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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부터 다시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9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로 일합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기자말]
부산에서 나고 자라 서울 마포에 사는 직장인 권나윤씨. 군산에 사는 내가 그녀와 만나려면 드라마틱한 장치가 필요했다. 언젠가 기차에 나란히 앉아서 머리를 기대고 졸았다거나,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는 한여름 밤에 하나 남은 편의점 맥주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는 설정 같은 것. 안타깝게도 우리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다.

운명이 싹 튼 건 2017년 6월. 내가 쓴 책 <소년의 레시피>는 나윤씨가 즐겨찾기 해놓은 인터넷서점에서 '오늘의 책'으로 선정됐다. 맨 처음에 나윤씨는 책 표지가 예뻐서 끌렸다고 한다. 야자 대신 식구들의 저녁밥을 짓는 고등학생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꼈다. 바로 주문해서 읽고 블로그에 서평을 쓴 게 6월 21일이었다.

"읽다보면 웃음이 나고, 페이지 넘어가면 아쉽고,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나는, 그러한 독창적 감정을 제공하는 책이기에 나이 불문, 성별 불문, 직업 불문 읽어볼 것을 권함. 읽다보면... 슬그머니... EBS 영상을 찾아 실제 소년을 보며 흐뭇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임. 다정한, 따뜻한, 슬기로운 책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내가 쓴 책을 읽어주는 사람. 아름다움을 목격한 이상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나윤씨 글에 고맙다는 댓글을 달았고, 우리는 '랜선 친구'가 되었다. 가끔은 따로 안부를 물었고, 특별한 날에는 몇 십 분씩 메신저를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했다.
  
권나윤씨가 바라본 군산 임피역
 권나윤씨가 바라본 군산 임피역
ⓒ 권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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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씨는 소설책을 많이 읽고, 개봉하는 영화마다 찾아보고, 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 군산시민들이 수해 입은 한길문고를 도왔다는 이야기에 감동받았다. 2018년 1월에 친구 현영씨와 둘이 한길문고로 찾아왔다. 그날 서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 내게 서울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케이크를 선물했다. 2019년 8월에는 친구 세 명과 함께 한길문고에 와서 정유정 작가 강연을 들었다. 책을 사고 하룻밤 묵어갔다.

"나윤님, 어디 가다가 군산 지나치게 되면 들러요."
"벚꽃 피면 군산에서 한 달 살기 할 거예요."


나윤씨는 10년 넘게 다닌 회사에 사표를 내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프리랜서 강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왔다. 그토록 원하던 나윤씨의 퇴직은 지난 9월 30일에 이루어졌다. 가끔씩 불면증으로 뒤척이다가 맞는 이른 아침, 몽롱한 몸과 정신을 어르고 달래서 회사에 갈 필요가 없게 됐다.

그런데 작은 도시에서 한 달 살 거라는 나윤씨의 다짐은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눅눅한 바람이 선선해지고, 설악산에 물든 단풍이 시속 830m로 남하하고, 갑작스럽게 내린 첫눈을 보면서 기분을 내고, 겨울이 너무 길다고 투덜대다가 땅바닥에 핀 개불알꽃을 보고, 진짜 봄이 왔다고 안심했다가 감기에 걸리고 나서야 보는 게 벚꽃인데.

우리 사이에 운명은 한 번 더 작동했다. '2019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의 거점서점인 한길문고와 작은서점인 예스트서점과 우리문고에서는 나윤씨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들로만 강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11월을 군산에서 보낸다면, 종합선물세트처럼 김탁환 작가님, 심윤경 작가님, 이정명 작가님을 만날 수 있는 거다.
  
권나윤씨가 바라본 군산 마산방죽(옥구저수지)
 권나윤씨가 바라본 군산 마산방죽(옥구저수지)
ⓒ 권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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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보다는 흠모하는 작가! 나윤씨는 군산에서 살 집을 인터넷으로 알아보다가 나한테 물었다. "여기 어때요?" 별로였다. 군산의 '핫플'인 한길문고나 은파호수공원과는 멀었다. 나는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서 완벽하게 맘에 드는 집을 구했다. 입주 날짜가 11월 4일이라는 것만 걸렸다. 나윤씨는 일단 11월 1일에 한길문고에 왔다가 서울 올라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다시 군산에 오기로 했다. 왜?

"93년도부터, 그러니까 26년 전부터 열렬히, 한동안은 습관처럼, 최근에는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김탁환 작가님을 만나는 일에 이 정도 수고와 시간은 당연히 갖다 바쳐야지요."
 

그날의 날씨는 완벽했다. 볕은 따스하고 공기는 산뜻했다. 나는 나윤씨 마중을 나갔다. 김탁환 작가님 강연회에 참석한다고 휴가를 내고 온 서울시민 훈님도 만났다. 셋이서 늦은 점심을 먹고 횟집에서 일어선 시간은 오후 4시 30분. 곧바로 나는 채식하는 김탁환 작가님을 만나서 이른 저녁으로 시래기 비빔밥을 먹었다. 존경하는 분 앞에서 떨지 않는 내 담력과 밥 먹은 지 1시간 만에 완식하는 내 식욕에 놀랐다.

