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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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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7일 오전 10시 19분]

사실 여행을 안 다녀본 편은 아니다.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서도 떠날 일은 적지 않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도 국내외를 제법 돌아다닌 편에 속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한 번도 달랑 혼자 떠나본 적이 없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떠났다. 그런데 '와락' 혼자 떠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생일을 기념해 혼자 떠나겠다고 선언을 했다.

드디어 여행 당일, 필요하다 싶은 물건 몇 개만 챙겨 가방 하나에 넣고 집을 나섰다. 1박 2일이니 딱히 챙길 것도 없지만 혼자 떠난다는 홀가분함에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어디로든 날아갈 것 같았다. 혼자 정한 이번 여행의 테마는 '와락', '와락'의 사전적 의미는 '갑자기 행동하는 모양', 이 말처럼 사전 준비도, 계획도 없이 '와락' 떠나보기로 한 것이다.

목적지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예향 경상남도 통영으로 잡았다. 일단 통영을 자주 가는 후배에게 봉숫골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한 곳을 추천받긴 했지만 사전 예약도 하지 않고 무작정 떠났다.

일 때문에 통영을 몇 번 가긴 했지만 봉숫골은 이번이 처음이다. 용화산 자락에 자리한 봉숫골은 수백년 나이의 보호수가 마치 장승처럼 마을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고향의 봄> 동요에 나오는 '고향'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정겨운 동네였다.
 
통영 봉숫골 한가운데 턱 버티고 서 있는 보호수 ⓒ 추미전
  
무엇보다 이 동네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중심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벚꽃나무,벚꽃축제가 열리는 4월이면 동네를 찾는 관광객들이 흩날리는 벚꽃만큼이나 많다고 한다. 벚꽃 휘날리는 절정기는 지났지만 동네는 여전히 아름답다. 특히 이 동네에는 전혁림 미술관을 비롯해 둘러 볼 만한 명소와 예쁜 카페도 많아 한번 와 본 사람들은 꼭 다시 찾는 곳이라고 한다.
  
통영 봉숫골에 있는 전혁림미술관 ⓒ 추미전
 
봉숫골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문이 꼭 닫혀 있고 너무 조용하다. 혹시 안 하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르자 따뜻한 미소를 지닌 여성이 문을 열어준다.

"어머, 예약 안 하고 오셨어요? 요즘은 비수기라 예약이 없으면 월, 화는 영업을 안 해요. 미리 예약을 하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몇 마디 대화만으로 여행객들에게 좋은 친구가 돼 준다는 주인장의 평판이 괜히 있는 게 아님을 짐작할 만했지만 어쨌든 여기서 묵을 수가 없다니 좀 당황스럽긴 하다. 그렇지만 '와락' 여행이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나와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에 있는 책방으로 향했다. 통영에 정착해 책방을 하면서 의미 있는 책을 많이 출판하는 <남해의 봄날> 책방은 통영에 오면 꼭 들러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라!' 이곳도 월, 화에는 영업을 안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통영 봄날의 책방 ⓒ 추미전
 
잠시 난감했지만 곧 얼마 전 읽은 김영하의 <여행의 기술>이 생각났다. 김영하는 중국에서 집필에 몰두할 계획으로 게스트하우스를 한 달 예약해 송금까지 마치고 출국을 한다.

그런데 중국 공항에서 걸리고 만다. 비자를 발급받지 않고 비행기를 타 입국이 승인되지 않은 것이다. 몇 시간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결국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반인으로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지만 김영하는 작가적인 마인드로 스스로를 달랜다.

"아, 난 언젠가 이 일을 글로 써야지. 작가에게는 경험이 중요하니까. 강제 출국 당하는 경험을 언제 또 해 보겠어?"
 
작가에게는 모든 경험이 자산이다. 사실 모든 여행은 되짚어 보면 계획한 대로 잘 보고 잘 먹은 기억들보다는 실패한 우여곡절들이 더 오래도록 잊히지도 않고 기억에 남는 법이다. 이런 실패의 경험들은 오히려 여행 글을 생동감 넘치게 하는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하며 너무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주변 카페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며 열심히 검색을 해 겨우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하고 본격적인 통영 여행에 나서기로 했다. 통영의 본격적인 여행은 '박경리 기념관'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와락' 여행의 목적지로 통영을 선택한 건 '통영'이 그만큼 내게 가깝게 느껴지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통영이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순전히 박경리 덕분이다. <어린 왕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수천 수백만 개의 별 중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떤 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야."
- <어린왕자> 중

내게는 박경리가 어린왕자의 꽃과 같은 존재다. 사실 박경리의 발자취가 닿았던 국내 모든 곳들을 다 둘러 보긴 했다. 신혼 시절 잠시 헌책방을 했던 인천 배다리골목과 <토지>의 무대가 된 하동 '박경리 문학관' 그리고 작가가 마지막 생애를 보냈던 강원도 원주의 기념관까지 다 둘러봤다.

박경리가 태를 묻은 고향이자 영원히 잠들어 있는 통영을 제일 마지막으로 둘러보게 된 셈이다. 통영시 산양읍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에 들어서자 원주 텃밭에서 고추를 다듬는 박경리의 사진이 입간판으로 서 있다.
 
