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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에 나오고 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에 나오고 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이승만 TV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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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독립운동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그는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잘살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지배에 맞선 독립운동가를 비판하는 것이 그의 논리 체계에서는 합당하다.

그런데 그는 독립운동 경력으로 임시정부 임시대통령도 되고 대한민국 정부 대통령도 된 이승만을 존경한다. 존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숭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렇다고 그를 독립운동 역사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그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이승만을 이영훈이 숭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3·1운동이 벌어지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 아니라, 미군정의 지원 하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 건국됐다'(건국절 논란)라고 이영훈은 주장한다. 이렇게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이영훈이 이승만을 존경한다면, 이 역시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하게 되면, 그가 임시대통령이 된 것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이영훈의 건국절 논리에 모순이 생긴다.

그런데도 이영훈은 이승만 띄우기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경영하는 학당 이름도 '이승만 학당'이고, 운영하는 방송 채널도 '이승만 TV'다. 또 이승만을 찬미하는 글도 열심히 쓴다. <반일 종족주의> 에필로그에서도 이승만 사상을 극찬했다.

부자연스러운 '이승만 띄우기'
 
이승만과 김구(1946, 창덕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3.1운동'을 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었다. 김구는 '3.1운동'을 '3.1대혁명'이라고 부른 반면, 이승만은 제헌국회에서 혁명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며 '3.1독립운동'이라고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김구(1946, 창덕궁).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상당하지만,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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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이 소개한 이승만의 1904년 저서 <독립정신>은 외국과의 통상, 서양학문 공부, 외교 중시, 국가주권 중시, 도덕성 제고, 자유주의 함양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 과제들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책이다. 이른바 '기독교 입국론'을 통해 국가 개조를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국 탄핵'을 주장하는 광화문 집회에서 전광훈 목사가 이승만을 칭송할 때마다 기독교 입국론을 거론하는 것은 바로 <독립정신>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아래와 같이 기독교 입국론을 개진했다. 인용문 속의 '이 교'는 기독교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대, 이 교(敎)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중략) 우리는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의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하게 되게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
 
<독립정신>은 한국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돼도, 위기에 처한 당시의 대한제국을 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기독교 교인들의 정치 장악력이 높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재건하자는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영훈은 이승만과 이 책을 민족을 살릴 만한 물건으로 고평가한다. 특히 이승만의 자유주의론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는 '개인 소유물을 국가가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독립정신의 한 대목을 높이 칭송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통하는 이승만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그런 뒤 그는 "<독립정신>에서 저는 서양에서 근대 문명을 개척한 마르틴 루터,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이마누엘 칸트,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을 문득문득 발견하였습니다"라고 술회했다. 이런 위대한 사상가들의 면모를 이승만한테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독립정신>을 읽지 않은 사람들의 지적 능력을 의문시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나 역사학자 가운데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10명 중에 1명도 안 될 겁니다"라며 "이승만의 자유론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지력 밖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승만 박사'니 '이 박사'니 했지만, 사실 이승만은 학자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 우상화 작업을 벌인 일이 벌써 70년이 다 되는데도, 아직까지 '이승만 사상'이라 할 만한 게 정립되지 못했다. 이는 그가 학자나 사상가보다는 정치가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말한 자유론은 애덤 스미스 등에 의해 이미 충분히 정립된 사상이다. 게다가 <독립정신>을 집필할 당시 그는 29세였다. 이 나이에도 위대한 사상을 이룰 수는 있지만, 그가 그럴 만한 인물이었다면 일찌감치 그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이영훈이 이승만의 사상을 높이 띄우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박근혜 석방을 촉구하는 친박 집회에서 이승만·박정희·박근혜 3위에 대한 경례 혹은 묵념이 거행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다.

이승만을 통해 일제 지배 합리화?
 
 1948. 8. 15. 서울,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 식장에서 담소하는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1948. 8. 15. 서울,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 식장에서 담소하는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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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충돌한다.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경력은 이영훈의 건국절 논리와 충돌한다. 그리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이영훈이 평가하는 것만큼 대단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영훈이 이승만을 한껏 띄우고 있으니, 그것이 다분히 '전략적'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8·15 해방으로 몰락할 뻔했던 친일 보수세력은 목숨을 부지했음은 물론이고 그 후로도 권세를 유지했다. 이것은 첫째는 미군정 덕분이고 둘째는 이승만 정권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빌미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탄압하고 친일청산을 저지했다.

1948년 8월 27일 친일청산 반대자들이 국회 방청석에 나타나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라는 삐라를 뿌려 국민적 주목을 끈 데서도 나타나듯, 해방정국 하의 보수파들은 '친일청산=빨갱이'라는 등식을 내세우며 국민들의 친일청산 열망에 제동을 걸었다. 그 선두에 이승만이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나타난 좌우 대결의 본질 중 하나가 친일청산 문제였다는 점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도 잘 인식하고 있다. 사제지간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교수의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에서 안병직이 "친일파 문제는 처음부터 좌·우익 간의 첨예한 대립점의 하나였습니다"라고 말한 데 대해 이영훈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좌파에 맞선 이승만의 행동이 친일청산 저지라는 측면도 띠었음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친일청산 저지는 단순히 친일 보수파들의 입지를 온존시키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배의 유산이 해방 뒤에 그대로 온존되도록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한국을 잘살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그 '식민지 유산', 즉 '일제가 만든 체제'가 이승만에 의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독립운동가 및 임시대통령이라는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이승만을 띄울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일제강점 이전에 대한제국과 안 좋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추구하는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1899년부터 5년간 옥살이를 했다. 종신형을 받았는데도 5년 만에 석방된 것은 일본 공사 하야시의 조력 때문이다. 이 같은 이승만의 행적에 관해 이영훈은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이 보기에 대한제국은 패망이 임박한 '숨 막히고 기운이 끊어져 거의 죽어가는' 환자와 같았다. 감옥 안에서 그는 많은 죽음을 보았다. 혁명 동지가 무딘 칼날을 세 차례나 받고 목이 잘리는 장면도, 잡범들이 팔다리를 꺾이어 기절한 채 목이 졸려 죽는 장면도, 콜레라가 감옥 안에 번져 무려 4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면도 보았다. 그 모든 죽음에서 그는 임박한 대한의 죽음을 절감하였다. 자유와 독립의 생명 기운이 거의 소진하여 살은 지 죽은 지가 몽롱한 인생이요 사회요 국가였다."
-한국제도·경제학회가 2019년 발행한 <제도와 경제> 제13권 제2호.

이승만이 대한제국에 저항하다가 투옥된 뒤 감옥에서 목격한 처참한 광경들을, 이영훈은 대한제국 몰락의 징조로 해석했다. 이영훈이 볼 때, 이승만은 대한제국에 맞서 투쟁한 인물이자 대한제국 몰락의 징조를 목격한 인물이다.

이 같은 이승만의 모습은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한제국 멸망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대한제국으로부터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인들을 구했다는 논리를 펴는 데 이용될 수도 있는 자료다.

이처럼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승만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 이전 그의 행보는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합리화시키고, 일제강점 이후 그의 행보는 식민잔재 및 친일파를 온존시켰다. 이만하면 임시대통령 및 독립운동가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가 그를 한껏 띄울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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