서점에서는 나윤씨의 팬심 때문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김탁환 작가님의 23년 전 데뷔작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를 챙겨 온 거다. 사인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 나윤씨에게서는 자부심이 뿜어져 나왔다. 그게 너무 부러웠다. 김탁환 작가님은 군산에서 한 달 살면서 글을 쓸 거라는 나윤씨에게 "열심히 쓰세요"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심윤경 작가님 우리문고 강연회. 낯을 가린다는 권나윤씨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심윤경 작가님이랑 밥도 잘 먹고 이야기도 잘했다.^^
 심윤경 작가님 우리문고 강연회. 낯을 가린다는 권나윤씨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심윤경 작가님이랑 밥도 잘 먹고 이야기도 잘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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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씨는 몇 년 전에 심윤경 작가님의 <사랑이 달리다>를 재밌게 읽고 친구들한테 선물도 많이 했다. 막상 심윤경 작가님이 군산에 오는 날에는 낯을 가린다면서 수줍어했다. 그래놓고는 작가님이랑 같이 밥도 잘 먹고, 이야기도 잘했다. 이정명 작가님 강연회를 앞두고는 예의를 다하기 위해서 신작 <밤의 양들 1,2>를 읽었다. 강연회 끝나면 야밤, 우리는 바로 헤어지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고 놀면서 책 이야기를 했다.

"서울에서는 좋아하는 얘기를 하려면 돈을 써야 해요. 회사 다니면서 수다를 떨었지만, 책 읽고 얘기하는 건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내고 트레바리나 문토, 교보 북클럽에 가입을 하는 거겠죠. '나는 회사만 다니는 건 아니야. 나를 위해서 먹이를 주고 있어'라는 느낌을 가지려고 애를 쓰죠. 군산에서는 책 살 돈만 들이면 되는 거예요.

서울에 있었으면 불금에 친구들하고 술 먹고 지냈어요. 그 시간들도 재미있었어요. 근데 한길문고는 금요일 밤에 강연회를 하잖아요. 전혀 다른 세계 같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친구들과 책을 권하고 읽던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요.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작가 강연을 듣고 있잖아요. 골이 띵하도록 좋았어요."


나도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얼마 전에 K작가님의 강연을 들으러 군산대에 간 적 있다. 20대부터 좋아했던 K작가님은 여전히 빛나는 현역. 빔 프로젝터를 쓰지 않고, 1시간 반 동안 주제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웃다가도 울기 직전처럼 코끝이 아렸다. 누군가를 붙잡고 막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군산시민들은 멀리서 손님이 찾아왔을 때 주로 근대문화가 있는 구시가에 간다. 군산에서 생활인처럼 살았던 나윤씨도 친구들이 찾아오면 구시가에 갔다.
▲ 신흥동 일본식 가옥 군산시민들은 멀리서 손님이 찾아왔을 때 주로 근대문화가 있는 구시가에 간다. 군산에서 생활인처럼 살았던 나윤씨도 친구들이 찾아오면 구시가에 갔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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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나윤씨는 여행자보다는 생활인에 가깝게 살았다. 군산 사람들처럼, 나윤씨도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주로 근대문화가 있는 구시가로 갔다. 군산사랑상품권을 쓰면 10% 할인 된다고, 내 스마트폰에 지역상품권 앱을 내려받아줬다. 나운동이나 수송동, 지곡동 같은 동네 이름을 구체적으로 알아듣고 말할 수 있는 여행자였다.

"군산에 한 달 살러 온 배지영 작가님 친구, 궁금했어요."

저마다 나윤씨를 환대했다. 나윤씨가 작가 강연을 듣기 위해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매대에서 책을 보고 있어도 따뜻한 시선으로 봤다. 밥은 먹고 다니느냐고, 방은 따뜻하냐고 물었다. 참지 않고 김치를 담가다 주고 차 마시러 오라고 초대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나윤씨도 뭔가를 보답하고 싶어 했다. 한길문고에서 '깔끔하고 세련된 PPT 만드는 법'강의를 해주었다.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따로 참고자료를 보내줬다.
  
나윤씨는 군산 한길문고와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군산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PPT 강연을 해주었다.
 나윤씨는 군산 한길문고와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군산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PPT 강연을 해주었다.
ⓒ 권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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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청춘이 갔다"는 어르신들의 말이 진짜라는 걸 안다. 나윤씨의 군산에서 한 달 살기도 그렇게 훅 지나갔다. 그녀가 서울 집으로 가기 전날, 우리는 또 한길문고에서 마주보고 앉았다. 원하는 걸 손에 쥐고서 팔짝팔짝 뛰는 아이 같던 나윤씨는 좀 침울해 보였다.

"뭐든지 갖춰진 집으로 돌아간다니까 좋죠. 또 회사를 안 다니니까 강연 듣고 싶을 때 올 수 있고요. 여기는 나에게 안정된 공간이잖아요."
 

울 뻔 했지만, 나는 눈물을 삼킬 줄 아는 성숙한 시민. 재빨리 <나를 부르는 숲>을 떠올렸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나섰지만 트레킹을 포기하고 어느 하숙집에 들게 된 빌 브라이슨과 친구 카츠. 전적으로 옳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말을 나윤씨에게 해줬다. "산은 그대로 있을 거야." 물론, 한길문고도 그대로 있을 거라고.

11월 1일에 군산에 왔던 나윤씨는 12월 2일에 군산 고속버스터미널에 있었다. 내 자동차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내 책을 읽어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서점과 내가 사는 도시를 사랑해주는 사람. 그러나 아름다운 나윤씨도 울 때는 조금 못생겨 보였다.
 
나윤씨가 안정감을 느꼈던 한길문고에서 PPT 강의를 하고 있다.
 나윤씨가 안정감을 느꼈던 한길문고에서 PPT 강의를 하고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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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군산에서 한 달 살기, #권나윤, #군산 한길문고, #소년의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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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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