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는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건축, 종교, 정치권력 등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려는 연재입니다. 이번에는 '르네상스의 라이벌'을 몇 편을 통해 다룹니다.[편집자말]
대성당에 올린 새로운 돔은 도시의 물리적 정신적 중심체가 되었고, 피렌체뿐만 아니라 토스카나 지방 전체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손세관, <피렌체-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82쪽, 열화당)
 
피렌체의 상징이라면 두오모라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일 것이다. 두오모 성당이 있는 자리는 원래 산타 레파라타 성당(basilica of Santa Reparata)이 있던 자리로 종교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시민권력이 성장하면서 900년 이상 된 낡은 성당을 허물고 신축하기로 한다.

1292년 피렌체 시의회는 아놀로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1302/1310?)에게 신축 성당의 설계를 맡긴다. 1296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캄비오의 사망으로 30년간 중단되기도 했다. 다른 건축가가 이어받았지만 흑사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1418년이 되어서야 돔을 제외한 성당 건물이 완성되었다.
 
한동안 돔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드라마 '메디치 : 피렌체의 지배자들(Medici: Masters of Florence)'를 보면 돔이 없는 상태의 성당 모습이 나온다.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한동안 돔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드라마 "메디치 : 피렌체의 지배자들(Medici: Masters of Florence)"를 보면 돔이 없는 상태의 성당 모습이 나온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돔은 도저히 만들 수 없었다. 아무런 내부 지지대 없이 거대한 돔을 지탱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 문제가 지적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 분명히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 믿고 공사를 밀어붙였다. 피렌체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고 성당 지붕이 훤히 열린 채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중에 이 돔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이다.

돔을 만들 때 건축가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압축력(壓縮力, 위에서 아래로 미는 힘)과 인장력(引張力, 측면으로 당기는 힘)이다. 이 힘들은 돔의 크기(지름)가 커질수록 급속히 강해진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우선 돔의 모양을 완전한 반구가 아니라 위로 늘어난 모양이며 원형에 가까운 팔각형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돔을 내부와 외부 두 겹으로 만들어 힘을 분산시켰다. 돔 꼭대기로 올라갈 때 사용하는 계단이 이 두 겹의 돔 사이 공간이다. 또한 '헤링본(herringbone, 청어 뼈 모양)' 방식으로 벽돌을 쌓아 견고함을 더했다.
      
  헤링본 방식으로 벽돌을 쌓았다
▲ 돔 내부 벽  헤링본 방식으로 벽돌을 쌓았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달걀을 세워라

1418년 모직업 길드는 이 돔을 완성하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고, 메디치 가문이 이를 후원한다. 야심만만한 여러 건축가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대부분 내부 지지대를 활용하는 방법이어서 최초 설계와 거리가 있었다.

로마에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도 이 공모전에 참가한다. 브루넬레스키가 로마 판테온을 연구하면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완성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 옛날에도 지지대 없이 큰 규모의 돔을 만들 기술력이 있었다는 것을 판테온은 보여준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 외에도 여러 고대 로마의 무덤과 유적을 연구했다
▲ 로마 판테온의 돔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 외에도 여러 고대 로마의 무덤과 유적을 연구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그는 평가 위원회에 자신이 완벽한 돔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아이디어를 훔쳐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경쟁자들은 브루넬레스키가 허풍을 떠는 거라며 비난했다. 이에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에게 돔 공사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여러 명이 도전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의 끝을 깨서 세운다.

경쟁자들은 저런 방법이라면 자신들도 달걀을 세울 수 있다며 분노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의 방법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방법을 공개하면 아이디어가 도용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우여곡절 끝에 브루넬레스키가 돔 공사를 맡게 된다. 어쩌면 '콜럼버스의 달걀'보다 '브루넬레스키의 달걀'을 원조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돔 공사의 인부들

1420년 8월 7일 기공식이 열렸다. 공사에는 채석장 인부까지 포함하여 총 3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이들의 근무환경은 매우 가혹했다.

작업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해가 긴 여름에는 열네 시간 이상을 일했다. 120미터 높이에서 좁은 비계 사이를 오가는 것은 여러 사고를 불러왔다. 실제로 인부가 추락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 위원회는 장례비만 지급했을 뿐, 유족에게는 한 푼의 위자료도 없었다.

위원회는 공사 인부들이 작업 시간 동안 땅으로 내려올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오르내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인부들은 하루 종일 그 높은 곳에서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작업했다. 뜨거운 여름 오후에 즐기는 시에스타(낮잠)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인부들이 들고 일어나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자 브루넬레스키와 위원회는 이들을 모두 해고해 버린다. 하지만 인부들은 대부분 지독하게 가난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파업을 철회한다. 이때 위원회는 처음보다 더 낮은 임금을 강요했고 인부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동의한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 끝나지 않은 라이벌 관계

공사를 맡기긴 했지만 위원회의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례당 청동문을 두고 경쟁했던 로렌초 기베르티를 공동 책임자로 임명한다. 성격이 불 같아 통제하기 어려운 브루넬레스키보다 유연하고 우호적인 기베르티가 함께 한다면 불안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불안했는지 위원회는 공동 책임자를 7명까지 늘리기도 했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는 공동 책임자였지만 그 역할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
 
임원들이 규정한 필리포의 임무는 '돔의 축조, 존속, 완성에 바람직하거나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제공, 준비, 제작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반면 로렌초의 임무는 단순히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다.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희재 옮김, 세미콜론)
 
이렇게 곁가지 역할만을 하는 기베르티였지만 급여는 브루넬레스키와 같았다. 건축 관련 경험이 일천하고 공모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기베르티가 공동 책임자로 임명된 것에 브루넬레스키는 분노했다. 거기에 급여까지 같은 데에 큰 모욕감을 느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베르티를 몰아낼 방법을 강구했다.

필리포는 돔을 완성하기 위해 나무 사슬을 이용한 공정을 구상했다. 나무 사슬 작업을 위한 밤나무가 도착했을 때 브루넬레스키는 옆구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병상에 누워 버렸다. 혹자는 이를 꾀병이라며 힐난하기도 했다.

브루넬레스키가 현장에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모든 작업은 기베르티가 지휘해야 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나무 사슬 작업에 대해 기베르티에게 알려줬을 리가 없다. 게다가 기베르티는 청동문 제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현장은 멈췄고 조급해진 위원회는 브루넬레스키에게 제발 어서 현장으로 복귀해 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위원회는 그의 연봉을 100플로린으로 거의 세 배나 높여 주었다. 반면에 기베르티의 연봉은 여전히 36플로린이었다. 자신의 중요성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브루넬레스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장으로 복귀한다. 나중에 기베르티는 두 번째 청동문(일명 '천국의 문') 제작을 맡으면서 서서히 돔 공사에서 멀어졌고 모든 것은 브루넬레스키가 장악하게 된다.

1436년 3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8월 30일,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았다. 드디어 약 400만 장의 벽돌로 쌓은 지름 45미터의 돔이 16년 23일 만에 완성되었다.
 
  자신이 만든 돔을 올려다 보고 있다.
▲ 부르넬레스키 조각상  자신이 만든 돔을 올려다 보고 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참고자료]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희재 옮김, 세미콜론)
손세관 <피렌체-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열화당)
성제환 <당신이 보지 못한 피렌체> (문학동네)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이근배 옮김, 한길사)
김상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21세기 북스)
리사 맥개리 <이탈리아의 꽃 피렌체> (강혜정 옮김, 중앙북스)
미국-이탈리아 합작 드라마 <메디치 : 피렌체의 지배자들(Medici : Masters of Florence)>

태그:#피렌체,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