강원도 원주 텃밭에서 고추 다듬던 당시 박경리의 모습 ⓒ 추미전
 
 
내가 가지고 있는 1994년판 < 작가세계 >박경리 특집, 여기에 실린 이 사진을 좋아했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 추미전
 
이 사진이 처음 들어있던 1994년 판 <작가세계>는 '박경리 특집'으로 출간됐었다. 당시 샀던 책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실제 박경리 작가는 인생의 말년을 원주에서 배추나 고추같은 텃밭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평범한 시골 아낙같은 느낌의 이 사진을 좋아했는데 이곳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 느낌이 든다. 박경리 기념관은 박경리의 생애와 작품들이 잘 전시돼 있었다.
  
박경리문학관 내부 ⓒ 추미전
  
박경리 원주 집필실을 그대로 재현-박경리 기념관 ⓒ 추미전
 
대학시절, 박경리의 <토지>가 나올 때 마다 기다려 한 권씩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처럼 가로판 소설이 아니라 세로판 책이었다. 무려 26년에 걸쳐 <토지>를 집필했던 작가, 암 수술을 하고 병실에서도 <토지>를 썼던 작가, 문학을 자신의 숙명이라 여겼던 작가는 늘 평범한 삶을 동경했다고 말한다.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 - 박경리
 
처음 <토지>를 완독했을 때 뭔가 엄청난 일을 해낸 것처럼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에도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토지>를 펼쳐들곤 했다. 이 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내 문제도 좀 해결돼 있기를 바라면서.

박경리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말투나 장면들이 너무 생동감 있어 마치 눈 앞에서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운명에 굴복하기보다 운명에 맞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앞날이 궁금해 책을 한번 손에 들면 놓을 수가 없다.

소설 속 주인공들 못지 않게 자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불행들과 맞서야 했던 박경리 작가. 전쟁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외동딸과 함께 남겨진 그는 끝내 자신의 불행과 시대의 질곡을 우리 문학의 거대한 산맥인 <토지> 속에 다 녹여냈다.

그의 작품은 드라마로 많이 제작이 됐는데, 기념관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이 드라마 <토지>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인 통영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작가 박경리, 그는 그의 바람대로 고향에 돌아와 영면에 들었다.
 
고향 통영은 어머니의 태와 같은 곳이예요, 죽을 때는 고향으로 갑니다. - 박경리

박경리 기념관 뒤쪽 언덕을 10여분 걸어 올라가면 잘 가꾸어진 박경리의 묘역이 나타난다. 그가 사랑한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그의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 앞으로는 통영바다가 펼쳐져 있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 비추이는 그의 안식처는 홀로 온 여행자에게도 평안한 휴식을 주었다. 묘역 옆의 벤치에 오래도록 혼자 앉아 있다 일어섰다.  
 
박경리 기념관에서 10여분 언덕을 오르면 박경리의 산소가 있다 ⓒ 추미전
 
박경리 기념관을 나오면 이어지는 산양 일주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도 올라있을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통영 바닷길을 옆에 끼고 달리다보면 이 길의 끝에 달아공원이 있다. 달아공원은 통영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일몰 포인트다.

해발 253미터의 나지막한 언덕이지만 달아공원에서 보면 통영 앞바다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왜 이곳을 다도해라고 하는지 실감날 정도로 많은 섬들이 떠 있다. 박경리는 통영 앞바다의 모습을 마치 위성이 떠 있는 모습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달아공원 해질녘. 달아공원 주차장에서 찍은 사진. ⓒ 추미전
  
달아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5시 반경, 매점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일몰시간은 오후 7시 20분경이라고 한다. 달아 전망대까지 천천히 걸어올라 풍광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어도 시간은 아직 1시간 반이나 남았다. 계속 있어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망설이는 중에 나처럼 일찍 도착한 어떤 부부도 일몰을 기다릴지 내려갈지를 놓고 실랑이중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일몰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혼자 결정하면 그만이다. 시간에 맞춰 함께 가야 하는 여행과 달리 '홀로 여행'은 마음 가는대로 혼자 결정하면 그만이다. 옆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부부는 기어이 남편이 재촉해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왕 시간이 남으니 가장 좋은 일몰 포인트를 찾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달아공원 전망대가 좋은 일몰 포인트로 알려져 있지만 아무래도 나무들이 앞을 너무 많이 가려 전체적인 조망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차를 세운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바다를 보니 오히려 앞을 가리는 장애물도 없이 통영 바다 전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전망대보다 오히려 여기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에서 일몰을 기다리기로 했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몰려오니 낮 동안 다소 뜨거웠던 초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듯하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이 조용히,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자니 '와락' 혼자 떠나온 여행의 진수를 제대로 누리는 듯하다. 해지는 풍경을 1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본 것은 처음이다. 처음에는 옅은 해무가 몰려와 섬 주위를 마치 솜이불을 덮은 듯 포근히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반짝이는 은빛가루를 바다 위에 뿌려놓은 듯 물색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은빛가루를 뿌려놓은 뜻 반짝이는 통영 앞바다. 달아공원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 ⓒ 추미전
   
달아공원 일몰. 달아공원 주차장에서 찍은 사진. ⓒ 추미전
 
은빛물색은 잠시 후 조금 더 짙은 금빛으로 바뀌더니 찬란한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갔다. 빛이 어둠에게 자리를 내 주는 절정의 시간은 강렬했지만 짧았다. 달아 공원의 일몰을 가슴에 저장하고 도시로 내려와 충무김밥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버스 정류장 간판조차 박경리가 입간판으로 서 있는 예향의 도시, 통영으로 떠나온 '와락 홀로 여행' 첫날은 백점 만점에 백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에도 실립니다.

태그:#통영 일몰 명소, #박경리 기념관, #통영 가볼만한 곳, #달아공원, #박경리의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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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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