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정, 신기성, 김성철, 양동근, 김태술, 박찬희, 김종규, 이승현...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역대 프로농구 '신인왕'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이라는 것이다. 이들 모두 '될성부른 떡잎' 시절을 넘어 KBL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선수로 성장했다. 심지어 김승현, 김주성, 하승진, 오세근 등은 데뷔 첫해 신인왕과 함께 소속팀을 정상까지 이끌며 지금도 프로농구 판도를 바꾼 '슈퍼 루키'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신인왕 출신이라고 모두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낸 것은 아니다. 이현호나 박성진, 정성우, 변준형처럼 신인왕 출신임에도 인지도나 존재감이 부족했던 사례도 있다. 신인들의 활약상이 돋보이지 않았던 시즌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 2019-2020시즌은 그야말로 과거의 사례는 애교로 보일 만큼 프로농구 역사상 최악의 '신인 흉작'으로 기억될 듯 하다.

정규시즌이 어느덧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올해 신인 중에서 아직까지 특별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없다. 팀에서 선발 주전은 고사하고 경기당 15분 이상을 소화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을 지경이다. 단순히 기록이 약간 저조하다는 차원을 넘어 아예 신인왕 후보를 운운하기에 함량미달 수준이다.

지난 2019 신인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KBL에 입성한 선수들은 팀의 13번째 경기부터 뛸 수 있었다. KBL 신인상의 조건은 출전 가능한 경기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 올 시즌 데뷔한 신인들은 출전 가능한 최대 42경기 중 21경기 이상을 소화해야 신인왕 후보에 오를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현재까지 신인왕 자격을 갖춘 선수는 김훈(원주 DB) 단 한 명이다. 김훈은 21경기에서 평균 11분 13초를 소화하며 2.9점, 1.5리바운드를 기록 중이다. 김훈은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5순위(전체 15순위)로 DB에 지명된 선수다.

신인왕이 2라운더 출신에서 나온 것은 지금까지 2003-2004시즌 이현호가 유일하다. 심지어 김훈은 신인드래프트에서 '일반인 참가자' 자격으로 참여했던 선수다. 물론 연세대 2학년까지 운동선수로 활약했지만 한때 공백기를 거친 이후에는 동호인 농구와 3대3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이력이 전부다. 그런 선수가 엘리트코스를 밟아본 1라운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사실상 유일한 신인왕 후보에 오르는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김훈의 인생역전 스토리는 충분히 박수받을만 하지만, 그 정도의 성적으로 신인왕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은 농구계 차원에서는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김훈은 최다 경기출전을 비롯하여 최다 누적 득점-리바운드, 평균 출장시간에서도 신인 중 유일하게 10분대 이상을 소화하고 있는 선수다. 사실 김훈에게는 운도 어느 정도 따랐다. DB가 올시즌 유독 부상자가 많았던데다 사령탑이 식스맨들을 폭넓게 활용하는 스타일의 이상범 감독이 아니었다면 김훈 역시 다른 신인들처럼 벤치만 달구는 신세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작 올 시즌 기대를 모았던 상위권 지명 신인들의 성적은 처참하다. 1순위 박정현(창원 LG)이 19경기 평균 7분 15초를 출장하며 1.7득점 1.8리바운드, 2순위 김경원(안양 KGC 인삼공사)이 9경기에서 평균 2분 37초간 0.3점, 0.4리바운드, 3순위 김진영(서울 삼성)이 15경기에서 평균 8분 29초, 2.7득점 1.1리바운드 0.5어시스트, 4순위 전성환(고양 오리온)이 17경기에서 평균 9분 28초, 1.4득점 0.9리바운드 1.4어시스트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치고 있다.

현재로서 잔여경기에서 신인왕 자격 요건인 21경기 출전을 달성할 수 있는 선수는 김훈 외에 4~5명 정도 더 나올 수 있지만, 설사 조건을 채우더라도 김훈보다 성적이나 공헌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는 실정이다.

