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8 14:03최종 업데이트 20.01.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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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질'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지. '갑질'은 많이 들어봤는데 '을질'이라니. 나는 이 단어를 '우장창창' 기사 댓글에서 처음 봤다. 

우장창창 사태는 건물주가 상가임대차보호법의 허점을 이용해, 세입자가 형성한 권리금을 '합법적으로' 약탈한 대표적 사례였다. 2016년 여름, 한창 우장창창 투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쏟아지는 기사와 댓글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을질'...?

해괴한 신조어였다. 리쌍은 법대로 했는데 우장창창 사장이 떼쓴다는 거였다. 건물주가 '갑'이고 세입자가 '을'인데, 세입자가 안 나가고 떼쓰면서 '을질'을 한다는 뜻이었다. 

이 단어를 본 내 친구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을질? '남혐' 같은 건가?" 실제로 성립이 될 수 없단 뜻으로 한 말이었다. (관련 기사: "'우장창창 을질'은 억울한 누명, 당황스럽다")

'합법적으로' 쫓겨나면 손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궁중족발 쫓겨나기 전 궁중족발의 모습. ⓒ 하민지

 
실제로 많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쫓겨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우장창창도, 상가임대차 분쟁의 대표적 사례인 궁중족발도 법에 따라 쫓겨났다. "에이, 법이 설마 그럴 리가" 싶겠지만 법이 진짜 그렇다. 

예를 들어 보자. 한 직원이 회사 다니면서 일 열심히 해서 회사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이 "네 월급을 반으로 깎아야겠어"라고 한다든지, "더 뛰어난 사람 뽑으려고 하니까 너는 나가"라고 한다면 어떨까? 당연하게도 부당해고다.

그런데 건물과 땅을 가진 사람들한테는 이게 합법이다. 어떤 장소에서 오래 머물면서 거기 살고, 오래 장사하면서 상권을 형성하고, 사람들에게 '여기에 오면 족발집이 있다' 같은 인식을 심어주고, 그 지역의 역사를 만들고, 그 지역을 명소로 만든 일을 한 사람들이 아주 쉽게 쫓겨난다.

서촌 궁중족발의 경우, 건물주는 나가라는 말을 월세 4배 올린다는 말로 했다. 궁중족발 건물주는 2016년 1월, 건물을 사고 등기부 등본에 올리자마자 사장에게 월세를 4배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사장이 항의하자 월세 입금 계좌를 알려주지 않고 사장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월세 체납을 명분으로 내쫓으려다 입금 계좌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계약갱신청구권을 걸고넘어졌다.

계약갱신청구권은 세입자가 건물주에게 "기존 계약대로 2년 더 장사하겠습니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세입자 보호를 위해서 만들어진 권리인데, 이 권리는 5년까지만 보호됐었다. 

궁중족발 사장은 여기에 걸렸다. 5년이 지나 이 권리를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계약갱신청구권 만료를 이유로 명도소송에서도 이겼다. 하지만 궁중족발 사장은 이대로 쫓겨날 수 없었기에 투쟁을 시작했다. '을질' 혹은 '떼쓰기'의 전말은 이렇다. (관련 기사: 서촌 족발집 사장은 왜 손가락 네 개가 잘렸나

형사님, 법이 바뀌기 전에 쫓겨납니다
 

궁중족발 강제 철거에 연대하는 모습. ⓒ 옥바라지선교센터 페이지

 
궁중족발 건물주는 연대인들을 무더기로 고소했다. 그 중엔 나도 있다. 업무방해, 주거침입 등으로 고소당했다. 재작년에 종로경찰서에서 4번 조사받았다.

형사가 나에게 그랬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예요. 다 법대로 해요. 저는 궁중족발 사장이 이해가 안 돼요. 억울하면 법을 바꿔야지 왜 점거를 해요?"

지금부터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이 기울어진 법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첫째, 법을 바꿔 줄 국회의원을 뽑는다. 당장 쫓겨나게 생겼는데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가 내가 투표한 후보가 뽑히리란 보장도 없다. 패스. 

둘째, 현역 국회의원에게 법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다. 궁중족발에 들른 국회의원들이 몇 명 있었으나,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려면 이 몇 명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도 패스. 

