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군산 예수병원(아래 구암병원) 역사는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드루(Drew)가 호남 최초로 군산 수덕산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하는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원 문을 내리는 1940년 당시 의사는 월슨(Wilson)이었고, 간호사는 우즈(Woods)였다. 구암병원은 약 45년(1896~1940년)에 걸쳐 7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집계된다.
 
홍복근 원장이 군산시 명산동에 개원한 구암병원(1950년대 후반)
 홍복근 원장이 군산시 명산동에 개원한 구암병원(1950년대 후반)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구암병원 광고(1948년 5월 5일자 군산신문)와 홍복근 원장
 구암병원 광고(1948년 5월 5일자 군산신문)와 홍복근 원장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군산 선교스테이션이 폐쇄되고,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당하자 한국인 의사였던 권문식(權文植)은 1942년 군산시 중동 물문다리 옆(서래산 아래)에 '삼성병원'을 개원한다. 홍복근(洪福根)은 명산동 유곽 근처에 '구암의원(구암병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개원하는데, <군산시의사회지 제3호>(2005~2007)에는 약간 다르게 정리돼 있다.
 
"1941년 마지막 한국인 의사 홍복근은 예수병원(구암병원, 일명 '궁멀병원')이 폐쇄되자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양철지붕 가옥에 구암병원을 개업했으며 얼마 후 명산동 유곽시장터(명산파출소 앞)에 새로 병원을 지어 이사해 1982년까지 운영했다."

<군산시의사회지>는 구암병원에 근무하다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에 병원을 개원한 한국인 의사를 '권문식'이 아닌 '홍복근'으로 기록하고 있다. 얼마 후 명산동으로 이사했다고 적고 있는데 1948년 5월 5일자 <군산신문>에 실린 광고에는 구암병원 주소가 명산동으로 표기돼 있다. 이로써 '홍 원장은 처음부터 명산동에 구암의원을 오픈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됐다.

선교사에게 의료기기 물려받아 병원 개원
 
구암병원 직원들과 기념사진(맨 우측이 권문식 원장, 우측에서 두 번째가 홍복근 원장. 1949년 2월 26일 촬영)
 구암병원 직원들과 기념사진(맨 우측이 권문식 원장, 우측에서 두 번째가 홍복근 원장. 1949년 2월 26일 촬영)
ⓒ 권혁주

관련사진보기

 
기자는 군산의 서양 의료사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적이 있다(관련 기사: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취재와 더불어 학교, 교회 기념관, 책자, 논문 등을 뒤져봤으나 '권문식'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별명이 '권뚱땡이'인 것까지 알고 있던 기자는 입증에 필요한 자료 조사에 나섰고, 권문식 원장 손자(권혁주씨)를 만날 수 있었다.

권혁주씨에 따르면 권문식(1913~1958) 원장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구암병원에 근무하던 1930년대 후반 선교사(의사 '윌슨'으로 추정) 소개로 산파(조산사) 강길순을 만나 혼례를 올린다. 1939년 첫아들(병순)을 낳자 선교사가 아이 세례명을 '요셉'이라 지어준다. 둘째(병무) 때는 출산 전 '요한'이라 지어주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인데요. 할아버지는 개업할 때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의료기기를 많이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그런걸 보면 선교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훗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갔는데 한국전쟁 때문인지 한 번도 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교류가 계속 이뤄졌더라면 할아버지 기록도 알차게 남아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할아버지는 외과, 내과, 신경과, 치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안과 등 환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진료했고요. 직원은 남자간호사 3명, 약제사 1명, 원무과 직원 1명이 근무했다고 합니다. 병원은 1층 함석집에 입원실 4개, 약제실, 수술실, 원무실, 원장실, 숙직실 등을 갖추고 있었고요. 할머니(강길순)가 산파여서 다른 병원보다 환자가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삼성병원은 광복 후 '성심병원'으로 간판을 바꿨다가 한국전쟁 때(1950~1953년) 다시 '서래병원'으로 개칭한다.

