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의 딜릴리> 포스터

영화 <파리의 딜릴리> 포스터 ⓒ 오드


프랑스 파리에서 어린 소녀들이 납치되고 보석상이 털리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한다. 아프리카의 카나키에서 온 소녀 딜릴리(프루넬 샤를-암브롱 목소리)와 프랑스 소년 오렐(엔조 라티토 목소리)은 사건의 배후에 비밀스러운 조직 '마스터맨'이 숨어있음을 우연히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백작 부인 엠마 칼베(나탈리 드세이 목소리)의 도움을 받아 파리를 누비며 유명인을 만나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

미셸 오슬로 감독이 1998년에 연출한 <키리쿠와 마녀>는 캐릭터, 소재, 주제 등에서 앞선 작품들을 한 단계 뛰어넘으며 프랑스 애니메이션 역사에 획기적인 선을 그었다. 이후 <프린스 앤 프린세스>(1999), <키리쿠, 키리쿠>(2005), <아주르와 아스마르>(2006), <밤의 이야기>(2011)로 이어진 미셀 오슬로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인종과 나라, 그 곳의 문화와 색채를 실루엣 애니메이션 같은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담아내며 찬사를 받았다.

<파리의 딜릴리>는 그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배경으로 삼던 미셀 오슬로 감독이 처음으로 파리를 무대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파리의 딜릴리>를 "파리를 향한 나의 사랑 고백이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도시이자 프랑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여성들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곳이다"라고 설명한다.

벨 에포크 시대를 재현한 애니메이션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 오드


우아한 매너와 풍부한 호기심을 가진 딜릴리와 어디든 갈 수 있는 배달부로 최고의 예술가들과 두터운 인맥을 자랑하는 오렐을 주인공으로 삼은 <파리의 딜릴리>는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좋은 시대'란 뜻의 '벨 에포크'는 보통 보불전쟁이 끝난 시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일컫는 단어다. 그 시기의 파리는 풍요와 평화를 만끽하며 예술과 문화를 번창시켰다. 물랑루즈와 개선문, 에펠탑과 로댕 박물관 등 지금의 관광 명소도 이 무렵에 태어났다.

<파리의 딜릴리>는 관객이 벨 에포크 시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사진을 활용한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위대한 장인이 평생을 바쳐 완성한 것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래서 4년 동안 파리 사진을 찍었다"고 이유를 밝힌다. 그는 도시 자체가 예술과 역사인 파리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아 뼈대를 완성한 후에 현대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2D와 3D를 결합한 그래픽을 더하여 벨 에포크 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영화는 벨 에포크 시대를 구현한 무대에 그 시기를 풍미했던 유명 인사들을 집어넣었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극에 등장하는 100여 명의 인물은 모두 흥미로운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피카소, 모네, 르누아르, 로댕, 까미유 끌로델 등 화가와 조각가를 비롯하여 에드워드 7세, 드뷔시, 프루스트, 퀴리 부인, 에펠, 뤼미에르 형제, 파스퇴르, 사라 베른하르트, 쇼콜라, 콜레트 등 각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100여 명의 인물은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딜릴리와 오렐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여러 형태로 도움을 준다.

인종차별과 성 차별, 시대를 돌아보는 시선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 오드


마스터맨 조직은 왜 소녀들을 납치했을까?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마스터맨 조직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 사실 <파리의 딜릴리>에서 음모를 보여주는 서사는 빈약하다. 해결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사건의 구조가 아니다. 추리물처럼 영화를 보아선 곤란하다. 영화의 의문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나타나는 인종차별, 제국주의의 침략, 빈부의 격차,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 같은 파리와 시대의 어둠에 주목해야 한다.

딜릴리는 시대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는 중심에 서 있다. 그녀는 지배 세력인 프랑스 사람과 식민지인 아프리카 카나키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나키에선 프랑스인 취급을 받는 따돌림의 대상으로 살았다. 차별을 시달리던 딜릴리는 프랑스에 가는 배에 몰래 올라탔다가 우연히 백작 부인 엠마 칼베를 만나며 삶이 바뀐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딜릴리는 피부색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원숭이' 취급을 받는다.

마스터맨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를 신봉하고 여성은 교육을 받거나 사회적 진출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남성 우월주의 조직이다. 그들은 어떤 프랑스 사람보다 똑똑하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예법에 바른 유색 인종, 게다가 여성인 딜릴리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미셸 오슬로 감독은 '프랑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여성들'을 딜릴리로 상징화하고 그 시대 여성들의 고통과 저항을 딜릴리와 마스터맨의 관계로 은유한 셈이다. 여기엔 성차별뿐만이 아니라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아류가 아니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 오드


<파리의 딜릴리>는 첫 장면에서 카나키 원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그 모습은 연출된 장면임이 드러난다. 연출된 카나키 원주민들의 삶을 프랑스 사람들은 동물원 구경하듯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은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사건을 조사하는 동료는 프랑스 남자인 오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딜릴리를 포함한 다양한 피부색의 소녀들이 어울려 "모두 하나라네"란 가사를 담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혐오와 차별을 극복하자는 목소리이며 몸짓이다.

만약 <파리의 딜릴리>가 벨 에포크 시대의 미술, 음악, 문학 등을 늘어놓는 수준이었다면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2)의 아류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을 찬양하는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인종차별주의를 비판하는 태도와 페미니즘의 시선을 차곡차곡 쌓으며 고유한 결을 만들었다. 영화가 지닌 날카로운 정치적, 사회적 텍스트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최근 개봉한 <몬스터 랜드>(2017)와 <파리의 딜릴리>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폭넓은 소재 발굴과 과감한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두 작품은 세계에 만연한 갈등과 분열, 혐오와 차별을 함께 극복하자고 이야기한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시대를 담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이것은 예술이 잊지 말아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29일 개봉.
덧붙이는 글 영화 <파리의 딜릴리>는 2019년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파리의 딜릴리 애니메이션 미셸 오슬로 프루넬 샤를-암브롱 엔조 라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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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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