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는 음울했다. 낮다는 말로는 부족한, 콘트라베이스의 둔중한 선율은 마치 거대한 추와 같았다. 무겁게 깔리는 음율는 의도대로, 효과적으로 관객들을 아서의 저 깊은 무의식의 끝, 아픔과 눈물을 대신할 광기어린 웃음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라앉혔을 것이다. 음악은 아서가 조커를 불러내는 슬픈 과정의 아름다운 동반자였다. 미쳐 버린 아서에 대한, 그를 미쳐 버리게 만든 현실에 대한 장중한 애도였다.
 
 영화 <조커> 포스터

영화 <조커>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 그의 직업은 광대다. 어려운 처지임에도 병약한 엄마를 최선을 다해 돌보는 착한 아들이다. 아서의 엄마는 그를 '해피'라 부르며 언제나 웃으라고 주문한다. 늘 익살스런 미소를 '그리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웃음이 터지는 아서의 일상은 웃음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아서의 미소와 웃음은 그의 행복과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는 단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던 사람이다. 삶은 그가 가진 것을 조금씩 덜어갈 뿐이었다.

아서는 시의 복지 재정으로 처방과 상담을 받고 있다. 그는 모종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약으로 발병과 진행을 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투약은 현실에 대한 아서의 반응으로 조절하는 매개체이다. 삶이 가혹해질수록 무력해지는 것, 그것은 약물의 힘이다.
 
 영화 <조커> 한 장면

영화 <조커>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약물의 효과로 아서가 현실에 보이는 반응은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는 것이다. 억압된 아서의 무의식엔 자신을 괴롭히는 타인들에게 통쾌하게 대응하는, 진심으로 웃고 있는 '삐에로'가 자리잡고 있다. 아서는 병적으로 터트리는 가짜 웃음 속에 고통을 분출하려는 또다른 자아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약봉지를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아서의 모습은 의식의 표면으로 출현하려는 무의식을 약으로 힘겹게 억누르는 있음을 보여준다. 분장을 지운 우울한 아서는 '사회적으로' 안전하다.

삐에로처럼 웃고 싶지만, 현실의 아서는 눈물을 흘리는 삐에로이다. 아서가 그린 삐에로의 표정과 현실은 동떨어져 있다. 현실은 웃고 싶은 아서의 욕망과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런 만큼 아서는 무의식을 억압하기가 점점더 힘겨워진다. 현실의 비열한 악당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약을 좀더 늘려야겠어요'라는 아서의 말은 솟아오르는 무의식의 힘을 잠재우려는 사회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시는 재정을 이유로 그나마 부족한 의료 지원을 중단한다. 투약이 중단되며 억압된 아서의 무의식처럼 숨겨졌던 엄마의 비밀이, 그리고 아서의 망상이 실체를 드러낸다. 충격적인 진실은 억압되었던 아서의 무의식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반전을 맞이한 현실을 아서는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아서는 이미 충분히 힘겨운 사람이었다.

아서의 꿈은 코미디언이다. 실상은 자신이 웃고 싶다는 소망의 반영일 테지만,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기원도 함께함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누군가를 웃게 한다면 애칭처럼 아서 역시도 '해피'해질 것이다. 그러나, 아서를 향한 코미디는 그를 향한 조롱이었다. 현실은 아서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분노를 자꾸만 깨워낸다.

결국, 냉장고 속의 음식물을 내동댕이치듯 현실에 맞춰가던 우울한 아서는 버려진다. 냉장고로 들어간 아서는 차가운 자궁 속에서 잉태된 섬뜩한 '조커'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상처를 분노로 표현하며 조커는 비로서 삶이 만족스러워짐을 느낀다. 고통스럽게 웃던 아서는 이제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조커가 된다.

조커, 반사회적 자아

영화 <조커> 속에 그려지는 아서의 모습은 고담시와 겹쳐진다. 문제가 있는 아서처럼 도시는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의 내면 저 편에 드러나지 못한 채 통제된 무의식이 있듯 아름다운 도시들의 이면에는 바라보기 불편한 어두운 곳이 존재한다. 영화 <조커>는 아서가 조커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감춰진 그 이면이 어떻게 위험이 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경고한다.
 
 영화 <조커> 한 장면

영화 <조커>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연일 시끄러운 고담시의 미디어는 도시의 문제를 자극적으로 제시하며 자신이 도시를 구할 수 있다는 토마스 웨인(브레드 컬렌 분)의 발언을 기계적으로 송출한다. 원인을 잘못 파악한 채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하게 어필하는 웨인의 모습은 망상에 빠진 아서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거리의 시위대는 아서 무의식 속의 조커처럼 미처 통제되지 못한 도시의 어두운 무의식의 발현으로 비쳐진다. 기능을 잃은 도시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조커'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는 조커와 꼭 닮아 있었다.

그러나, 고담시에 문제를 가져온 것은 조커가 아니었다. 이미 문제투성이인 도시는 아서가 조커가 되는 데 조력하고 있었다. 어둡고 지저분한 고담시의 골목과 밝고 깔끔한 고담시의 극장은 극명하게 대립된다. 골목의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조커와 편하게 앉아 웃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은 너무나 다른 삶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시는 아서보다 더욱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

약물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조커는 마치 악을 응징하는 '히어로'와 흡사하다. '권선'하지는 않는 조커는 '징악'에 매우 충실하다. 조커의 분노는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을 향하고 있다. 조커의 공격은 자신을 때리고, 모함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한 방어 행위의 일종이었다. 삶이 가혹할수록 가혹해지는 것, 그것이 아서가 숨기고 있던 패, '조커'의 반전이다.

