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인 <미몽>(1936)에 출연한 문예봉.
ⓒ 필름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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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1930년대 제작 영화들이 해외 필름 아카이브를 통해 대거 발굴되면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영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다. 1930년대 영화계를 이끌었던 배우와 감독, 시나리오 작가들의 활동은 그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북한으로 건너갔다. 문예봉, 임선규, 주인규, 남궁운, 심영, 강홍식(최민수 외조부) 등이 그들이다. 이후 이들에 대한 필름 수집과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해방 전 활동은 어느 정도 복원됐으나, 월북 뒤 북한에서의 활동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런 가운데 올해 한국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22일 서울에서 월북 영화인들의 삶과 발자취를 살펴보는 강연이 열렸다.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공동 주최로 석관동 한예종에서 열린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한국영화 세계와 마주치다'-'북으로 간 영화인들' 강연에서 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장(영화학 박사·영화사 연구자)은 "그때(2004년)까지 북으로 간 영화인들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면서 "어떤 사람들이 갔는지, 북으로 가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상언 소장은 그러면서 "월북 영화인들이 1950~1960년대 북한영화사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북한에서도 잊힌 인물들"이라며 "전 세계 아카이브에 필름이 조금씩 있다. 그것들을 수집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북한의 1950~1960년대 영화를 알 수가 없다. 북한 내부에서도 1960년대 이전 영화는 못 본다. 북한은 역사를 시기마다 다시 쓴다. 시대마다의 관점으로 쓰는 것"이라며 "1970년대 들어 주체사상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이전 것은 가려지고 공개되지 않았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1970년대 이후 것이고, 이전 영화는 알 수가 없다"고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한 소장에 따르면, 북한은 스태프와 출연 배우 중 '숙청'된 사람이 있는 영화는 공개하지 않거나 타이틀을 편집하고 공개한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스타 배우였던 문예봉이 월북 뒤 북한에서 처음 주연한 영화가 <내 고향>(1949)이다. 이 영화는 현재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북한 영화 중엔 북한 당국이 직접 업로드한 것도 있지만, 제작 당시 해외로 수출된 영화를 해당 나라에서 '더빙판'으로 올린 작품들도 있다.
 
한 소장은 "<내 고향>은 제작진 중에 숙청된 사람이 많아서 타이틀을 아예 도려냈다. 이 영화에서 러시아 음악이 사용됐다고 비판받아서 다 들어내고 새롭게 녹음했다"면서 "1960년대에 영화가 일반에 재공개될 때 전면적으로 개작됐다. 남북한 모두 정통성에 위배될 것 같은 부분은 다 쳐내고 캐논(canon, 정본)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가장 주요하게 다뤄진 영화인은 1948년 월북한 문예봉-임선규 부부였다. 문예봉(1917~1999)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1949년 월북 뒤 북한에서도 최고 스타로 군림했다. 아버지인 문수일도 연극배우 출신인데, 당시는 여배우가 부족하던 시절로 문수일은 여동생과 딸을 배우로 만들 정도로 연극과 연기에 열정이 깊었다.
 
 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 22일 한예종 영상원에서 '북으로 간 영화인들'을 강연하고 있다.

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이 22일 한예종 영상원에서 '북으로 간 영화인들'을 강연하고 있다. ⓒ 신상미

 
한 소장은 "문예봉은 일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며 "그에 비견되는 인물은 나운규나 신성일, 송강호 정도"라며 "여러 훌륭한 배우 중 하나가 아니라 여러 훌륭한 배우를 밑에 깔고 있는 독보적인 배우였다"고 평가했다. 

문예봉은 아버지가 설립한 '연극시장'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1932년 나운규 주연의 <임자없는 나룻배>로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고,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토키(발성영화)인 <춘향전>에 춘향 역으로 출연하면서 스타가 됐다. 

한 소장에 따르면, 극단을 이끈 문수일은 항상 돈에 쪼들렸다. 그는 부자에게 딸 문예봉을 후처로 시집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문예봉은 조선연극사에서 활동하다가 연극시장으로 옮겨온 극작가 임선규와 이미 연애 중이었다. 딸이 임선규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문수일은 화가 나서 임선규를 극단에서 쫓아냈다. 

한 소장은 "혼자 남아서 아기를 낳고 키우게 된 문예봉이 산후우울증에 걸려서 (연극을 하면서) 엄청나게 울었다. 관객들은 연기를 잘한다면서 좋아했다"면서 "어느 날 평안도 정주에서 아기를 업고 몰래 극단을 탈출했다"고 말했다. 

문예봉은 정주역을 지키고 있는 단원들을 피해 눈보라 치는 날 아기를 업고 수십리를 걸어 오산역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서울행 기차를 탔고, 임선규와 서울에서 재회했다. 임선규는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생계가 막막했다. 이때 임영우 촬영감독이 찾아와 새로 제작되는 영화에 춘향 역으로 출연해달라고 제의했다.  

이때부터 문예봉은 돈을 벌기 위해서 들어오는 영화마다 닥치는 대로 출연했다. 1935~1945년까지 10년간이 전성기였다. 한 소장은 "이 시기 영화는 문예봉이 주연인 영화가 절반, 아닌 영화가 절반"이라며 "나머지 절반도 문예봉을 캐스팅하고 싶었지만 못한 영화다. 그 기간에 아이 셋을 더 낳았다. 아이를 안 낳았으면 더 출연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동양극장 전속작가로 활동하던 남편 임선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크게 흥행했다. 이 작품은 한국 연극 100년사의 최고 히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원래 예정된 상영작이 중지되면서 갑자기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임선규의 여러 포트폴리오 중 하나였다. 갑자기 공연된 탓에 프롬프터(무대 아래 구멍에 앉아 배우에게 대본을 읽어주는 사람)가 불러주는 대로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펼쳤음에도 크게 관객을 끌어모았다. 여주인공 홍도 역은 동양극장 최고 히로인이었던 차홍녀가 맡았고, 홍도의 오빠 역은 배우 황철이 연기했다. 
 
