영화는 성소수자들를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로맨스를 배치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상이자 주체로서 상호 작용하는 여성의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바다에 몸이 젖은 채 저택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나체가 된다. 그녀의 나체는 어떠한 욕망과도 거리를 둔 듯 순수하게 비춰진다. 마리안느의 몸은 성적인 욕망이 대상으로, 바라보는 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작된 채 비춰지는 여성의 나체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녀의 나체는 누군가를 위해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저 마리안느가 존재한다.

영화의 시선은 대상과 주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에게 대상인 동시에 주체로 기능한다. 이 오르페우스는 애초부터 산천초목과 신들도 감동시킬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있지 않다. 엘로이즈의 협조가 없다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낼 수가 없다. 대상과 주체의 특성을 혼재하며 마주하는 그녀들의 관계는 지극히 수평적이다. 그 관계는 절대적인 우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두 사람이나 실상 한 사람에 다름 아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통해 자신을 보며,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통해 자신을 본다. 엘로이즈의 성기에 거울을 놓고 자화상을 그리는 마리안느의 모습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마리안느가 그리는 자신은 엘로이즈의 다른 모습이다. 영화가 바라는 관계는 이처럼 또다른 타인에게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하는 궁극의 데칼코마니이다. 이것은 '나'와 더불어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는 것이다. 누구나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지만 존재 가치는 다르지 않다.

그러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보노라며면 여성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성은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동지인 동시에 갈 길을 방해하는 구속자이기도 하다. 엘로이즈의 엄마는 딸의 의사는 개의치 않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딸을 결혼시키려 한다.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만족하는 그녀는 첫째 딸의 죽음에서 어떠한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딸의 죽음은 실패일 뿐이며 엘로이즈가 말없이 저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외면한다. 그녀는 변화 보다는 기존 질서 유지에 집중하는 경직된 사회의 통념과 일방적인 시선의 대변자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시나몬 홈초이스

 
저택 안의 또 다른 여인 소피(루아나 바야미 분)는 전통적인 일반 여성들의 모습에 가장 가깝게 그려진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대상으로만 억압된 채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모습을 대변하며 엘로이즈의 엄마와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관계를 떠나 계급이 존재하는 수직의 사회에서 소피는 자신의 초상화를 가질 수도 없는 그릴 수도 없는 가장 낮은 계급의 존재이다.

소피는 모든 것을 지켜보지만 불필요한 언행을 자제하며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다. 마리안느에게 필요한 도움과 정보를 제공하는 소피는 그 과하지 않음으로 돋보인다. 저택의 살림은 소피의 헌신으로 가능하다. 그녀가 제공하는 노동력이 없다면 일상의 많은 부분이 불편해진다.

그동안 대체로 여성들이 제공한 가사 노동은 하찮게 치부되어 왔다. 여성이 제공한 가사 노동은 소피처럼 가장 낮은 계급의 대우를 받았으며 가사를 도맡았던 여성들 역시 그러한 대우를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세상이 변했다 해도 가사 노동의 가치는 여전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제는 가사 노동과 분리된 일부 여성들조차도 그러한 시선을 견지하는 경우도 많다. 누가 하든 가사 노동없이 일상이 편안하게 유지되기는 쉽지 않다. 꼭 필요한 이 일과 그 일을 소피처럼 묵묵히 담당했던 수많은 여성들에게 대한 정당한 대우와 평가가 요구된다.

엘로이즈의 엄마가 잠시 떠나자 저택에는 세 사람을 구분하는 위계가 사라진다. 탁자에 앉아 카드놀이를 하며 마음껏 웃고 그들의 모습은 편안한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피력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과연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단지 함께하는 것인지, 함께할 수 있는 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불이 피워진 따뜻한 공간은 평등한 관계와 자유로운 소통으로 그 온기를 보장받는다. 영화가 꿈꾸는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녀들의 선택

위계와 구속이 사라진 세상이 안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세상이든 존재한다. 다만 해결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소피는 엘로이즈의 엄마가 떠난 사이 낙태를 결정한다. 그녀의 임신과 관련한 어떠한 정보도 영화는 제공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녀의 결정에 어떠한 간섭도 허락하지 않는다. 임신도 낙태도 남는 고통도 온전히 소피의 몫이다. 영화는 고통의 순간 곁에 있는 유아의 손을 꼭 쥐는 소피를 통해 그녀의 결정에 따라올 모성애 논란과도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엘로이즈의 엄마가 존재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방법이다.

