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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 앞에 있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이다. 관(棺) 앞에서 발을 멈췄다. 수천 년 지났을 법한 몰골 사나운 관. 알고 보니 가일마을 권오설의 철제관(鐵製棺)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권오설은 철제관에 묻히게 되었을까. 지금 그를 만나러 가일로 가고 있다. 풍산들안 아름다운 산골짜기, 가곡리((佳谷里)에 있다. '서럽게' 아름다운 마을이다.
  
가일마을 정경 가일마을은 풍산들 안 아름다운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마을 앞에 너른 달개들, 풍천평야가 펼쳐있다.
▲ 가일마을 정경 가일마을은 풍산들 안 아름다운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마을 앞에 너른 달개들, 풍천평야가 펼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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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동성마을, 가일마을

안동에서 내앞마을과 함께 가일마을은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처가 동네에 눌러 앉아 형성된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가일마을에 맨 먼저 터를 잡은 이는 안동권씨 권항(1403-1461)이다. 권항은 가일에 터 잡고 살던 풍산류씨 류개의 손자, 류서의 사위가 되고 줄곧 처향(妻鄕)에 살면서 전답을 물려받아 가일에 정착하였다. 류개는 하회 입향조 류종혜의 숙부다.

권항의 손자, 화산 권주(1457-1505)는 가일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안동권씨 가일문중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권주는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 사사(賜死)되었고 큰아들 권질(1483-1545)은 귀양 갔다. 1521년 기묘사화로 둘째아들 권장(1490-1521)은 곤장 맞고 사망했고 권질은 다시 귀양길에 올랐다.

권주의 넷째아들 권굉(1494-?)이 가통을 겨우 이어나갈 형편이었다. 사화의 여파로 후손들은 예천 용문으로 이사 갔다가 권징(1636-1698)에 이르러 가일로 돌아왔다. 권주의 7대손이며 권징의 아들 병곡 권구(1672-1749)는 본격적으로 가일시대를 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 시습재(時習齋)를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마을종택, 병곡종택  은둔하며 학업에만 전념하고자한 병곡의 뜻을 담아 수수하게 지었다. 당호는 시습재로 편액이 사랑채에 달려있다.
▲ 마을종택, 병곡종택  은둔하며 학업에만 전념하고자한 병곡의 뜻을 담아 수수하게 지었다. 당호는 시습재로 편액이 사랑채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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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구의 어머니는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의 증손녀고 권구의 처는 재령이씨 갈암 이현일의 손녀다. 한편 권주의 장남 권질은 진성(진보)이씨 퇴계 이황의 장인으로 가일은 퇴계의 처가마을이다. 여러 곡절에 불구하고 두툼한 혼맥으로 명문가 명맥을 이어 나갔다.

권오설, 철제관에 묻힌 사연

선조들은 여러 번에 걸친 사화와 난을 겪으면서 꿋꿋한 절개만은 꺾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권주와 권질, 권구를 찾아 금부도사가 세 번 다녀간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가일마을사람들의 기질과 의지는 근대에 와서 독립운동으로 살아난다.

사회주의운동가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를 비롯하여 권준희, 권준흥, 권영식, 권준표, 권재수, 권오상, 권오운, 권오헌 등은 이 마을사람들이다. 6.10만세운동, 독립군자금모금, 풍산소작인회, 무관학교생도모집 활동을 하였다.

안동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일제에 맞선사람들이 많았다. 가일마을은 그 중의 하나다. 그 중심에 권오설(1897-1930)이 있었다. 권오설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기획,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고문 끝에 사망했다.
  
권오설 경북출신 독립운동가 사진이다. 가운데 수의(囚衣) 입은 분이 권오설이다.
▲ 권오설 경북출신 독립운동가 사진이다. 가운데 수의(囚衣) 입은 분이 권오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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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철제관 내앞마을 앞에 있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 권오설 철제관 내앞마을 앞에 있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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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아버지 권술조는 "고문한 흔적은 검은 점을 이루었으니 이 모두가 독을 쓴 자국이었다. 내 비록 목석이라 할지라도 차마 너의 시신에 손을 대고 싶었겠는가마는 내 손으로 너의 입에 구슬과 쌀을 물려주고 너의 시신을 염하였다.(권술조의 제문 중)"며 피를 토했다.

겨우 아들의 염을 끝내고 입관을 하려하자 봉분을 쓰지 말고 외부 조문객도 받지 말라는 일제의 훼방으로 마을공동묘지에 급하게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검을 철제관에 넣고 납땜까지 하였다. 고문 흔적을 감춰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권술조는 아들 죽음을 두고 제문을 써내려갔다. 4미터에 달하는 장문의 제문(祭文)이었다. 자식을 앞세워 억장이 무너진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절규소리로 들린다.

"아 원통하고 슬프다!...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권오설기적비 2011년 마을 어귀 가일못가에 권오설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권오설기적비 2011년 마을 어귀 가일못가에 권오설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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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부인과 합장(合葬)을 위해 묘를 열자 철제관에 관한 떠도는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주검은 납땜질 당한 지 78년 만에 빛을 보았다. 2005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고 2011년 마을 어귀 가일못가 회화나무 그늘에 그를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졌다.

담 따라 들어선 옛집들

마을담은 인상적이다. 물려받은 옛담에 손을 좀 대었으나 싼 티가 나지 않는다. 아랫단은 돌로, 윗단은 흙과 기와를 켜켜이 쌓아 만든 세련된 줄무늬 담이다. 어떤 담은 판담이고 흙벽돌담으로 담박한 맛도 있다. 직선으로 뻗다가 우아하게 휘어지고 이따금 깜박이는 점멸등처럼 이어졌다 끊어졌다 한다. 호시절과 역경의 시절이 교차하는 마을의 세월을 그려낸다.
  
