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5 09:47최종 업데이트 19.10.1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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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통찰과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는 2030 칼럼 '해시태그 #청년'이 매주 화요일 <오마이뉴스> 독자를 찾아갑니다.[편집자말]
 

ⓒ publicdomainpictures.net


"우리는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해온 말 같지 않은 말을 찾아 나섰다. 공인된 언술 행위의 범위에서는 제외된, 침묵이라든가 '아픔으로 말하기'라든가 '수다'라든가 하는 것들" - 조한혜정 <글 읽기 삶 읽기> 

대전에서 여성주의 글쓰기 강연을 마치고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메일에는 수강생들의 강연 후기가 첨부되어 있었다. 열다섯 개가 넘는 후기에는 글쓰기에 대한 각자의 고민과 다짐이 담겨 있었다. 뭉클한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후기를 넘기다가 모든 페이지를 관통하는 고민이 눈에 띄었다.


"사소하다고 여겨져 왔던 나의 감각과 이야깃거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인정해주는 일이 나에겐 너무 부족했다. 무언가 대단한 사건이어야만 쓰고 말할 가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점점 나에 대해 말하고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멀리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도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야 하게 된 것 같다. 그 전에는 너무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물론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이제야 내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사소하고,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글이 될 수 있을까. 가치 있는 글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여성들

사생활과 글의 관계는 무척 복잡하다. 학교에서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선생님은 '나'라는 주어를 지우라고 했다. '내'가 안 보여야 좋은 글이라고 했다. 내 위치와 감정과 경험을 배제한 채 사회를 논평하고, '대두되었다' 같은 언어를 써야 글이 전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적인 글은 혼자 보는 일기로 주로 가족, 연애, 성애, 감정, 몸 등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글이었다. 사형제 폐지 찬반 같은 주제를 논하는 게 아닌, 일상의 경험을 주제 삼아 써보라는 제안을 들은 적은 없었다. 글의 주제가 사생활과 멀리 떨어질수록 좋은 글이라고 주입받은 것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일은 즉 사적인 존재가 되는 걸 의미했고, 그것은 글감으로써의 탈락, 공적인 작가로써의 탈락과 같았다.

과연 글감만의 문제일까. 의문을 갖게 된 건 글에 상관없이 사적인 존재로만 호명되어 온 어느 작가들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김명순은 등단 이후 끊임없이 사적인 존재로 호명된다.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한 과거가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성폭력 피해 경험조차 문란하고 방탕한 여성이라는 낙인의 근거가 되었다.

김동인은 어느 타락하고 어리석은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김연실전>을 발표했다. 그가 겨냥한 사람은 작가 김명순이었다. 김기진은 김명순을 "분 냄새가 나는 시의 일정"이라며 피부로 말하자면 "육욕에 거친 윤택하지 못한, 지방질은 거의 다 말라 없어진 퇴폐하고 황량한 피부"가 겨우 화장분의 마술에 가려진 셈이라고 했다. 일명 '〈개벽〉 필화 사건'에서는 익명으로 김명순을 비롯한 타인의 사생활을 캐내던 세 명이 밝혀졌는데, 그 세 명은 잡지 <개벽>의 주간 차상찬, 기자 신형철, 어린이날을 만들고 동화를 쓰던 작가 소파 방정환이었다. 

"정조는 취미"라고 당당하게 정조 관념을 비판하고 풍자하던 나혜석은 화가이자 소설가, 시인이었지만 그에게 붙은 딱지는 쓰고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행려병자, 신여성, 이혼녀, 방탕한 여자, 객사였다. 책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연구자 강남규는 여성의 글쓰기가 남성 중심의 문학 장과 쟁투해온 근대화 과정을 연구했다. 남성 작가의 작품이 보편성의 중심이었던 문학 장에서 "흔히 여성 문인은 남성 문인에 비해 감성적이고 탄탄한 글쓰기를 해내지 못한다"(71쪽)는 평가가 따랐고, "여류 문사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작품보다도 작가 본인에게 쏠렸다."(81쪽)

아이러니하게도 문단 내 성폭력 증언이 잇따라 나올 때,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이 요구는 기존의 여성 문인에게 향했던 잣대와 다르게 작품과 작가를 철저하게 분리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기묘했고, 무엇보다 남성 문인이 저지른 성범죄를 가벼운 스캔들 정도로 치부하려는 의도였기에 불순했다. 성폭력을 일탈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문화에서 누군가는 피해를 입히고도 뻔뻔하게 작품 활동을 지속한다.