한 소장은 "문예봉은 본인도 스타지만 병든 남편을 열심히 수발해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만들었다"면서 "당시 일제가 선전하고 장려하던 '양처현모'의 표본 같은 존재였다. 당시 사람들은 배우 문예봉도 좋아했지만, 인간 문예봉도 좋아했다"고 밝혔다. 

해방 뒤 임선규가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선전 책임자가 되면서 문예봉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문예봉은 동료 배우들과 함께 집회 현장에 연사로 초빙돼 가곤 했는데,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군정이 남한에서 좌익활동을 금지했다. 이때 문예봉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임선규가 아내에게 "얼굴이 알려진 스타라 활동하기 어려우니 북한으로 가라"고 먼저 권유했다. 
 
 <임자없는 나룻배>의 주연배우 나운규와 문예봉.

<임자없는 나룻배>의 주연배우 나운규와 문예봉. ⓒ 한국영상자료원

 
1948년 3월, 문예봉은 얼굴을 분장하고, 입안에 솜뭉치를 넣어 얼굴형을 바꾸는 등 부잣집 늙은 가정부로 변장하고 기차를 탔다. 개성까지 간 다음 안내자를 따라 송악산을 걸어서 넘었다. 무사히 평양에 도착한 뒤 당시 문화선전상이었던 허정숙을 만나 영화촬영소에 배치됐다. 문예봉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김정숙 부부가 직접 그녀를 만나러 올 정도였다. 

월북 뒤 그녀는 <내고향> <용광로>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 등 3편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6.25가 터지자 전쟁선전영화인 <소년 빨치산>에 출연했다. 1951년엔 북한을 대표해 해외에 나가 북한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인민군을 따라서 서울에 입성하기도 했다.
 
전쟁 직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됐다. 이들 부부를 음해하는 투서가 많았다. 기억도 못했던 사소한 말 한마디가 문제가 됐다. 문예봉은 누명을 벗기 위해 김책을 만나 호소했다. 자신은 복귀할 수 있었지만 임선규는 끝내 복귀하지 못하고 은퇴해야 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여러 계파 중 남로당 계열을 가장 싫어했고, 전쟁 이후 실권을 장악하면서 남로당 계열을 가장 먼저 쳤다. 

숙청에서 살아남은 문예봉은 전후 처음 만들어진 영화 <빨치산의 처녀>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6.25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저항한 조옥희라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알려졌는데, 현재까지 필름은 비공개돼 있다. 다만 중국어로 더빙된 필름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생산력 증대 운동인 천리마운동(1956~1968)이 전개되자 영화 부문도 계획된 생산량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제작할 것을 강요당했다. 김정일이 처음 지도한 영화로 알려진 <성장의 길에서>(1964)는 남한의 '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 주인공의 어머니로 출연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대 후반, 북한에서도 대숙청이 일어났다. 김정일이 문화예술계의 숙청을 주도했다. 김정일이 보는 앞에서 20대 젊은이에게 강홍식, 문예봉, 최승희 등이 비판받았다. 젊은 제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지방으로 추방당한 충격으로 임선규와 최승희, 강홍식이 사망했다. 

한 소장은 "문예봉도 1969년에 숙청당하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마을마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하는 사람이 됐다"면서 "조선 최고의 배우가 유랑극단 배우가 된 것이다. 자잘한 극단의 배우로 십여년을 보낸 끝에 1976년 생일을 앞두고 은퇴했다"고 밝혔다.  

문예봉이 복권된 것은 1978년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납북돼 북한 영화제작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 소장은 "원로영화인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숙청 영화인들을 재심사했는데 (이를 계기로) 다시 10년 만인 1979년에 복귀했다"며 "이후엔 통일운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한 소장은 그러면서 "문예봉은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김일성 시대를 상징하는 배우로 영화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면서 "그녀가 영화에서 손주에게 밥을 차려주는 모습은 김일성의 역할에 빗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 세대의 대표적 인물이 김정일 시대를 이끌어가는 젊은 세대에게 할아버지 세대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해 주는 역할을 상징했다"며 "말년에 2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1999년에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한 소장의 강연을 통해 월북 뒤 문예봉-임선규 부부의 활동이 거의 처음으로 알려졌다. 올해는 문예봉 타계 20주년으로, 한 소장은 지난 3월 말, '월북영화인' 시리즈(총 10권) 첫 권으로 <'빨치산의 처녀'가 된 '삼천만의 여배우': 문예봉 전>을 출간했다. 2권은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연출자: 강홍식 전>, 3권은 <배우로 출발, 극작가로 살다: 김태진 전>이다. 후속편에서 다룰 월북영화인은 배우 김연실·심영·주인규, 감독 강호·박학·윤용규, 시나리오 작가 추민 등이다.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한국영화 아카데미 포스터.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한국영화 아카데미 포스터. ⓒ 트랜스아시아영상문화연구소

 
문예봉 임선규 월북영화인 강홍식 주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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