매우 '이성적'으로 조커는 자신이 공격할 자와 하지 아니할 자를 구분한다. 조커는 예리하게 '선악'을 구별하고 있었다. 그러한 면에 있어 조커는 고담시보다 지극히 정상적이다. 취객들의 난폭한 무례함, 구원자를 자처하던 웨인이 보여주던 거짓과 위선, 아서를 조롱하며 웃음을 만드는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 분)의 비열한 모습 등을 조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조커는 죄없는 자를 벌하지 않으며, 무관한 누군가를 상처 주지 않는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돌릴 뿐이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의식이 끝내 해내지 못했던, 발현된 무의식이 복수를 행한다.

고담시가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조커는 사실, 방치된 문제의 '결과'다. 조커로 대변되는 '반사회적 자아'는 기존 사회의 산물이자 '결과물'이다. 그러나, 고담시와 시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웨인은 정작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고담시의 문제는 그 해결이 요원해 보인다. 

보이지 않은 곳을 바라보기

관객들은 아마도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아서의 아픔에, 조커의 웃음 뒤에 가려진 슬픔에 동화되어 안타깝지만 혼돈에 빠진 도시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서의 행위가 어느 면에선 이해되지만, 조커의 행위를 정당하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영화 <조커> 한 장면

영화 <조커>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영화 <조커>가 노리는 지점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조커의 행위를 촉발한 아서의 내면을 내밀하게 제시함으로써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인정이 가능하지만, 그 과정이 야기하는 결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서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조커가 의식화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인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서는 분명 문제가 있는 개인이지만, 그 문제의 근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의 상황은 궁핍 그 자체이며, 그가 가진 상처는 혼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서에게는 사회의 도움이 절실해 보인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도 곧은 성정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아서를 사회는 제대로 돕지 않는다.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회는 드러난 의식처럼 '보이는 것'에 집중할 뿐, 무의식처럼 '보이지 않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담시의 뉴스는 연일 도심의 쓰레기를 조망하지만 파업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웨인은 시위대를 마치 쓰레기로 취급하며, 지하철 사건의 원인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시위대의 폭력 행위만을 비난한다. 그는 구원자를 자처하지만 도시의 기능이 마비된 이유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아서가 받았을 상처와 아픔 보다는 명성을 지키는 것에 급급하다. 결과만을 살피며 사태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않는 사회는 알맞은 대처 방법을 강구할 수가 없다.

아서를 향한 머레이의 조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처를 고려하지 않는 코미디는 웃음에 동참하는 다수에게 무기를 쥐어주며 누군가의 마음을 더욱 깊게 벤다. 상대의 배려하지 않는 언행은 상처와 함께 분노를 야기한다. 이기적인 희화화의 불가피한 화학작용이다.

아서가 당한 외면과 상처는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된다. 조커 가면을 뒤집어쓴 시위대는 억눌려 있던 집단의 분노를 잘 보여준다. 사회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모습에 아서와 같은 저소득층이나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저분한 골목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의 거주지는 범죄의 온상으로 지적받지만, 살피고 도움을 주어야 할 곳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영화는 무의식처럼 감춰져 있는 이러한 사회의 이면을 아서의 아파트, 지하철, 골목 등으로 조망한다. 그곳들은 잘 보이지 않게 방치된 곳이었지만, 분명 바라보아야 할 곳이었다.

사회는 태생부터 악한 사람과 조커처럼 불가피한 화학작용으로 '나쁜 사람'이 된 이들도 함께 포함한다. 용인되기 어려운 반사회적인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질서 유지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의 어찌할 수 없은 속성이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기 전에 그러한 결과를 야기한 과정을 분명히 되짚어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은 것을 부러 살피지 않는다면, 무의식이 존재하는 계단 아래의 세상으로 유쾌하게 나아가는 조커를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영화 <조커> 한 장면

영화 <조커>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듯, 조커가 아름답다 읊조리며 감탄하는 광경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도 아니다. 아무런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는 꿈일 뿐이다. 그러나, 삶의 고통스런 상처를 돌보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무의식 속에 버린다면, 그 상처는 언젠가 의식으로 떠올라 일상을 지속하기 어려운 혼란스런 상태를 만들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질환으로 진단하며 치료한다.

사회가 병드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고 소외된 곳을 돌보지 않으며 피상적으로 보여지는 사회의 안정만을 추구한다면, 원치 않는 혼란이 지속될 것이다. 영화 <조커>는 이미 이 사회를 병든 것으로 진단하며, 안타깝게도 극단적인 연출이라고 부인하기도 쉽지 않다. 어쩌면, 이 아픈 시대는 저돌적으로  '싸우는 자'가 아니라 섬세하게 '치료하는 자'를 영웅으로 요구한다.

이 사회의 구성과 조직에 좀더 많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은 곳을 바라보라는 영화 <조커>의 조언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미 아픈 누군가를 더 상처주어 분노하지 않게 하기를 필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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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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