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9 14:04최종 업데이트 20.01.0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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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한 원로화가와 오랫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1960년대 언제쯤인지는 분명치도 않고, 화랑이었는지 다방이었는지도 정확치 않지만, 당시 여고생들이 자신들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고 한다. 미술반 학생들이었으니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 소박한 전시였다.

당연히 구경하러 오는 손님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중절모를 쓴 한 중년의 사내가 전시회장을 들어섰다. 학생들이 반가워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신들의 작품 자랑을 하였다. "아저씨! 우리가 그린 것인데 그림 좋지요?"라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 중년 사내는 "그래, 그림 참 좋구나!" 하며 지긋이 웃으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전시를 다 보고 나서자 여학생들은 그 중년 사내에게 "아저씨! 방명록에 서명 좀 해주세요!"라고 하자, 그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방명록에 단정히 이름을 쓰고 조용히 나갔다고 한다.

그때 방명록에 쓰인 이름이 '박수근(朴壽根)'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수근은 이미 유명한 화가였다. 그런데도 어린 여학생들의 순수한 그림을 정성껏 관람하는 태도를 보여, 이를 목격한 후배 화가가 매우 감동했다는 이야기였다.

순수한 영혼의 화가 박수근
 

박수근 가족의 1959년 창신동 시절. <박수근>(갤러리현대, 2002)을 재촬영한 것이다. ⓒ 갤러리현대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따뜻하고 소박한 마음은 타고난 품성이기도 하지만, 집안에서 이어받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태 신앙인 그는 이웃에 사는 역시 기독교인이었던 김복순을 만나 결혼하였으니, 그의 삶은 기독교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밀레(J. F. Millet, 1814 -1875)를 좋아하였다. '이삭줍기', '만종'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밀레는 독특한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화풍을 확립하여, 주로 농민생활을 진솔하게 그렸다. 밀레에 대한 동경은 훗날 박수근이 서민의 삶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박수근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광산업 실패로 집안이 몰락하고 만다. 어려운 집안 형편은 양구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수근의 상급학교 진학을 막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며 화가가 되려고 힘쓴다.

당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이가 화가가 되기 위해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것 외엔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부단한 노력을 한 끝에 18세 되던 1932년 서양화부에 '봄이 오다'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처음으로 입선한다. 이후 1943년까지 12년 동안 아홉 차례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강원도 금성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을 시작한다. 당시 중학교 미술 교사는 주로 일본인들이 맡아 하였는데, 해방이 되고 일본인 교사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교사들이 필요하였다.

이때 박수근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이미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사로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사 일도 6.25전쟁이 나자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된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소재가 된 '나무와 두 여인'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1956년 작과 1962년 작. <우리의 화가 박수근>(시공아트, 1995)을 재촬영 한 것이다. ⓒ 시공아트


박수근은 전쟁이 일어나자 남쪽 전라도 군산으로 내려와 막노동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삶은 쉽지 않았다. 1953년에 전쟁이 끝났어도 아직 전쟁 후유증으로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박수근은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아야 했다. 다행히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있던 미8군 CID(범죄수사대) 매점(PX) 초상화부에서 일하게 된다. 주한 미군들의 기념품으로 그려주는 초상화 일이었는데 제법 수입이 좋았다.

이 시기에 그는 같은 곳에서 일하던 소설가 박완서(朴婉緖, 1931-2011)를 만난다. 박완서가 초상화를 중개해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이 이야기는 훗날 박완서의 등단 작품인 장편소설 '나목(裸木)'(1970)의 주요 소재가 된다.

소설의 소재가 된 작품은 '나무와 두 여인'이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전하는데 6호 정도 되는 작은 작품이다. 소설 속에는 이 작품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 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소설 속의 묘사와 실제 전하는 작품의 내용이 꼭 맞다. 이파리 하나 없는 커다란 나무 주위로 서성이는 두 여인의 모습은 전쟁 후 어려운 시대를 살아 온 여인네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중심에 자리 잡은 나무는 단순히 잎 진 마른 나무가 아닌 헐벗은 나무처럼 쓸쓸하게 와 닿는 그런 풍경이다.

