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결혼이야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헤어진다.'

애절한 사랑을 다루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 문학작품들은 이 모순적인 명제에서 출발한다.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남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며 빠져들곤 한다. 나는 이런 식의 사랑이야기가 너무나 싫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을 견뎌낼 용기면, 힘을 내어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만난 한 영화를 통해 이런 편견어린 신념을 내려놓았다. 지난 11월 말 개봉한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 주연의 영화 <결혼이야기>. 8살 아이를 키우는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이혼을 하면서도 서로 배려하며 아끼는 정말 예쁜 커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 헤어진다. 어느 쪽도 명백한 귀책사유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 커플이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너무나 납득이 갔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그 규칙들, 그러니까 가부장적 사회의 전제들을 충실히 지킨 결과였다. 
 
 영화 <결혼이야기>의 포스터

영화 <결혼이야기>의 포스터 ⓒ 판씨네마(주)

 
남편이 커질수록 작아지는 아내

니콜은 남편 찰리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이미 약혼한 상태였지만, 찰리에게 푹 빠져든 니콜은 찰리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찰리와 결혼 후 니콜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던 LA를 떠나 남편 찰리의 터전인 뉴욕으로 온다. 뉴욕에서 니콜은 찰리의 연극극단에서 연기한다. 니콜의 연기력은 극단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찰리의 극단은 승승장구한다. 찰리는 극단 안팎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간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잘 나가는 멋진 남편을 둔 니콜. 니콜은 이런 멋진 남편이 자신을 특별하게 대해준다는데 '우쭐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 변호사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시작부터 문제가 있었죠. 난 계속 찰리와 그의 인생에 맞춰 살았어요. 그만큼 좋았고 살아있는 기분이었어요. … 극단이 호평 받으면서 나는 점점 잊혀갔어요… 찰리가 주목받았고 나는 작아졌어요. … 내가 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줬어요."

오래도록 세상은 여성을 남성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하고 남성의 커리어를 여성의 커리어보다 우선시 해왔다. 니콜의 이 대사는 독립적이고 당당해 보이는 자신 역시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한 이 오래된 전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잘 보여주는 말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는 이런 사고방식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따르게 만든다. 니콜 역시 그랬다. 그리고 실제 많은 남성들이 그렇듯 남편인 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 시스템 속에서 빨려 들어간 니콜은 불합리를 경험해보고서야 마침내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편의 성공 앞에 점차 작아지는 자기 자신을 느낀다. 니콜은 자신을 되찾기 위해 LA에서 들어온 드라마 출연 제의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찰리는 니콜의 행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 이는 상실감과 상대적 박탈감, 찰리와 평등하지 않다는 분노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는 '사랑함에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매우 타당한 이유다.

알아주길 바라는 아내, 묻지 않는 남편

이들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평등한 부부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이들의 가정은 아내의 돌봄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의 가정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찰리는 아내인 니콜보다 더 깔끔하게 살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데도 매우 적극적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이 부부는 심리적으로는 철저하게 가부장제 사회의 규칙을 따른다.

먼저 니콜은 여성은 자신의 욕구를 잘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적 여성상을 그대로 수용한다. 찰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 찰리가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찰리의 성공 앞에 느끼는 자신의 박탈감, 여배우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은 욕구를 니콜은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남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LA로 이사 가겠다"며 찰리의 반응을 살피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찰리는 이혼 과정에서 니콜이 표현하는 분노에 당황하고, "당신도 행복했잖아. 왜 이제 와서 불평하는 거지?"라며 항변한다.

반면, 찰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니콜을 통제하려 든다. 니콜의 행동들을 지적하고, 특히 배우 니콜의 연기에 대해서는 냉전 중일 때에도 가차 없이 충고의 말들을 늘어놓는다. 니콜은 이런 남편의 지적이 익숙한 듯 행동하지만, 그럴 때마다 '통제당하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찰리는 니콜의 기분을 묻지도 살피지도 않는다. 자신이 행복하니 당연히 니콜도 행복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찰리는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혼소송 중 니콜은 찰리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한다. "내가 왜 LA에 살고 싶은지 이해해?" 하지만 찰리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회피하고 만다. 이는 찰리가 아내인 니콜을 고유한 욕구와 감정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인식하는 '가부장적' 심리규칙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8살 아들을 둔 니콜과 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이들의 심리를 지배하고 있는 오래된 규칙들은 사랑함에도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8살 아들을 둔 니콜과 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이들의 심리를 지배하고 있는 오래된 규칙들은 사랑함에도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 판씨네마(주)

 
이혼 과정도 경쟁하는 사회

가부장적 심리질서가 이 커플이 이혼하게 된 근본적 원인이었다면, 무엇이든 경쟁하고 이겨야만 한다는 사회적 통념은 이혼 과정에 가속페달이 되어줬다. 이혼변호사를 관여시키지 않고 둘만의 협의를 통해 문제들을 해결해보려 했던 두 사람. 하지만 니콜이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주는 이혼변호사 노라(로라 던)를 만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노라는 찰리에게 소송장을 보내고, 결국 찰리 역시 이혼변호사를 섭외한다. 이제 이들의 이혼은 변호사들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경쟁의 장으로 변질된다. 둘의 일상에서는 전혀 흠집이 아니었던 장면들이 이혼법정에서는 상대방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니콜이 집에서 술 한 잔 하고 계단을 내려오다 휘청거렸을 때, 찰리는 따뜻하게 아내를 부축해준다. 찰리의 아내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혼법정에서 이 장면은 음주하는 여성은 자녀 양육에 부적합한 엄마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다. 찰리가 장거리를 오가며 아이를 만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들은 카시트를 제대로 장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거리가 되고 만다.

니콜과 찰리는 이혼을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의 역할에는 서로 충실하기를 원했다. 니콜은 찰리가 LA에 방문했을 때 양육시간을 공평하게 50:50으로 나누기를 바란다. 하지만 노라는 양육시간을 55:45로 조정했다고 통보한다. 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양육권을 50:50으로 따냈다고 자랑하지 못할 거라면서 말이다. 이들의 이혼은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경쟁'의 수단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니콜과 찰리는 사랑하지만, 헤어지고 만다. 이는 평등과 젠더에 관한 감수성을 지니지 못한 채 뿌리깊이 박힌 가부장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뭐든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현대 사회의 가치관은 이들의 헤어짐을 부추겼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타당하고, 매우 공감되는 '사랑하는데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혼 후, 이 커플은 가부장사회의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가족은 남성인 가장을 중심으로 한 집에 살아야 한다는 통념에서도,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의무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니콜과 찰리가 아이와 함께 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남남이 된 이들은 부부였을 때보다 더 행복해보이고, 가족이었을 때보다 더 화목해 보인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에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우리가 따라왔던 결혼제도가 과연 행복을 보장하는가' 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결혼이야기 스칼렛 요한슨 아담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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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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