낙태에 관해 오랜 시간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모성애가 지나치게 격상되어 여성들을 구속했다면 낙태는 지나치게 격하되어 여성들을 구속했다. 찬반 양론의 입장 차이와 내려질 결론보다 중요한 것은 주목과 제도화 과정에 당사자인 여성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소피의 결정만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을 강하게 표현한다.

마리안느를 사랑함에도 엘로이즈는 결혼식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분명히 한다. 초상화가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를 잘 알면서도 포즈를 취하기로 결정한 엘로이즈였다. 마리안느와의 시간을 위해 엘로이즈는 이미 자신의 원치 않는 미래에 한 발을 들이밀었다. 저승으로 다시 떨어지면서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했던 에우리디케와 달리 엘로이즈는 뒤를 돌아볼 것을 주문하는, 스스로 금기를 깨는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시나몬 홈시어터

 
마리안느가 홀로 나간 문밖의 세상은 엘로이즈가 남겨진 저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결합이 궁극적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이들의 이별은 어찌 보면 무력한 선택이지만 용기는 어떤 상황에선 만용이 된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불'의 이미지는 이러한 그녀들의 처지를 다의적으로 대변한다. 바다에 젖은 마리안느의 몸을 녹이고, 음식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불은 자칫 잘못 사용하면 매우 위험하다. 엘로이즈의 치마에 붙은 불은 그녀들의 열정이 그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후 마리안느가 발견한 그림 속의 엘로이즈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당당한 그녀 모습이 담겨있다. 그림 속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그림이 담긴 책의 페이지를 표시하며 자신이 누군인지 세상에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현실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 그녀 자신을 의식하며 대상으로만 존재하기를 거부하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엘로이즈와 함께 그려진 딸로 추정되는 소녀는 여성을 대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소망을 응축한다. 엘로이즈는 분명 그녀를 향해 어릴 때처럼 인사하라는 주문을 했던 그녀의 어머니와는 다를 것이다. 자신의 딸을 지배하려고도 전형적인 초상화의 대상으로 머물게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엘로이즈의 시도들이 전복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대단한 변화를 야기하지 못하더라도, 필요한 이유이다. 

변화는 대가없이 이루어지 않는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 엘로이즈는 먼저 차디찬 바닷물에 들어가야 했다. 바다는 두려움과 고통의 대상이지만 마음껏 헤쳐나갈 자유를 주기도 한다. 다시 또 파도가 덮친다 하더라도 헤엄치길 멈추지 않는다면 점점더 능숙해질 수 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성취감일 것이다. 녹록치 않은 현실이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자각해 나가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일 것이다.

마리안느와 함께 공유한 음악을 들으며 전율을 느끼는 엘로이즈의 모습은 당시의 열정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엘로이즈가 온전히 그녀일 수 있었던 마리안느와 함께했던 시간으로 그녀는 되돌아간다. 이승과 저승처럼,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지만 그 순간만큼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와 함께이다. 그녀의 모습은 그림 안에 가둘 수 없는 생생하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그 시간의 뜨거움으로 엘로이즈는 차가운 현실에서 얼어붙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쁨과 환희에 깃든 엘로이즈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슬픔을 자아낸다. 현실을 변화시키기란 쉽지 않으며 셀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 현실은 만만하지 않다 못해 가혹하기까지 하다. 엘로이즈의 불이 그녀를 살라먹지 않고, 어두운 길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깃드는 우수는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영화는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두 사람을 비판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았다 하여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영화는 분명 억압과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의 현실을 조망하자고 하는 욕구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논쟁을 지향하지 않았다. '퀴어'가 전면에 강조되면서 자칫 불거질 소모적인 대결 양상과도 거리를 둔다.

영화는 누군가나 무언가를 탓하기 보다는 여성들이 올곧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전히 차가운 현실 속의 '나'를 직시하길, 그리고 자신을 보다 뜨겁게 사랑하길 권유하고 있었다. 그것이, 영화가 바라는 '변화'의 출발점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시나몬 홈초이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비단 여성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여러 이미지들에 다양한 해석을 유도한다. 이는 영화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는 여성에 집중해 있지만 다양한 상황 속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로 변주될 수 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는 가슴 속에 타올랐던 뜨거운 불길을 꺼뜨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을 모두를 위한 연주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양선영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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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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