PX에서 박수근은 초상화 한 점에 3달러에서 6달러 정도를 받고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전쟁 후 상황으론 괜찮은 벌이여서 박수근은 여기서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박수근은 '나무와 두 여인' 이 작품에 대해 애정이 강했는지, 후에 다시 크기를 키워 새로 그린다. 첫 작품이 필선이 강하고 붓 맛이 드러나는 정감어린 작품임에 비해, 후에 다시 그린 것은 화강암의 질감을 드러내며 사생 대상을 구축한 박수근 회화의 전형적인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이 큰 작품은 한국 미술사상 가장 비싼 값으로 팔린 것으로 소문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지막으로 거래될 때 145억 원에 팔린 것으로 전한다. 이는 한국 미술 작품 거래 역사에서 가장 높은 값에 해당하는 것이다.

박수근의 전성기 창신동 시절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3년. <박수근>(갤러리현대, 2002)을 재촬영 한 것이다. ⓒ 갤러리현대

 
1953년 박수근의 창신동 시절이 시작된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열어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확립한다. 화강암 같은 질감의 바탕에 단순화된 선과 구도로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때 대부분 탄생한다.

훗날 이곳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한국 미술사를 빛낼 뛰어난 명작으로 자리 잡는다. 한편으론 해방 후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중견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구축해 나간다.

국전에서 거듭해서 입, 특선을 하며, 결국 1962년에는 심사위원의 위치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을 통해 결국 국전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끼고 좌절하고 만다.

제6회 국전에서는 야심차게 제작한 100호짜리 '세 여인'이 낙선하며 화단의 부조리한 모습을 목격한다. 또한 제11회 국전에서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소'와 '유동'을 내었으나, 심사 과정에서 심한 화단 파벌의 갈등을 보며 화단 현실에 실망한다.

이 당시 실의에 찬 박수근을 지탱해준 곳은 소공동 반도호텔에 있던 화가 이대원(李大源)이 운영하던 '반도화랑'이었다. 이곳은 주로 외국인들에게 기념품처럼 그림을 파는 곳이었는데, 박수근의 그림이 한국적인 모습을 그려서인지 외국인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때 대표적인 고객이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인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er)'였다. 그는 박수근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하였고, 다른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박수근의 낡고 허름한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마가렛 밀러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우편으로 그림을 사주고 미술 재료도 보내 주는 등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이때 그린 그림 중에 박수근의 미술 세계를 대표하는 명작들이 많다. 그 중에서 박수근 미술세계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앉아 있는 여인(座婦)'이다. 이 작품은 1963년 창신동 시절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그린 것으로 화면 한 가운데 중년의 여인이 깊은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떤 다른 장치도 없이 여인 한 명만을 그리고 있음에도, 화면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이 보는 이를 전율케 하는 면이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지난 날 격변기를 지탱해 온 한국 여인의 표상이자 한국 어머니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의 모습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더 강한 사색이 깃들어 있고, 여리면서도 강한 어깨에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 온 한국 여인들이 감내해온 시간의 무게를 담고 있다.

한국 여인을 소재로 한 한국 미술 작품 중에 이보다 더 단호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박수근 미술의 한 측면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전농동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다

박수근은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다. 그는 이때 왼쪽 눈을 잃는 불행을 마주한다. 일상화된 과음으로 인해 간과 신장이 나빠졌고, 이로 인해 백내장이 온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미루다 악화되어 결국 실명까지 이른다. 그는 이후 제대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진다.

겨우 1964년에 제14회 국전의 추천작가로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작품을 내고, 이후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다. 이듬해 4월 건강이 악화되어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해 간경화와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으나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한 달 만에 퇴원을 하였으나, 바로 다음 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죽기 전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은 남겼다고 한다. 평생 가난한 화가였던 그에게 이 세상은 그저 험난한 고난의 세월로만 느껴졌던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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