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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망무제의 지중해 풍경이 펼쳐지는데, 맑은 날이면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까지 보인다고 한다.
▲ 이탈리아의 발코니, 리보르노 해안 일망무제의 지중해 풍경이 펼쳐지는데, 맑은 날이면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까지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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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일찍 잠을 깼다.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 리보르노에 가기 위해서다. 현재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무역항이자 르네상스 시대를 연 메디치 가문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는 곳이지만, 이탈리아를 찾는 관광객 중 리보르노에 가기는커녕 도시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리보르노는 피렌체에서 30~40분 간격으로 기차가 다녀 찾아가는 데 불편함은 없다. 과거 메디치 가문이 지중해를 통한 무역을 벌일 때 구축한 도시로, 상인들의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요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가 파괴되는 아픔도 겪었다.

기차로 리보르노를 가자면, 반드시 경유하는 도시가 피사다. 기울어진 사탑으로 한 해 수천만 명의 관광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곳, 그 피사 맞다. 피사 다음에 정차하는 곳이 종착역인 리보르노인데, 피사에서는 10여 분, 출발역인 피렌체에서는 1시간 남짓 소요된다.

피사를 지나자 빈 좌석 하나 없이 꽉 찼던 객실이 아예 텅 비어 버렸다. 기차에는 피사의 사탑을 보려는 관광객들뿐이었던 셈이다. 외려 내리지 않고 창 밖을 응시하고 있으니, 통로를 지나가던 다른 관광객들이 왜 내리지 않느냐고 눈짓을 건넸다. 여기가 바로 피사라면서.

역시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그들에게 건넸다. 플랫폼에 내리면서까지 자꾸만 뒤돌아보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들은 지금까지도 우리가 내릴 곳을 몰라 헤맨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리보르노에 가려는 이유를 모를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탈리아의 발코니이자 루카렐리의 고향
 
이탈리아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안토니오 그람시가 대중 연설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 리보르노의 중심, 그란데 광장 이탈리아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안토니오 그람시가 대중 연설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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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르노를 부르는 별칭은 많다. 망망대해 지중해의 수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이탈리아의 발코니'로 불리며, 요새를 감싼 해자와 인공적인 운하가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토스카나의 베네치아'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피렌체의 외항 구실을 했으니, 그에 걸맞은 별칭이다.

또, 이탈리아 내 조선소가 밀집된 곳이라는 뜻에서 '요트의 메카'라는 별칭도 있다. 수많은 크고 작은 요트들이 바닷가와 운하에 정박해 있는 모습은 리보르노를 대표하는 풍경이 됐다. 매립지에 건설된 까닭에,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와는 달리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관광지가 아닌 리보르노를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굳이 찾은 이유는 따로 있다. 괴짜 축구선수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누 루카렐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이기 때문이다. 1975년생인 그가 네 시즌 동안 뛰었고, 리그 득점왕까지 거머쥐었던 클럽이 바로 AS 리보르노 칼초다.

지금은 세리에 B에 소속되어 우리나라 축구 팬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루카렐리와 리보르노 칼초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은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다. 그는 경기장 밖에서 공공연히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밝혔고, 클럽 역시 좌파 성향의 선수를 선호했다. 1915년 설립된 이래 클럽의 상징색이 줄곧 핏빛 붉은색인 이유다.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체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품과 축구팀 리보르노 칼초의 배너와 저지 등을 파는 가게였다.
▲ 리보르노 기차역 대합실 모습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체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품과 축구팀 리보르노 칼초의 배너와 저지 등을 파는 가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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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클럽도 그렇지만, 애초 리보르노가 좌파의 본향이기도 했다. 주도인 피렌체를 비롯해 토스카나 지역 전체가 이탈리아에서 좌파 성향이 강한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중에도 리보르노는 첫 손에 꼽힌다. 명실공히 이탈리아 공산주의의 역사가 시작된 도시가 바로 이곳 리보르노다.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정강과 정책이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좌파 계열 정당의 텃밭으로서 리보르노는 우뚝하다. 곳곳에 주세페 마치니와 안토니오 그람시의 흔적이 남아 있고, 우파 정치인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무솔리니 집권 이후 지역에 대한 모진 탄압이 이어졌지만, 그들은 꿋꿋이 견뎌냈다.

참고로, 공화주의자 주세페 마치니는 가리발디, 카보우르와 함께 19세기 이탈리아 독립 영웅으로 추앙되며,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고 파시즘에 맞서 싸운 정치가이자 사상가로서 이름이 높다. 그람시는 1921년 이곳 리보르노에서 이탈리아 사회당 당원으로서 연설을 했고, 이를 계기로 공산당이 공식 출범하게 된다.

극우파 정권이 수립된 뒤 그람시는 체제 전복 혐의로 수감되는데, 그가 수형생활 중 쓴 책이 그 유명한 <옥중서신>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역사의 발전이며 진보라는 명구가 담겨 있는 책이다. 고 신영복 선생의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옥중서신>의 한국판으로 불리기도 한다.

