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반은 여성이다. 그러나 이 절반의 여성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천차만별이다. 국가, 인종, 계급, 성 정체성에 따라 삶의 방식이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담긴 여성들의 삶 또한 제각각이었다. 일본, 한국, 브라질, 체코에 사는 영화 속 여성들의 삶은 여성이란 단 하나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었다.
 
'부용회' 모임 속 어머니 추적한 영화 <유키코>  
 
 영화 <유키코> 스틸 컷

영화 <유키코> 스틸 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고적한 강화도 풍경으로 시작한 <유키코>는 일본의 섬 오키나와를 담고,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고독한 풍경들로 서사의 빈 곳을 메우고 있다.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오르한 파묵의 말대로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 슬픔에 있"기 때문일까.

한국에 재한 일본인 처 모임인 '부용회'가 있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부용회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동원으로 일본에 갔던 한국 남성들과 결혼해, 한국으로 온 여성들의 모임이다. 처음에는 그 모임의 존재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 일본인 여성이 한국 남성과 결혼해 살지 말라는 법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비가시화된 존재들은 이렇게 없는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부용회의 여성들은 대체로 불행했다.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온 남편들 중 일부는 변심했고, 시집 식구들과 함께 일본인 아내를 부끄러워했고 학대했다. 감독의 외할머니, '유키코'도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한국 남성의 아이를 낳고 잘 살아보려 했겠지만, 딸을 두고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감독의 엄마는 사는 내내 엄마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가 일본어를 꾸준히 공부했던 까닭은 일본인 엄마와 만날 순간을 고대했기 때문 아닐까.

엄마의 엄마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엄마의 엄마가 인생 말년을 보냈던 오키나와를 더듬어보지만, 그는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유키코'는 그대로 전설이 되고 만다. 그런 여성이 있었다고. 한국 남성을 사랑했고 그와 딸을 낳았고, 그의 조국에 따라가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슬픈 여성이 있었다고. 돌아와 다시는 어떤 남자와도 같이 살지 않았다고.

어떤 연고도 없는 강화도에서 홀로 사는 감독의 엄마는, 남의 집에 세 들어 그들이 두고 간 가구와 집기들을 쓰며 살아간다. 그는 딸에게 말한다. 10년 넘게 프랑스에 가 있는 딸을 기다리는 자신과, 한국에 두고 온 딸을 평생 기다렸을 자신의 엄마의 삶이 어딘지 닮아 있다고.
 
"혁명밖에 답이 없다", <인디아나라의 마지막 전투> 
 
 영화 <인디아나라의 마지막 전투> 스틸 컷

영화 <인디아나라의 마지막 전투> 스틸 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인디아나라는 "혁명밖엔 답이 없다"고 말한다. 성매매여성이었던 트랜스젠더에게 '투사'라는 정체성을 얹는 것은 부조화스러울까?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투쟁 현장에서의 그는 타고난 전사였음을 보여준다. 인디아나라는 마치 아마조네스의 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걸까. 다큐멘터리 영화 <인디아나라의 마지막 전투>는 그의 모습들을 따라간다. 

브라질에선 한 해에만 백 명이 넘는 성소수자가 살해당한다. 성소수자의 권익을 대변해준 의원이 테러를 당해 사망하자, 인디아나라와 그의 동료들은 절망한다. 룰라 집권으로 좌파의 봄이 오는 듯했지만, 다시 미궁에 빠진 브라질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은 위태롭다. 브라질은 침몰하고 있는 걸까?

그저 운 좋게 살아남은 전쟁터 같은 이곳에서, 성소수자들은 점진적 개혁 따위를 믿지 않는다. 오직 판을 뒤엎는 혁명만이 이들의 생존을 담보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집회 현장에서 주저함 없이 자신들의 몸을 내보이며 주장한다. 이들의 생활공동체가 곧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어 더욱 다급하다. LGBTI가 모여 지내는 공동체는, 세상에 성 정체성이 단 두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협이다. 두 개의 성으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제거되어야 할 불순한 존재일 뿐이다.

강제 철거를 통보 받은 이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료 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선택지는 없다. 오직 투쟁과 혁명밖엔. 일전을 불사하려는 인디아나라와 그의 동료들은 비장한 결기로 전투에 임한다. 왜 이들은 이토록 처절한 싸움을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걸까. 이들에게 목숨을 걸라고 요구할 자격이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절망적인 상황의 여성 <말로리의 수난>
 
 영화 <말로리의 수난> 포스터

영화 <말로리의 수난> 포스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말로리의 수난>은 20대 젊은 여성 말로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얼마 후 화면에 등장한, 12년이 지난 뒤 말로리의 모습은 앞서 본 말로리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다. 성기고 윤기 없는 머리카락, 버석한 피부, 두 배로 불어난 몸집은 현재 그녀의 불안정한 삶을 대변한다. 소외된 몸.

10대의 불안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마약에 빠져든 말로리. 그녀에게 현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런 그녀를 건져 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벌새>의 은희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돼 준 영지가 있었다면, 말로리에겐 '바르토스카'가 있었다. 바르토스카는 일면식도 없는 말로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구걸하던 그녀에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힘을 준 사람이다. 출산한 아들을 보고 마약을 끊겠다고 결심한 말로리에게 온기를 가져다준 이 기적은, 말로리가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를 붙들어 매게 했다.

애인과의 결별로 아들과 거리에 나앉게 되자 모자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살 곳을 구하려고 국가에 호소해보지만 냉혹한 세상은 대꾸가 없다. 그가 쉴 곳은 고작 현 애인의 고물차. 이곳이 그의 집이다.

절망적 상황의 말로리를 보고 있자니, 다시 헤로인에 손대지 않을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말로리는 헤로인이 너무나 그립다. 하지만 견딘다. 12년 전의 기적을 되뇌며, 아직은 포기하지 않는다. 격리된 채 살고 있는 아들을 찾아가 엄마가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시키고, 이어지는 실직 속에서도 다시 구직을 하고, 집을 얻기 위해 복지센터를 찾는다.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나라의 시혜를 기다리다가 죽으면 어쩌지.

하지만 말로리는 7전 8기의 화신이다. 마침내 살 집을 구해 아들을 데려오고, 대학에 가 다시 공부하겠다는 꿈을 꾼다. 가난한 그에게 대학은 넘을 수 있는 벽이 될까? 그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준 건 이번에도 나라의 복지가 아니다. 또다시 기적이 일어나 그를 일으켜 세운다. 가난한 미혼모 여성에겐 나라의 도움이 닿지 못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미국이 미혼모 핼리를 외면한 것처럼, 말로리 또한 박대당한다. 임신과 출산의 책임이 오로지 여성에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낄 때, 가장 견디기 어렵다. 누구에게도 존중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인 말로리는 놀랍게도 그 결핍으로 자신을 휘발시키지 않는다. 그는 12년 전 자신이 받은 구원을 타인에게 되돌려 주고 싶어 한다. 번번이 타인에게 착취당하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삶도 나눌 것이 있음을 그는 믿기 때문이다.

말로리보다 많이 가진 나는 타인과 무엇을 나누었는가를 물으며, 부끄럽게 객석을 나선다. 삶이 계속 날리는 펀치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의 기적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말로리를 관객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DMZ 영화제 DMZ 다큐멘터리 유키코 인디아나라의 마지막 전투 말로리의 수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