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젊어서부터 권력의 꿀맛에 젖어온 5ㆍ17쿠데타 주동세력은 민주주의나 인권, 국가안보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입으로는 안보를 들먹이지만 그것은 수사에 불과하고, 내심은 정권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분노한 학생ㆍ시민들이 동명동파출소를 점거하고 일부 경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구속학생ㆍ시민들과 교환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다. 이후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협상이 결렬된 후인 오후 4시 40분쯤 갑자기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포위,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찰과 합세하여 학생들이 쓰러지면 "2~3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를 치고 밟고 하면서, 특히 얼굴을 앞으로 돌리게 하여 그대로 전면을 발로 짓밟았다. 곤봉으로 쳐서 피가 낭자하게 되어 실신하면 멱살을 한손으로 움켜쥔 채 둘이서 들어 올려 차량 위로 쓰레기 치우듯 휙 던져버리더라"는 것.

시위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으며, 주위의 시민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병력에 밀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안쪽으로 몰린 시위대에게도 강압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3시쯤, 공수특전단이 이들을 향해 투입되었다. 이들은 3~4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청년이면 무조건 붙잡아 M-16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구타하고 사정없이 끌고 갔다. (주석 9)

 
당시의 모습
▲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악명 높은 공수부대는 광주에 투입되어 일제가 우리 동학군과 의병에 했던 짓과 비슷한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유동 삼거리 쪽에서 공수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본 공수들의 시위진압방식은 전경들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이 돌을 던지거나 말거나 앞으로 전진했다. 시위군중들이 도망가면 건물 속에까지 따라갔다. 시위군중을 잡으면 일단 참나무 봉이나 군홧발로 정강이를 차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채 군 트럭에 실어 원산폭격을 시키고 있었다."(『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

같은 시각 35대대에도 충장로에서 소규모 시위를 하고 있던 시위대의 '강력저지 및 분산'이라는 진압명령이 내려진다. (주석 10)


뒤에서 차차 쓰겠지만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은 인간의 탈을 쓴 악귀들이었다.

공수부대의 '광견'에 가까운 '충성심(?)'과 과잉충성파들의 상부지시를 무시하는 작전수행으로 광주 전역은 80년 5월 18일부터 생지옥이 된다.

5월 18일 오후 동구 대인동에서 벌어진 학생들과 공수부대들의 충돌에서 잔인한 진압행위를 목격했던 한 노인은 "6ㆍ25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 XX보다 더 지독한 놈들…"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는 기록이 지금껏 전해지는 상황을 보면 잔인성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주석 11)
 
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군인 앞에 무플을 꿇어야 하는가. 저들이 폭도인가 아니면 저 군인은 북한군특수부대인가? 둘다 아니다.
 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군인 앞에 무플을 꿇어야 하는가. 저들이 폭도인가 아니면 저 군인은 북한군특수부대인가? 둘다 아니다.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5월 18일 오후부터 광주의 시위는 시민항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경찰이 뒤로 처지고 공수부대가 전면에 나서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군인들은 시위를 하지 않는 연도의 시민들도 닥치는 대로 때려 눕히고 체포했다.

"그 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구술 : 조훈철) (주석 12)

"계림극장 앞을 지나다보니 거리에 공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들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구술:이장의) (주석 13)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학생 50여 명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공수들은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다 피투성이를 만든 후 중앙초등학교 돌담 밑에 꿇어앉혀 놓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울컥 화가 치민 나는 죄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라고 항의했더니 곤봉으로 냅다 어깨를 후려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구술:이근재) (주석 14)

주석
9> 앞의 책, 94쪽.
10> 『정사 5ㆍ18』, 166쪽.
11> 앞의 책, 158쪽.
12> 『5월광주전집』, 26쪽.
13> 앞과 같음.
14> 앞의 책, 2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5ㆍ18광주혈사 ,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공수부대, #광주민중항쟁, #5.18광주_강경진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