역대 프로농구에서 최악의 신인왕으로 꼽히는 선수는 2015-2016시즌 LG 정성우(당시 1라운드 6순위, 4.2점, 2.8어시스트, 1.7리바운드)였다. 당시 신인 드래프트도 흉작이라는 평가가 많았고 유력한 후보였던 문성곤과 한희원이 팀내에서 주전경쟁에 어려움을 겪으며 정성우가 수상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정성우는 데뷔 시즌 무려 37경기나 출전했고 평균 출장시간도 21분 21초에 이르며 확실하게 팀 전력에 기여한 부분이 존재한다. 개인 성적이 아쉽다는 비판은 있었을지인정 최소한 신인왕 수상 자격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평균 4점 이상, 20분 이상을 출장하는 선수가 아예 실종된 올해 신인들과는 비교 자체가 정성우에게 실례다.

최근 KBL에서는 신인 선수들의 활약상이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신인 선수가 평균 두 자릿수 득점-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것은 2014-2015시즌 신인왕 이승현(고양 오리온,10.9점·5.1리바운드·2.어시스트)로 마지막이다. 최근 3년간은 2017-2018시즌 인천 전자랜드 강상재(8.2점·4.7리바운드·1어시스트), 2017-2018시즌 서울 SK 안영준(7.1점·3.7리바운드), 2018~2019시즌 KGC 변준형(8.3점·2.1리바운드·2.2어시스트) 등이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신인 선수들의 영향력 감소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아무래도 시즌중에 열리는 KBL 드래프트 일정상 신인선수들은 비시즌 훈련을 함께 하지 못하고 합류하다보니 프로농구와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대학농구의 경쟁력 문제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프로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 시절만 해도 대학과 실업간의 수준차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프로화 이후 대학과 프로팀간에는 점점 격차가 벌어졌다. 대학 선수들은 농구선수로서 극소수의 국가대표급이 아닌 이상 한창 성장해야 할 20대 초반에 대학리그에서 비슷한 또래 선수들하고만 경쟁하다보니 기량 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작 프로 못지않게 성적지상주의에 연연하는 국내 학원스포츠의 특성상, 선수들이 기본기나 기술의 발전보다 성적에 연연하며 체계적인 관리를 받지 못하고 혹사당하는 경우도 많다. 예전처럼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점 관리 등 신경써야할 것도 많다. 몇몇 우수 선수들은 대학 시절의 재능에 안주하거나 프로 진출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여 몸 상태가 엉망인 사실이 드러나며 이들을 지명한 구단에 큰 실망감을 안기기도 했다. 선수들도 프로로서의 책임감과 자기관리 부족이 아쉬운 장면이다.

물론 프로 초창기처럼 신인 선수들이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달라진 시대 환경상 무리가 있다. 올해 MVP 후보로 급부상한 허훈이나 양희종, 이정현, 두경민처럼 신인왕 출신이 아니더라도 경력이 쌓이면서 오히려 동기들보다 더 빛을 발하는 사례들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초중고 대학까지 거치며 평생 농구를 해왔고, 심지어 1라운드를 통하여 프로에 지명될 정도의 선수라면 최소한 '즉시전력감'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당연한 기대치다. 프로는 배우거나 경험을 쌓는 학교가 아니라, 당장 자신이 가진 능력을 증명해야 살아남는 회사에 가깝다. 선수 본인은 물론이고 대학농구와 KBL 모두 해마다 떨어지는 신인들의 경쟁력 문제에 대하여 공통의 책임감이 필요하다.

또한 이대로라면 올해 과연 신인왕을 시상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도 다시 생각해봐야할 부분이다. 냉정히 말해 아무리 상대적인 평가라지만 올해 신인들 정도의 기록으로 신인왕을 운운한다는 자체가 넌센스다.

농구도 오늘날에는 득점이나 리바운드, 어시스트같은 클래식 스텟 외에도 선수의 공헌도나 실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데이터가 있다. 구체적인 자격 기준을 강화해서라도 신인왕에 어울릴만한 수준의 선수가 없다면 그 해는 아예 수상자를 없애는 것도 가능한 선택이다. 누가 받아도 '역대 최악의 신인왕'이라는 꼬리표를 두고두고 달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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