축구선수의 말이 화제를 일으키는 곳
 
도시 곳곳에 운하가 나있어 '토스카나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방어용 해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진 뒤로 메디치 가문이 쌓았다는 요새가 보인다.
▲ 리보르노를 에워싼 운하의 모습 도시 곳곳에 운하가 나있어 "토스카나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방어용 해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진 뒤로 메디치 가문이 쌓았다는 요새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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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의 루카렐리와 리보르노 칼초에 대한 사랑은 고스란히 우파 계열 축구 클럽으로 유명한 SS 라치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현재 세리에 A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라치오와 축구 실력으로야 견줄 순 없다지만, 선수들과 시민들의 라이벌 의식은 대단하다. 마치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버금갈 만하다.

우파에 대한 혐오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리보르노 칼초의 홈 경기장의 이름을 무솔리니의 딸 이름을 따 '에다치아노'로 바꾸자, 선수들과 시민들이 합심하여 홈을 다른 축구장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비록 열악한 환경일지언정 독재자 무솔리니의 이름을 건 경기장에서 뛸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공산주의자 루카렐리의 '입'도 끊임없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 분야에서는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철저히 금하고 있지만, 경기장 밖에서 그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리보르노 칼초의 팬들은 물론, 시민들까지도 그가 남긴 '명언'들을 따로 모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다른 선수들은 자기가 번 돈으로 별장과 요트, 페라리를 앞 다퉈 구입했지만, 나는 내 돈으로 리보르노 칼초의 유니폼을 샀다."

그가 고향과 클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발언이지만, 유머러스한 그의 말 속엔 뼈가 있다. 당장 선수들 간의 엄청난 소득 차이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별장과 요트, 페라리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로부터 연유되었음을 비꼰 것이다. 그에게 이 정도는 약과다.

"우리는 경기 중 상대 팀 선수들과도 싸워야 하지만,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도 극복해내야 한다. 그들은 줄곧 우리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릴 것이다. 우리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출중한 기량으로 한때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발탁되기도 했지만, 축구선수로서 그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그의 문제적 발언이 그때마다 발목을 잡은 것이다. 스스로도 그의 선수로서의 삶이 평탄치 못했던 이유를 공산주의자인 탓이라고 여겼다.

시민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숫자, 99

그래도 이탈리아에서는 이 공산주의자 축구선수를 매몰차게 내치진 못했다. 당장 기량이 남달랐던 까닭이지만, 시민들의 지지와 호응이 뒷받침된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리보르노에서 축구를 시작해 파르마, 나폴리, 토리노, 발렌시아, 샤흐타르 등 국내외 클럽을 오가다 지난 2012년 은퇴했다. 한편, 파르마의 레전드, 알레산드로 루카렐리가 그의 동생이다.

"축구선수로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돈과 갈채가 아니라, 유년 시절의 추억과 고향 팀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그가 2003~2004 시즌 리보르노 칼초를 세리에 A로 승격시킨 수훈갑으로서 여러 팀으로부터 이적 제안을 받았을 때 남긴 말이다. 엄청난 연봉이 보장된 자리였지만, 그는 모두 뿌리치고 고향 팀 리보르노에 남았다. 이후 그의 등번호였던 99는 시민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숫자가 됐다.
 
루카렐리를 기억하러 리보르노에 간 김에 오피셜 숍에 들러 리보르노 칼초의 저지와 배너, 모자 등을 구입했다. 저지는 마네킹이 입고 있던 것이다.
▲ 축구클럽 AS 리보르노 칼초의 저지 루카렐리를 기억하러 리보르노에 간 김에 오피셜 숍에 들러 리보르노 칼초의 저지와 배너, 모자 등을 구입했다. 저지는 마네킹이 입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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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르노 기차역 대합실에는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 사진을 앞세운 리보르노 칼초의 저지 등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가게를 지키고 있는 촌로의 모습을 통해 고향 축구팀에 대한 시민들의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다. 그 길로 예정에 없던 리보르노 칼초의 오피셜 숍을 찾았다.

가는 길에는 여느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유대교 회당과 터번과 히잡을 쓴 무슬림들이 눈에 띄었다. 성당의 십자가가 도시를 휘감은 다른 곳과는 풍경이 확연히 달랐다. 피렌체나 피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물가가 쌌고, 영어는 서툴렀지만 사람들은 친절했다. 

오피셜 숍은 한산했다. 괴짜 루카렐리는 이미 은퇴하고 없지만, 내친 김에 리보르노 칼초의 저지를 한 벌 사기로 했다. 세리에 A도 아닌, 세리에 B에 소속된 팀의 저지를 사겠다는 이방인의 방문에 가게 주인은 연신 어리둥절해 했다. 하지만, 몸에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미안해 하는 그에게 그래도 꼭 사고 싶다고 했더니, 우두커니 듣고 있던 점원은 부리나케 쇼윈도로 달려가 마네킹이 입고 있던 저지를 벗겨 왔다. 입어 보니 위아래 모두 놀랍게도 내게 꼭 맞았다. 마네킹도 지구 반대편에서 손님이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빙긋 웃어 보였다.

태그:#리보르노, #크리스티아누 루카렐리, #이탈리아 공산당, #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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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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