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특급' 박찬호는 풀타임 선발 첫 시즌이었던 1997년, 14승 8패 평균자책점 3.38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 해 LA다저스 내에서 박찬호의 공식적인 선발 순번은 '5번'이었다. 라몬 마르티네스, 노모 히데오, 이스마일 발데스, 페드로 아스타시오 같은 쟁쟁한 투수들이 즐비했던 다저스에서 만 24세의 강속구 투수 박찬호는 아직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 중 한 명 불과했기 때문이다.

류현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최고의 투수라는 타이틀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했지만 그 시절 다저스에는 클레이튼 커쇼, 잭 그레인키(휴스턴 애스트로스), 조쉬 베켓, 채드 빌링슬리, 테드 릴리 같은 대단한 투수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물론 류현진은 '실력'으로 선발 자리를 따내 다저스의 3선발로 시즌을 마쳤지만 만약 2013년 스프링캠프 선발경쟁에서 탈락했다면 류현진의 빅리그 커리어는 크게 꼬였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다저스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투수왕국'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그리고 그 명성은 류현진과 커쇼, 워커 뷸러라는 올스타 3인방을 보유한 올 시즌에도 계속 이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다저스의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가을야구를 보름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가을야구에서 4선발을 따로 정하지 않고 불펜 투수들로 한 경기를 책임지게 하는 소위 '오프너 작전'을 쓸 지도 모른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선발 투수, 그 중에서도 좋은 좌완 투수 유난히 많은 다저스 마운드
 
메츠전 투구하는 류현진  류현진(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이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시티필드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와의 방문 경기에 선발 등판, 5회에 상대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다. 류현진은 이날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오래간만에 여유를 되찾았다.

▲ 메츠전 투구하는 류현진 류현진(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이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시티필드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와의 방문 경기에 선발 등판, 5회에 상대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다. 류현진은 이날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오래간만에 여유를 되찾았다. ⓒ AP/연합뉴스

 
'투수왕국'으로 불리는 다저스는 그 중에서도 선발 투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좌완 투수가 많은 팀으로 유명하다. 3번의 사이영상과 8번의 올스타 출전에 빛나는 커쇼를 비롯해 올해 내셔널리그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 나섰던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다저스가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유망주 훌리오 우리아스,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보낸 만 39세 노장 투수 리치 힐은 모두 선발로 활약할 수 있는 좌완 투수들이다.

특히 류현진이 부상 복귀 후 5선발로 활약했던 2017 시즌에는 16승으로 올스타 무대를 밟았던 알렉스 우드(신시내티 레즈)까지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그 해 다저스 선발진은 유일한 우완인 마에다 켄타를 제외한 4명의 좌완 투수가 로테이션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로버츠 감독은 4명의 좌완이 각기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다며 좌완 일색의 로테이션을 고집했다(실제로 그 해 평균자책점이 가장 높았던 좌완 투수는 3.77의 류현진이었다).

하지만 3~4경기를 치르면 다른 상대를 만나는 정규리그가 아닌 한 팀과 최대 7경기를 치러야 하는 가을애구에서 지나치게 좌편향(?)된 선발진으로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다저스 역시 2017년 우완 선발 보강의 필요성을 깨닫고 트레이드 마감 시한에 올스타 우완 다르빗슈 유(시카고 컵스)를 영입한 바 있다(결과적으로는 다르빗슈는 2017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1.2이닝 5실점으로 무너지면서 다저스의 '역적'이 되고 말았다).

다저스는 올 시즌을 앞두고도 넉넉하게 선발진을 준비했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에이스 커쇼를 중심으로 작년 후반기 엄청난 활약으로 퀄리파잉 오퍼 계약을 따낸 류현진, 그리고 작년 8승 5패 ERA 2.62로 싹수를 보인 후 올해 첫 풀타임 시즌을 맞는 뷸러가 선발 트로이카를 구성했다. 여기에 선발 경험이 풍부한 마에다와 힐, 작년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던 로스 스트리플링, 유망주 우리아스 등 다저스의 선발 자원들은 그야말로 차고 넘쳤다.

마에다라는 준수한 4선발을 놔두고 뭐하러 '오프너 작전'을?
 
 14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시티필드에서 열린 2019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뉴욕 메츠와 LA 다저스의 경기에서 LA 다저스 선발 투수 커쇼가 역투하고 있다.

14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시티필드에서 열린 2019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뉴욕 메츠와 LA 다저스의 경기에서 LA 다저스 선발 투수 커쇼가 역투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로버츠 감독은 커쇼와 뷸러, 류현진, 마에다, 힐로 시즌 초반 선발 로테이션을 꾸렸다. 비록 힐이 시즌 초반 일찌감치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다저스에는 스트리플링이라는 든든한 대체자가 있었기에 힐의 이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반기 무서운 속도로 승수를 적립한 류현진의 대활약 덕분에 다저스는 시즌 초반부터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를 질주했다.

스트리플링이 부상을 당하고 8월 들어 류현진이 급격히 흔들렸을 때도 로버츠 감독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다저스는 트레이드 마감 시한 당시 불펜 보강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유망주들을 지켰다. 그리고 당시 다저스에 잔류했던 선발 유망주 더스틴 메이와 토니 곤솔린은 후반기 지친 선배들 대신 선발 기회를 얻었다. 로버츠 감독은 시즌 막판 힐과 스트리플링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가을야구 4선발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힐은 빅리그 복귀전에서 아웃카운트 2개를 잡고 무릎에 다시 통증을 느끼며 자진 강판됐고 스트리플링도 선발보다는 불안한 불펜에서 롱릴리프 역할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그 많던 선발 투수 중에서 포스트 시즌 4선발을 맡을 투수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2009년의 뉴욕 양키스처럼 가을야구를 3인 로테이션으로 운영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4선발이 마땅치 않게 되면서 로버츠 감독은 '오프너' 전략(경기 시작과 함께 등판해 1~2이닝을 책임지는 투수)을 언급했다. 사실 다저스 투수진의 현실에서 '오프너'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작전이다. 오프너 작전은 그 특성상 한 경기에 많은 불펜 투수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불펜이 약한 다저스에서 특정 경기에 많은 불펜을 소모해 버리면 전체 시리즈 운영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다저스에는 올스타 3인방 외에도 올 시즌 10승 8패 ERA 4.18이라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마에다라는 준수한 선발 투수가 있다. 비록 계약 당시 맺은 기묘한(?) 옵션 때문에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서러운(?) 신세가 됐지만 마에다의 경험과 구위는 포스트시즌 4번째 선발을 맡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불펜 투수 물량공세를 통한 승부수는 가을야구에서 마에다가 흔들린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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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LA 다저스 류현진 오프너 마에다 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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