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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여자들의 섹스북>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아니 글이 뭔가. 나는 애초에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저자인 한채윤이 쓴 책을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지만, <여자들의 섹스북>을 구매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는 단칼에 거절했다. 도무지 나에게는 쓸모가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성이며 또한 동성애자다. 그러니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우리 모두 잘 모르는 여자들의 성과 사랑'을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대체 어디에 써먹으라고? 내게 '여자들의 섹스북'이란 제목은 '쉽게 배우는 플로피 디스크 조립 설명서'나 '초보자도 할 수 있다, 남극에서 한 달 살기'처럼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저자인 한채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농담처럼 위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나도 저자도 웃었다. 하지만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진짜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세상에서 그 책이 가장 쓸모가 없는 독자가 리뷰를 쓴다면 말이에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진심이었나 보다.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어느 날 밤 '그런데 여자들의 섹스북 리뷰는 언제 쓰실 건가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덜컥 마감 날짜를 불렀다. 아침에 휴대폰을 보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심호흡을 하고 <여자들의 섹스북>을 펼쳤다.

이 책을 읽기가 꺼려졌던 이유
 
 '여자들의 섹스북'
 "여자들의 섹스북"
ⓒ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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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자들의 섹스북>을 읽기가 꺼려졌던 이유는 그 책이 내게 아무 소용이 없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섹스북'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게이들이 성에 개방적이다 못해 문란하기까지 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런 쪽으로 재능이 없다(물론 섹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문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친한 친구들과 술을 마셨을 때 취기를 빌려 지르던 것이었지 전혀 일상적인 게 아니었다. 심지어 학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섹스'라는 단어를 쓰거나 말하는 것도 힘들어 했다. 가령 한 번은 고속버스에 책을 두고 내린 적이 있었는데, 터미널에 전화는 했지만 끝내 제목을 말하지 못해 책을 되찾지 못했다. 그 도서의 이름은 <섹스화된 몸>이었다.

농담처럼 '내가 말로만 듣던 보수 게이야'라고 말하곤 하지만 이런 성격 때문에 웃을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섹스를 '부끄러운 것, 민망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건강한 성생활을 하는데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나는 섹스를 할 때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어디를 만지고 무엇을 했을 때 좋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걸 말하는 게 어딘가 수치스러웠고, 때로는 내가 문란해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러다보니 섹스의 만족도는 결국 상대방이 얼마나 세심한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왜 나는 섹스를 부끄러워 했을까

그래서 내게 섹스란 즐거운 일임과 동시에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지난번에는 별로였는데 이번에는 괜찮을지, 새로 만나는 사람과는 잘 맞을지 늘 긴장했다. 물론 적당한 긴장은 사람을 흥분상태로 끌고 가지만, 나의 경우는 그게 걱정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 달랐다. 긍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의 섹스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가 '편안함'을 강조할 때였다. 가령 이 책은 우리가 긴장을 풀지 못하면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오르가슴은 결국 신경의 자극과 호르몬 분비의 결과물인데, 섹스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의가 분산된다면 당연히 이 과정이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섹스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상대에게 불만이 있다면 성관계가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섹스가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그 일이 낯설고 막연하지 않으면 된다. <여자들의 섹스북>은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섹스를 다룬다. 섹스를 하는 우리 몸이 어떤 변화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다. 물론 이 정보는 여성의 몸에 관한 것이라 내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다만 섹스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성적인 것이 어느 정도 베일에 싸여 있을 때 더욱 신비로워지고 그래서 우리가 흥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건 정보를 습득하고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 이 재료를 가지고 더욱 다양하고 과감한 실천을 하는 게 가능해진다.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이 반복될 것이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여자들의 섹스북>은 섹스 또한 마찬가지의 일임을 알려준다.

섹스에 대한 관점을 바꾸자

<여자들의 섹스북>을 읽으며 줄곧 떠올랐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섹스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던(하지만 사실상 음담패설에 가까운) 이성애자 남자들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섹스북>이나 그 남자들이나 섹스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하는 점은 같았지만 말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오래 했는지를 과시했고 그래서 상대방이 넘어갈 듯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떻게 만족감을 느꼈으며 그게 왜 가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섹스를 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그들은 오로지 자신이 얼마나 정력이 강한지를 말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여자들의 섹스북>에 따르면 섹스는 소통의 과정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면, 그리고 내가 나의 몸을 알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 섹스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남자들은 섹스나 신체 부위와 관련하여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를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개념이 없는데 원리를 파악하고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그 남성들이 오르가슴은 어떻게 느끼게 되는지 혹은 성감대를 자극할 때 몸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무슨 효과가 발생하는지 알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고민을 상담해주며 '섹스 전문가'를 자처하기도 했다.

<여자들의 섹스북>이 전하는 통찰 중 하나는 진짜 전문가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법이다. 하나의 분야를 제대로 장악한 사람만이 오직 정확한 말을 쓸 수 있다. 나는 신나게 섹스 이야기를 하던 그 남자들이 자기만족을 챙기는 데는 유능했지만 결코 섹스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리라 확신한다. <여자들의 섹스북>이 이야기하듯 섹스는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폭넓고 섬세하며 많은 집중과 훈련이 필요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래 한다고 좋은 섹스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내가 섹스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주었다. 편안함과 솔직함이 좋은 섹스의 조건이며 그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낭만적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섹스는 모를수록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알수록 황홀하다는 점을 <여자들의 섹스북>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한 좋은 섹스를 위해선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진작 이 이야기들을 만났다면 내 인생이 정말 많이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물론 책의 많은 부분은 내게 쓸모가 없는 정보이며(누군가 '게이들의 섹스북'도 써주길 기대해본다) 그렇기에 아마도 <여자들의 섹스북>을 두 번 세 번 꺼내서 읽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섹스에 관한 가이드북이자 입문서 혹은 좋은 성교육 자료를 구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책을 권유할 것이다.

여자들의 섹스북 - 우리 모두 잘 모르는 여자들의 성과 사랑

한채윤 (지은이), 이매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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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