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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 주변으로 연막탄의 연기가 자욱하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 주변으로 연막탄의 연기가 자욱하다.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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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시아버지 칠순잔치 하러 간 프랑스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2020년 1월 9일 목요일, 프랑스 노동자의 연금개혁 반대 파업 및 시위 36일째. 우리는 적절한 시간에 시위 장소로 가기 위해 시부모님 댁에서 점심식사를 든든히 먹은 뒤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서야 파리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오전에는 시위에 동참하고자 하는 단체나 일터 대부분이 출근 시간 전후로 노동자 '미팅'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 미팅에서는 이날 시위에 대한 정보 공유와 의견 교환이 이뤄지며, 이후 최종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업무를 정리하고 거리로 나간다. 물론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간다. 모두가 모이는 행진은 오후 1시 30분에 리퍼블리크 광장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RER(고속교외철도)을 타고 파리북역(gare du nord)에 내려서 살짝 걸었더니 우리가 잘 찾아왔음을 일러주는 듯, 붉은 연기가 먼발치서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즘 이곳 시위에서는 컬러 연막탄이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어릴 적 시위가 있을 때마다 최루탄 냄새를 맡은 기억이 있어 긴장했지만 그에 비해 냄새가 심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예뻤다.

더 가까이로 다가가자, 시위대의 루트를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는 경찰이 보였다. 대열의 한 코너에 머물며 시위 분위기에 적응했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정말 많은 사람, 다양한 직업군이 그룹별로 조직화돼 있었다. 이들은 맨 앞에 마이크로폰을 착용한 리더 한 명과 함께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줄 맞춰서 팻말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아주 비장하거나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위가 폭력적이거나 위험하게 진행되지는 않겠다고 느꼈다. 살짝 마음을 놓은 우리는 그들의 주장하는 바를 앞에서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대열을 따라가기보다는 행진의 기점이었던 리퍼블리크 광장으로 거꾸로 걸어가며 다양한 모습을 훑었다.   

교육인, 철도노동자, 의료인, 노란조끼까지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 주변으로 연막탄의 연기가 자욱하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 주변으로 연막탄의 연기가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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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시위대 주변으로 연막탄의 연기가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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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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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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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편안에 대한 공공분야 노동자의 반대가 심한 만큼, 교사 단체의 행렬이 가장 눈에 띄었다. 프랑스에서는 웬만한 대학 교육까지 공공분야에 포함되기에 초등/중/고등/대학교 소속 교사, 직원 및 임시직 노동자까지 거리에 나왔다.

이밖에 국영철도회사 SNCF와 파리 및 근교 지역 대중교통 운영사인 RATP 직원을 비롯해 우체국/파리시청/파리 꼬썅 병원/INSPE(교사교육을 위한 조직)/BnF(프랑스 국립도서관)/파리 공항 등의 소속 노동자, CGT/FO/SUD 등 프랑스의 주요 노동자 조합 등이 참여했다.

페미니스트 그룹, 핑크블록(LGBTQ 그룹), 아티스트 그룹, ATTAC(환경단체) 뿐만 아니라 이미 2018년~2019년에 걸쳐 우리에게 큰 인상을 남긴 노란조끼 'Gilets jaunes(질레존)'의 지원사격도 더해졌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안전을 염려해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안전을 염려해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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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안전을 염려해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안전을 염려해 문을 닫은 상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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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상점 등은 시위대가 매장 유리를 깨부수는 등 타격을 가하는 행위를 벌일까 봐 점포 문을 닫고 셔터도 내려버렸다. 이날은 프랑스에서 블랙프라이데이와 같은 대규모 세일, 'soldes'가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으니, 매출에 손해를 본 점포가 있기도 할 것이다.

백발의 트레이너, 80세 소방관... 유머러스한 팻말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다양한 포스터와 그림, 팻말 등을 들고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다양한 포스터와 그림, 팻말 등을 들고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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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다양한 포스터와 그림, 팻말 등을 들고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다양한 포스터와 그림, 팻말 등을 들고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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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으로 묶인 다양한 단체들은 아주 질서있게 움직였다. 포스터나 배포용 스티커에는 마크롱과 연금개혁안을 해학적으로 비판하는 그림과 문구가 넘쳐났다.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이나 풍자적인 문구를 담아 손수 만든 팻말을 들고 나온 참여자도 꽤 많았다. "얼마 안 쓴 젊은 대통령 중고로 팝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힌 팻말도 눈에 띄었다.