군산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 병원 개업한 이유
 
중동과 경암동 경계인 경포천. 배경은 서래산(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찍음)
 중동과 경암동 경계인 경포천. 배경은 서래산(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찍음)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권문식 원장이 병원을 개업한 '서래산 아래'는 지금의 중동 로터리 지역으로 예전에는 서래포구(경포)라 했다. 오두막이 빽빽한 어촌으로 고깃배와 장삿배가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며 물문다리 부근에 군산수협 관할 어판장도 있었다. 조선 시대부터 충남, 서천, 부여, 전북 김제, 부안, 익산 등지 장꾼들이 모여드는 이곳 오일장을 '서래장터(설애장터)'라 불렀다.

왜 하필이면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서래(중동), 그것도 다리(경포교) 옆에 병원을 개업했을까.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질척한 지역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서래(스래)는 3·1만세운동이 호남 최초로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임이 발견된다. 영명학교 학생들과 구암병원 직원들이 주도한 3·1만세운동이 '3·5만세운동(서래장터만세운동)'으로 전해지는 것도 그에 연유한다.

경포교가 선교사들 희사금으로 가설한 다리인 것도 지나칠 수 없다. 1902년 두 번째 구암병원 원장을 지낸 알렉산더 선교사가 썰물 시간이 돼야 군산을 오갈 수 있었던 구암동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보내준 600불로 공사를 시작한 것. 이처럼 한국인들의 독립정신과 선교사들의 개척정신이 스며있는 지역이어서 권 원장이 정착하지 않았나 싶다.

중동 지역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으나 1920년대 둑을 쌓는 매축공사로 마을이 조성되고, 1932년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나까마치(중정)라는 일본식 지명이 붙는다. 서래(스래), 강가시, 뻘바탕, 깨꼬랑, 짱둑 등의 옛 지명에서도 고단했던 지역 역사가 느껴진다. 남쪽은 서래산, 북쪽은 금강, 동쪽으로 경포천이 흐르는 포구였으며 토막집과 불량주택이 가장 많은 빈촌이었다.

어려운 이웃과 야당 정치인 정치자금도 후원

권문식 원장은 의술이 뛰어난 외과 의사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인근에 많은 전답을 보유한 지주였으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권 원장은 군산은 물론 전주, 김제 등지에서 요청을 받고 외지병원 집도도 했다.

구암초등학교(알렉산더 선교사 기념 '안락소학교' 후신) 사친회장을 맡은 그는 생활이 어려운 교사와 학부모들을 도우면서 '권뚱땡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살이 찐 걸 놀리는 말은 아니었다. 얼굴이 둥그러운 데다 마음도 푸근하다고 해서 지어진 호칭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권혁주 씨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권혁주 씨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수술의가 절대 부족했던 시절 서래 지역(중동, 금암동, 경암동, 구암동) 환자들은 할아버지가 진료하였고, 전주예수병원 등 외지에서 연락 오면 달려가 수술을 집도하는 등 의술을 널리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서래는 포구라서 수술 환자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할아버지는 늙고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진료비 없는 왕진을 자주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자선과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환자들에게 논밭을 조건 없이 물려주셨고, 자신이 다니는 중동교회 용지를 매입해줬으며 건축비도 지원했다고 합니다. 오토바이 채금석(영명학교 출신) 선생이 이끄는 구암축구단을 적극 도왔으며,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익희 선생, 김판술 전 국회의원, 박원삼 등 야당 정치인 정치자금도 후원했다고 합니다."
 

권혁주씨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의료기기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몇 차례 이사하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사진도 이 사람 저 사람이 내 사진이라며 가져가는 바람에 남은 게 없다, 할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신 데다 할머니마저 먼 곳으로 재가하시고 또 일찍 돌아가셔서 흔적 찾기가 더욱더 어려운 것 같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권문식 원장 장례식 모습, 오른쪽으로 보이는 지붕이 서래병원
 권문식 원장 장례식 모습, 오른쪽으로 보이는 지붕이 서래병원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무의촌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어촌에서 '권뚱땡이'로 통하며 인술을 펼쳤던 권문식 원장. 그는 1958년 초여름 뇌출혈로 쓰러져 구암병원에 입원, 친구 의사의 정성 어린 진료에도 그해 추석날 생을 마감한다.

그해 나이 마흔다섯. 그의 장례식은 충남, 전북 각지에서 찾아오는 조문객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은 '한국의 슈바이처가 떠나갔다'라며 애도했다고 한다.

태그:#구암병원, #권문식 원장, #서래병원, #중동 경포교, #물문다리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