그런 점에서 '작품으로만 평가하라'는 말은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가해자와 작품을 떼어보라고 요구하던 사람에게 묻고 싶다. 교과서에서 자주 보았던 김동인, 김기진, 방정환 같은 작가가 작품과 작가의 사생활을 연결해 누군가를 매장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혹시 당신의 요구는 편향된 쪽으로만 흐르고 있는 건 아니냐고.

글이 삶을 관통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라면, 소수자의 위치에서 나오는 글은 언제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할 테고 영원히 '사적' 딱지를 뗄 수 없을지 모른다. 이런 부당함에 맞서 김명순과 나혜석은 사적인 이야기의 반란을 도모했다. 그들은 글을 통해 복수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자 했다. 김명순은 자기에 대한 오해와 항간의 소문을 직접 바로 잡으려고 했으며, 나혜석의 이혼 고백서 역시 그런 태도에서 나왔다. 자신을 사적인 존재로만 제한하려는 흐름에 맞서 사적인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누가 작가로 승인되고, 무엇이 글감으로 승인되는지. 항상 사적인 존재로 지목당하는 존재도 자기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혜석 ⓒ wiki commons


"나는 나 자신의 인류학자이다"

서른한 살 생일에 함께 글 쓰는 친구 은희에게서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나는 아니 에르노의 팬이 되었다. 생에 대한 집요한 시선과 꾸준한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그는 헨젤과 그레텔이 길가에 남긴 빵조각처럼 자기의 거취를 글로 남긴다. <한 여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되짚어 본 작품이고,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에 관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사진의 용도>는 유방암에 걸린 시기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상을 사진과 글을 통해 표현하고 그와 함께 공저로 출간한 작품이고, <단순한 열정>과 <집착>, <탐닉>은 유부남인 상대와의 뜨거운 사랑과 그와 함께하며 겪은 고통을 에세이와 소설로 그린 작품이다. 결혼 생활은 <얼어붙은 여자>로, 임신중절수술 경험은 <사건>으로, 주위의 역사적 풍경은 <세월>로 기록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역사적 사실이나 문헌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며 말한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인류학자이다."

아니 에르노처럼, 자기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기 위해 쓰는 사람들이 있다. 강동구 몽실몽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Y도 그중 한 명이다. Y는 '글쓰기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수필, 시, 산문을 읽지 않고 있고, 결혼하면서 철학, 심리학, 자기계발서도 읽지 않고 있다. 문득 육아를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그림책 모임과 동화책 모임 관련 책들만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책이 나를 다시 새롭게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은 맞다. 요즘 엄마, 아내 이외의 나 자신에 대해 느껴보려 노력 중이다.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고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첫 글쓰기 모임이 끝나고 등산을 다녀왔다. 검단산을 두 번 갔다 왔는데 두 번째 갈 때도 마치 처음 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올라갔다. 결혼 후 한 번도 못했던 등산을 오랜만에 했다. 많이 힘들었지만 가을의 푸른 산과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을 만끽했다. 밤나무 아래 밤송이가 수북하고 도토리가 지천에 떨어져 있었다."


읽기, 쓰기, 등산까지 모든 게 하나의 도전인 사람.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나를 발견할 시간은 얼마 안 남았다고 느끼는 사람. 담담한 Y의 글이 날카로운 메시지가 되어 돌아온다. 글을 읽고 쓸 온전한 시간을 갖고 싶은 간절함 자체가 오롯이 글감이 될 수 있다고. 그간 무시당해온 어떤 수다, 한숨, 웃음, 울음이 먼지에 쌓여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써야 한다고. 삶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 침묵해야 할 이야기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있기에 사적인 이야기의 반란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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