(늘어나는 정년을 비판하는 듯) 백발의 할머니가 레깅스를 입고 헬스 트레이너 일을 하는 사진, 80세 할아버지 소방관이 출동해 불을 끄는 사진 등 유머러스한 것들도 많았다. 남편은 팻말 속의 수많은 언어유희들을 설명하며 창의적이라고 감탄했으나, 프랑스어 왕초보인 내 수준으로는 크게 공감하기 힘들어 안타까웠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에서 배포중이던 스티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에서 배포중이던 스티커.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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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현장에서 배포되고 있던 스티커들이다. 왼쪽, 가장 위에 있는 스티커부터 차례로 해석하자면 첫 번째 스티커에는 "베르나드, 사회복지세 납부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림의 인물은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회장, 베르나드 아르노다. 프랑스 최고 갑부인 그는 2012년 벨기에 국적을 신청했는데, '세금을 회피하려는 목적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부자에게 사회복지세를 납부하게 만드는 것이 연금 재정 충당의 한 방안이라는 뜻이다.

윗줄 두 번째는 "하나의 연금체계... 엉터리 약"이라는 문구를 담고 있는데, 그림자의 인물은 마크롱 대통령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메시지에도 숨겨진 조롱이 있다. 한국 말로 '엉터리 약'으로 해석되는 'poudre de perlimpinpin'이란 표현은 프랑스에서 노인이나 쓸 만한, 일종의 오래된 은유법이다.

그런데 30대 후반의 마크롱이 TV 토론에서 뜬금없이 이 표현을 쓰면서 온 시청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한 괴짜 네티즌은 "poudre de perlimpinpin" 부분을 리믹스해 음악을 제작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허당'적인 면모가 드러난 발언인데, 이렇게 시위 스티커 문구로 활용했다.

두 번째 줄 오른쪽은 "포인트 연금체계는 팔 한 짝 값이 든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프랑스에서 "팔 한 짝 값이 든다"는 표현은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뜻이다. 그 옆에 밀로의 비너스가 팔을 잃고 피를 흘리는 그림은 무릎을 치게 한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팔이 잘린 밀로의 비너스 상은 여러 설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가 그리스로부터 이를 약탈한 후 매달려 있던 왼팔과 나머지 파편 등을 제대로 복원하지 않고 떼어버렸다는 의심이 이어지고 있다.

맨 마지막 스티커는 "마크롱의 연금체계에 '노'라고 답한다"는 메시지다. 복싱 글로브가 그려진 스티커에는 "포인트 연금체계, 너의 망할 얼굴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여기에도 말 장난이 있다. 프랑스어에서 포인트를 뜻하는 point의 t를 g로 고친 단어 poing은 '주먹'을 뜻한다. "네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리겠다"는 말을 그림이 거들고 있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소시지와 바게트로 간단한 요기가 가능하다.
 2020년 1월9일 파리에서 열린 연금개혁 반대 시위 현장. 소시지와 바게트로 간단한 요기가 가능하다.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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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걸어야 하는 시위대가 잠시 허기를 달랠 만한 길거리 음식이 행진 경로를 따라 드문드문 보였다. 소시지와 바게뜨. 맛없고 딱딱해 보이는 바게뜨를 보자, 여기가 프랑스 시위 현장임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리퍼블리크 광장까지 걸어왔더니 아직도 행진을 시작하지 못한 팀이 남아 있었다. 그 무리로 가서 병원에 근무 중이라는 한 50대 여성을 붙잡고 이번 연금 개편안에서 무엇이 가장 불만인지 여쭤봤다.

"가장 싫은 건 정년이 2년 늘어난다는 거예요. 병원은 갈수록 운영난에 시달리고, 지금도 적은 사람이 많은 양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병원은 감기 같은 아주 가벼운 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1차 의료 주치의의 봉급이 낮다보니 (의료진) 지원자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응급실에도 일할 사람이 정말 부족한데 이런 현실을 개선해야지, 2년 더 일을 하라니요." 

귀국해서 며칠 뉴스를 훑어보니 철도 운행이 90% 정도는 정상화되었고, 정부도 정년 2년 연장 안에 대해서는 한 발짝 양보하려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 이번 시위는 평화적이며, 잘 정돈된 채로 진행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 질레존(노란조끼)의 목숨을 건 투쟁(직접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과는 결이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노동자 단체는 여전히 개혁안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2020년, '만국 노동자의 단결'이란 맑스의 묘비명과는 정말이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덧붙이는 글 | 저의 네이버 블로그에도 수록할 예정입니다.


태그:#프랑스연금개혁안, #프랑스연금개혁반대시위, #프랑스반정부시위, #파리시위현장, #프랑스 SOL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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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만들기와 글 쓰기를 좋아하는 여행 가이드. 포토그래퍼 남편과 함께 온 세계를 다니며 사진 찍고, 음악 만들고, 글 써서 먹고 사는 게 평생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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