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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것이 싫어지고, 쓴맛을 즐기게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된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사랑의 단 맛만 좇았던 시절에는 사랑에도 쌉싸래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아니 사실 사랑은 달콤하다기보다는 씁쓸한 것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이십 대를 돌아보면 온통 사랑, 오로지 사랑뿐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십 년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모든 연애가 그렇듯이 나의 연애도 달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의 연애는 매번 셋 중 하나였다. 상대방을 파괴하거나, 나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으로 나자빠져버리는 것.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랫말에 따르면 내가 했던 건 전부 사랑이 아니었다. 삼키기에는 너무나 맵고 써서 고통스러웠지만, 사랑의 달콤함은 그 안에 별사탕처럼 박혀 있었기에 그 달콤함이 아쉬워 차마 뱉지도 못했다.

지금 나는 사랑에 미쳐있던 그 시절을 후회하는가? 아니. 후회는커녕 오히려 살면서 내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중 하나다. 별의별 연애를 다 해본 그 시절을 통과하면서 나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 경험들이 나를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줬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사랑이었다.

그랬던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점점 변해갔다. 연애의 감각은 무뎌지고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 물론 연애 감각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그런 감정에 공감조차 하지 못하게 된 나를 마주하게 된 그날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을 먹고 빨래를 개키면서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너무 설레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는 도무지 쟤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 꿈은 할머니가 되어서 죽는 그날까지도 연애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마지막으로 연애소설을 읽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소설책들만 봤다. 그때 죽어가던 나의 연애 세포에 심폐소생술을 해준 작가는 전경린과 박상영이었다. 다시 읽은 전경린의 소설들은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친한 언니와 십여 년 만에 눈물의 상봉을 한 기분을 안겨 주었고, 박상영의 소설들은 희한하게 좋았다.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창비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창비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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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소설들은 읽을 땐 가벼운 것 같은데 읽고 난 뒤 남은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소설을 낄낄대며 읽다가, 느닷없이 울컥하고 뜨겁게 북받치는 감정들에 한참을 휘청대곤 했다. 어떤 사람은 욕을 한 바가지 쏟을 수도 있겠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에 추천사를 쓴 김하나의 말대로, 이 책을 읽으면서 결코 할 수 없을 한 가지는 "이 이야기들을 읽다 마는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4편의 소설이 실린 연작소설이다. 네 편의 소설 속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느낌도 있어 연작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겠지만, 따로따로 읽어도 그것대로 참 좋은 소설이다. 유머러스하고 슬프고, 따뜻하고 쓸쓸하다. 작가도 말했듯이 네 편의 소설 속 화자인 '영'은 '모두 같은 존재인 동시에 모두 다른 존재'이고, '당신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너무 힘겨워 외면하고 싶었던 당신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박상영의 소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오래 공들여 쓴 일기 같기도 하고, 가볍게 쓴 소설 같기도 하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소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차마 쓰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나의 감정과 기분을 누군가가 적확한 언어로 나 대신 써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은 짜릿하다.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울어버리는 경우는 대개 그런 순간들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모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90쪽)

내가 박상영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2019 올해의 문제 소설>에 실린 '재희', 그리고 <2019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대상으로 선정된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었다. 두 작품 모두 인상 깊게 본 작품들이라, 이번에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그 소설들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보통의 이십 대들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맛깔나게 써 내려가다가도 현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꽂아 넣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 이야기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쓴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애 둘 딸린 아줌마를 펑펑 울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그가 아주 오래오래 글을 써줬으면 좋겠다. 나랑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이왕이면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소설을 써줬으면 좋겠다. 그럼 죽는 그날까지 연애소설을 읽는 할머니가 되겠다는 내 꿈을 이룰 수도 있을 텐데.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은이), 창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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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