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장르영화의 축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색을 지키면서도 영화제에 어울리는 대중성을 지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웃기는 여자들, 시끄럽고 근사한'이라는 올해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특별전은 앞서 제21회 '무서운 여자들: 괴물 혹은 악녀', 제22회 '시간을 달리는 여자들: SF 영화에서의 여성 재현'에 이은 장르와 여성에 주목하는 세 번째 기획이다. 이번 특별전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한국영화가 잃어버린 색깔에 다시 한 번 주목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영화계는 남자 배우 못지않게 여자 배우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현재도 영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김혜수, 전도연, 김윤진은 물론 심혜진, 심은하, 황신혜, 故 최진실 등의 많은 여자 배우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영화계는 여자 배우가 성장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스틸컷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최근 여자 배우들이 충무로에서 설 자리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장르적 다양성이 소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 몇년새 많은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남자 배우들만 여러 명 나오는 액션, 스릴러물에 한정돼 있었다. 최근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어진 영화 장르 중 하나는 로맨틱 코미디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는 여배우의 매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여자 배우가 남자 배우와 로맨스를 나누는 내용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 속 여성들은 같은 여성이 공감하고 웃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 속 그녀들의 고민이 현실 속 그녀들의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기획 상영작 중 그런 의미를 가장 잘 담은 작품이 마릴린 먼로 주연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마릴린 먼로는 평소 그녀의 이미지인 백치미가 넘치는 금발 미인으로 등장한다. 그녀가 맡은 로렐라이는 멍청하고 돈만 밝히는 여성으로 묘사되지만 그녀의 대사는 거꾸로 금발의 미인을 모두 멍청하고 돈만 좋아하는 쉬운 여자로 생각하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풍자한다. 이는 여성에게 씌워진 편견을 부드럽고 유쾌하게, 그러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서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상영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역시 마찬가지다. 남녀 간에 진정한 친구는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12년 동안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만남을 반복하는 두 남녀를 통해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질문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맥 라이언이 맡은 샐리는 해리와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명제로 설전을 벌이는 등 그녀의 주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런 샐리의 모습은 많은 여성 관객들에게 마치 내 의견을 대신 말해주는 듯한 공감을 준다.
 
로맨스 또는 코미디 장르의 여성영화의 장점은 여성이 일상에서 느끼는 고민이나 문제를 무겁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웃음을 통해 공감을 유도해낸다는 점이다. 때론 어렵고 무거운 주제 역시나 유쾌하지만 진중하게 접근한다. 상영작 중 <시티즌 루스>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되는대로 막 살아온 약물 중독자 루스는 또 임신을 하게 되고 법원은 그녀가 아이를 키울 여력이 되지 않는다 판단, 낙태를 권고한다.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 스틸컷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그런 그녀를 두고 프로-라이프와 프로-초이스가 전쟁을 벌인다. 블랙코미디의 대가 알렉산더 페인은 이 작품을 통해 여성의 몸이 어떻게 '전쟁터'가 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주체적인 인권과 결정권을 가진 한 명의 시민인 루스가 자신의 몸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바탕으로 유쾌한 코미디를 선보인다. 이는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에도 잘 나타난다.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소녀 메건은 부모 때문에 성 정체성 개조 캠프에 가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동성애 전환 치료를 받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또렷이 확인한다는 내용은 사회가 지닌 편견과 억압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주체성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웃기는 여자들, 시끄럽고 근사한' 특별전의 하이라이트는 다큐멘터리 영화 <로맨틱 코미디>다.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160편이 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의 클립으로 이루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들의 장르로 치부되는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편견을 당당하게 깨부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 스틸컷

<로맨틱 코미디> 스틸컷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로맨틱 코미디는 여성 판타지 만족을 위한 가벼운 작품으로 인식되며 그 때문인지 비평의 영역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당당히 밝히고 로맨틱 코미디 속 여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성찰한다. 이를 통해 여성이 가장 공감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수면 위로 올리고 이에 대한 진중한 자세를 보여준다.
 
'웃기는 여자들, 시끄럽고 근사한'은 현재 우리나라 영화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기획이다. 상업영화의 경우 남성 위주의 장르영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성을 주연으로 한 장르영화도 있지만 이는 여성들이 공감을 느끼고 좋아할 만한, 또 여성들의 고민과 성향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주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주로 피해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고민이나 생각, 유머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적다.

이번 특별전 '웃기는 여자들, 시끄럽고 근사한'의 작품들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웃음을 전해주면서 근사한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영화계에서도 이런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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