셋째, 법을 바꿔 달라고 항의하고 글 쓰고 기자회견하고.... 끝없는 반복이다
 

국회 앞 1인 시위 2018년 여름, 궁중족발 사장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하던 모습. ⓒ 서촌 궁중족발 페이지

 
국회의원 아닌 사람이 법 바꾸는 방법이 뭐든 가장 큰 문제는, 당장 '합법적으로'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길거리에 나앉아서, 법이 바뀌기 전까지 시간적·금전적·정신적 피해를 고스란히 봐야 한다는 것이다.

약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잘못된 법 때문에 피해를 본다면, 손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할까? 법치주의는 원래 느리니까, '민주 시민'으로서 우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 내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데, 대체 어느 세월에. 

궁중족발 사장은 아침저녁으로 법 바꿔 달라는 1인 시위를 했다. 시위 3개월 후 법이 바뀌었다. 계약갱신청구권 보호 기간이 5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났다. 이른바 '궁중족발법'이다.

법이 1인 시위만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인 시위를 포함해, 궁중족발이 '불법적인 합법'에 저항하고 싸운 2년의 시간 덕에 바뀌었다. 이 싸움을 을질이라고, 떼쓰는 거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싸움이 있었기에 세입자는 건물주에게 10년간 재계약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건물과 땅의 가치는 그곳에서 일한 사람들이 만든 것
 

건대 헤어109 건대 헤어109 투쟁 모습. 손님으로 위장한 용역들이 들어와 강제집행을 마무리했다. 현재 헤어109 사장은 지인의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 옥바라지선교센터 페이지

 
사람이 강제로 쫓겨나는 현장에 다니다 보면 오래 일한 사람들의 흔적들을 종종 목격한다. 노동의 굳은살 같은 것이다.

건물주에게 망치를 휘둘렀던 궁중족발 사장은 일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장사해야 하는데 가게를 들락날락할 수 없고, 손님 드실 족발을 썰어야 하는데 담배 피운 손으로 썰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쟁 중에도 한 대도 피우지 않았다. 속상하니 피울 만도 한데 안 피웠다. 그가 말했다. "나는 꼭 다시 장사할 거예요. 그러니까 아예 입에 대지 말아야지."

건물주가 하지도 않을 리모델링을 한다고 내쫓아 일터를 잃은 건대 헤어109 사장은 새끼손가락 손톱만 길게 기르고 있다. 섹션(머리카락을 나누어 쥐는 것)을 빨리 나눠서 손님 머리카락 자르는 시간을 줄여드리기 위해서 기르는 거라고 했다. 헤어109를 영업해 온 9년간 그렇게 기르고 다듬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새끼손가락으로는 코도 안 파요. 항상 청결하게 유지해요. 손님들 머리카락이 많이 닿으니까."

30년 장사한 아현포차 이모들은 핸드폰에 단골손님 전화번호만 수백 개가 있다.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 단골손님들이 결혼하고, 애 낳고, 이직하고, 손주도 본다. 그런데 그 손님들 사는 모양을 다 기억한다. 한번은 작은거인 이모 포차에 있었는데, 넥타이 부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이 "이모, 한참 찾았어요. 뉴스는 봤는데 여기 계셨구나. 이모 저 애 낳은 거 기억하세요?" 했더니 이모가 말했다. "기억하지 그럼. 이제 초등학교 갔겠네." 단골손님은 맞다며 좋아했다.

합의 없이 사람을 내쫓는 일은 이렇게 오랜 시간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를 부당해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물과 땅의 가치는 이 건물과 장소에서 수년간 일한 사람이 만든다. 그런데 건물주와 땅 주인은 이 가치가 온전히 자신들의 것인 줄 착각한다. 돈 주고 샀으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법은 그 생각이 맞다며 그들의 편을 든다. 일한 사람이 만든 건물과 땅의 가치를, 건물과 땅을 돈 주고 산 사람들만이 누리는 현실이 놀랍게도 합법이다.

이렇게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법에 저항하는 건 억지로 떼쓰는 게 아니다. 내 권리를 온전히 찾는 일, 기울어진 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 같은 법으로 똑같이 고통받는 이웃을 구제하는 일이다. 궁중족발이 2년간 저항했기에 법이 바뀔 수 있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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