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로지> 메인 포스터

영화 <로지> 메인 포스터 ⓒ 박수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영화의 시작과 함께 "Looking for a room for a few days"라는 대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임대료 상승과 절대적인 물량의 부족으로 임대 주택에서도 쫓겨나야 할 처지에 놓인 주인공 로지(사라 그린 분)가 오늘 밤 묵을 숙소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정책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다고 하지만 실정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그들에게 지급된 리스트 속의 호텔들은 전화를 걸 때마다 되려 희망이 조금씩 깎여 나가는 계기가 된다. 그만큼 집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하는 이들의 수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현금 결제가 아니라 더블린 시에서 지급하는 신용카드로 결제 후 숙박해야 하는 로지와 같은 처지의 이들을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지급한 리스트의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 <로지>는 집을 잃은 후 잘 곳도 머물 곳도 사라진 로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을 견디면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로지와 그녀의 남편 존(모 던포드 분), 그리고 두 사람의 네 아이는 오늘도 작은 자동차 하나에 의지해 하루를 견딘다.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 속 이야기는 개인의 무능이나 나태, 비합리적 선택에 의한 추락이 아닌 사회적 제도의 불합리성과 경제적 재난으로 인해 한 가정이 얼마나 위태로워질 수 있는 지에 대해 그리고 있다. 분명히 넉넉지는 않은 살림이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이루어가고 있던 이들의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진 뒤에, 그 삶을 마음 편히 놓아둘 수 있었던 공간이 사라진 뒤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그려나간다.

다만, 이 영화에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은 사건의 인과 관계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본연의 인간성과 자애적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표현해 내고자 한다는 점 때문이다. 패디 브래스내치 감독은 작품 속 그런 장면들의 표현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지켜나가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숭고함 같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영화 <로지> 스틸컷

영화 <로지> 스틸컷 ⓒ 박수엔터테인먼트


02.

이 영화의 타이틀이 <로지>인 이유는 현재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돌볼 수 있는 인물이 그녀이기 때문이며, 가족의 가장 외부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부정적 상황의 접점이 되는 이 역시 그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편인 존이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가족이 하루를 버티기 위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직장에서 최선을 다한다. 다만, 직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 자체가 지금 당장 가족에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로지는 그가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의 몫에 그의 몫을 더해 가족 내 부모의 역할을 모두 일임해야 한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외부적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오늘 밤 당장 가족이 머물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그들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에 대한 것.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처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이 된다. 집을 구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역시 문제는 커질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말이다. 애초에 로지는 자신의 가족이 이 생활을 오래 끌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최대한 외부에 노출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에 후자의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진짜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문제는 딸 밀리(루비 던 분)가 갑자기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순간 시작된다. 꾀병인줄만 알았던 딸의 문제가 학교에서 동급생들로부터 받은 놀림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것.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지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한번, 아이가 겪어야만 했던 심리적 고통에 또 한번, 오열을 하고 만다. 물론 아이들의 놀림은 실제로 밀리에게서 냄새가 나서라기보다는 그녀의 처지에 대한 조롱이나 다름 없었으리라.

로지에게는 다소 억울한 부분도 있다. 그들의 현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관객들이 스크린 외부에서 살펴보기에도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학교를 나서자마자 로지의 옷을 바로 갈아 입힌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차 안에 있는 옷이라고 얼마나 더 깨끗할 수가 있을까. 분명히 그 옷이 훨씬 더 깨끗해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엄마의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을 그대로 두는 일 따위는 차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지금 당장 제대로 씻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옷을 갈아 입히는 행위마저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 <로지> 스틸컷

영화 <로지> 스틸컷 ⓒ 박수엔터테인먼트


03.

외부의 상황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여력이 부족한 그녀에게 가족 내부의 문제도 발생한다. 큰 딸인 케일리(엘리 오할로런 분)가 하교 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를 예전 집이 있던 동네에서 찾게 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손이 부족한 그녀에게 큰딸 케일리의 반항 아닌 반항은 더 큰 무력함을 남긴다. 이처럼 번갈아 가며 속을 썩이는 아이들과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할 수가 없는 엄마. 로지는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현재의 상황과 다가올 미래, 가족의 체면과 자신의 자존심,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

현재의 상황과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삶 주변에서 로지의 삶을 떠돌고 있는 엄마와의 관계 또한 문제다. 그들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장면을 통해 명확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엄마의 집을 찾아간 로지가 현관문 앞에 서서 함께 나누는 대화에서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한 것이다. 이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을 정도로, 정확히 이야기하면 손자인 아이들에게는 집을 내어줄 수 있지만 딸인 로지에게는 한 발도 허락할 수 없다고 엄마가 말할 정도로 틀어져 버린 관계다. 그녀 또한 최소한의 도움조차 거절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거칠었으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그녀의 반응을 남편인 존 또한 모두 이해할 정도로 문제는 가볍지 않아 보인다.

외부적인 문제와 내부적인 문제는 처음에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점차 가족의 테두리를 감싸며 엉기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로지 본인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습은 점차 노숙자와 비노숙자의 경계로 이동해 간다. 정부의 보조(더블린 시에서 보조하는 최저 생활을 위한 신용카드)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은 충분하지 않아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도, 내일 밤을 보낼 호텔을 찾기 위한 전화를 돌리기도 어렵다. 하지만, 가족을 노숙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자 현재의 처지에 대한 강한 경계이기도 하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의 마음마저 정말로 그렇게 되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과 같은 것 말이다.
 
 영화 <로지> 스틸컷

영화 <로지> 스틸컷 ⓒ 박수엔터테인먼트


04.

러닝타임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이면에 짙게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역시 로지 본인에 대한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돌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루를 묵을 호텔을 구하지 못한 날 밤에, 문을 닫기 직전의 가게에서 아이들을 모두 씻기고 난 후 겨우 양치를 끝내는 후반부의 장면이 유일하다. 그마저도 양치를 하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 의미다.

로지의 모습을 단순히 쉽게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영화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행동은 그저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 아니라, 강한 의지적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후반부에 등장하는 자동차 내에서의 난장, 가족이 잠시 현실을 잊기 위해 서로에게 감자 튀김을 뱉으며 난장을 부리는 장면과 같은 순간들이 있었기에 겨우 버텨낼 수 있었으리라.

극의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극의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다소간의 장면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내내 안타까운 시선을 거두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다. 러닝 타임 내내 최소화되어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짧고 굵게 그려지는 극의 마지막까지도 그렇다. 지켜야 하는 것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존재의 뒷모습.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이 영화가, 영화 속 로지가 이끌어 온 러닝타임의 장면들을 다시 한번 반추하게 된다.

가장 평범한 것도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충분하지는 않을지언정 최소한의 책임은 끝내 자신의 손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영화 <로지>는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세상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영화 무비 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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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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