가일마을 담 우아하게 휘어진 담이 마을 옛집으로 안내한다. 오른쪽 담 너머에 있는 밭이 권오설 집으로 알려져 있다.
▲ 가일마을 담 우아하게 휘어진 담이 마을 옛집으로 안내한다. 오른쪽 담 너머에 있는 밭이 권오설 집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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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갈래 주름담에 홀려 정신없이 들어간 집은 남천고택이다. 권장이 1850년 아들 남천 권수(1832-1901)에게 지어 준 집이다. 6.10만세운동의 주역, 권오운(1904-1927)은 이집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 옆에 권오설의 집이 있었다 하는데 흔적 없이 사라졌다. 굴뚝은 암키와 줄무늬를 낸 몸집 큰 굴뚝으로 굴뚝 치레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남천고택 굴뚝 굴뚝 치레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암키와와 흙을 번갈아 켜켜이 쌓아 멋을 낸 두툼한 굴뚝이다. 주름진 마을담과 잘 어울린다.
▲ 남천고택 굴뚝 굴뚝 치레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암키와와 흙을 번갈아 켜켜이 쌓아 멋을 낸 두툼한 굴뚝이다. 주름진 마을담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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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고택에서 흙돌담길을 돌아서면 권성백고택이 있다. 1800년대 후반에 지은 집으로 추정된다. 대한광복회에 참여한 권영식(1894-1930)이 태어난 집이다. 앞뜰에는 연못이 있고 집 주변에 몇 그루 회화나무가 있어 풍치가 좋다. 사방 어디를 봐도 그림이다. 굴뚝은 잡다한 장식 없이 검은 벽돌로 매끈하게 쌓은 방형굴뚝으로 꽤 권위가 있어 보인다.
  
권성백고택   앞뜰에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는 풍치 좋은 집이다.  서쪽 옆으로 비켜서 야유당을 보는 경치가 제일 좋다.
▲ 권성백고택  앞뜰에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는 풍치 좋은 집이다. 서쪽 옆으로 비켜서 야유당을 보는 경치가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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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백고택 굴뚝 잡다한 장식 없이 검은 벽돌로 담백하게 만든 방형굴뚝으로 집 규모에 맞게 크게 지은 상류층 굴뚝이다.
▲ 권성백고택 굴뚝 잡다한 장식 없이 검은 벽돌로 담백하게 만든 방형굴뚝으로 집 규모에 맞게 크게 지은 상류층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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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가운데 집이 수곡고택이다. 1792년 권조가 할아버지 수곡 권보(1709-1778)의 유덕을 기리려고 세운 집이다. 대한광복회 고문인 권준희가 살았고 손자 권오상(1900-1928)이 태어난 집이다. 권오상은 권오설의 사촌동생으로 6.10만세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복역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권보는 병곡 권구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이인좌의 난으로 서울로 압송되는 것을 보고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은둔하며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권구와 권보의 은둔의 뜻을 수수함으로 이었다. 사랑채는 맞배지붕, 대문채는 우진각지붕으로 집은 드세지 않은 산세에 몸을 낮췄다. 안채 후원의 다소곳한 굴뚝도 이 뜻이겠다.
  
수곡고택 정경 우악스럽지 않은 산세에 맞췄는지 집채는 높지 않다. 사랑채는 맞배지붕, 대문채는 우진각지붕으로 수수하다.
▲ 수곡고택 정경 우악스럽지 않은 산세에 맞췄는지 집채는 높지 않다. 사랑채는 맞배지붕, 대문채는 우진각지붕으로 수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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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곡고택 굴뚝 은둔하고자하는 선조의 뜻을 따르려는 듯 크거나 화려하지 않게 꾸몄다.
▲ 수곡고택 굴뚝 은둔하고자하는 선조의 뜻을 따르려는 듯 크거나 화려하지 않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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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곡고택 아래 마을종택인 병곡종택이 있다. 보통 집성마을의 종택은 마을 깊숙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종택은 마을 앞쪽에 나와 있다. 화산 권주가 살던 집으로 150년 전에 다시 지었다. 집 앞 회화나무 한그루가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오래되지 않은 집, 마을 깊숙이 자리 잡지 않은 가벼움을 만회한다.

1770년 마을사람들은 마을서쪽 깊숙한 곳에 권구의 덕을 기리기 위해 노동서사(魯東書社)와 노동재사를 세웠다. 이 서사는 1919년 권오설이 조직한 원흥학술강습소의 강습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가일에서 권오설을 더듬어볼 수 있는 유일한 집이 아닌가 싶다.
  
노동서사  마을서쪽 깊숙이 자리 잡은 서원으로 1770년 권구의 덕을 기려 마을사람들이 세웠다. 1919년 권오설은 원흥학술강습소의 강습장소로 사용하였다.
▲ 노동서사  마을서쪽 깊숙이 자리 잡은 서원으로 1770년 권구의 덕을 기려 마을사람들이 세웠다. 1919년 권오설은 원흥학술강습소의 강습장소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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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일못 권오설기적비 앞에 서서 마을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들과 산, 동네가 아름답다. 햇살이 따사롭고 아름다워 가일(佳日)이라 했다. 오늘 따라 왜 이리 햇발이 아름다운지. 검은 점으로 얼룩진 자식의 주검을 본 아버지 권술조에게, 고문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집에서 요양하다 요절한 권오상에게는 '서럽게' 아름다운 마을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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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