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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캠퍼스 생활의 꽃이라는 '캠퍼스커플(CC)'이 되고 나서나는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에 직면했다. 나를 설명하는 첫 번째 수식어로 '누구의 여자친구'라는 말이 따라오게 된 것이다. 갑자기 남자친구의 행동, 그의 실수, 그의 평판 같은 것들이 모두 나의 꼬리표가 되어 달렸다.

내 앞가림을 하기도 바쁜데 그가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까지 신경을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좋아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던 탓이겠지만, 얼마 안 가서 나는 그와 헤어졌다. 이별의 상처보다는 내가 누군가와 '패키지'가 되었다가 비로소 '개인'으로 돌아왔다는 해방감이 훨씬 컸다.

연인 사이도 이렇게 공동체로 묶이기가 쉬운데, 결혼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일까? 나와 다르게 살아온,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이 나와 '공동체'가 된다니. 강아지처럼 훈련시킬 수도 없이 자유 의지로 살아가는, 어떤 희로애락을 겪을지 모르는 다른 '인간'의 운명까지 내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시가 식구와 가족이 된다는 것

하지만 나는 20대에 이른 결혼을 했다. 사람 일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과의 결합보다 앞선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가족을 내 삶에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가족에 대하여 깊게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우리는 각자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을까? 내가 과연 기존의 가족에 더하여 새로운 가족을 또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족이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줄 알았던, 나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였다. 나 역시 한국 사회에서 가족 공동체의 일부로 살아왔기에, 감히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때로 내 가족조차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각자 잘 살고 있는 평범한 4인 가족임에도 그랬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선택한 삶이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은 곧 엄마의 행복이었고, 나의 실패는 곧 엄마의 고통이었다. 내가 안전한 길을 걸어야 부모님 역시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함부로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식이 내 삶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상처 입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나는 괜찮다'는 말을 엄마가 믿지 않아 가슴 아플 것이 두려웠다.
 
환장할 우리 가족
 환장할 우리 가족
ⓒ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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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환장할 우리 가족>을 읽고 나서, 때로 무겁게 느껴지는 가족에 대한 부담과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감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폐쇄적인 가족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탓에, 그 안에서 '개인'은 '나'가 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정상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가족 공동체를 새롭게 정의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참거나 양보하거나 버텨야만 했던 일들을 '개인'으로 끄집어내어 은연중의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한국 사회 특유의 '가족'에 대한 무거움과 답답함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뜻밖의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존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결혼을 통해 마침내 남편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어른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일부 어른들은 내가 '남편의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내가 제일 당황했던 것이 '이씨 집안에 시집 왔으니'로 시작하는 문장들이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이지만, 그래서 많은 예의와 양해를 생략하는 집단이기도 했다. 시가에서는 스스럼없이 나를 가족 행사에 초대했다.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또다시 '개인'으로 서지 못하고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가족에게 부여된 역할은 우리 사회에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될 때가 많고, 가족이란 일종의 성역이기에 그 안에서 함부로 '나'를 주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효를 게을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가족의 해체를 유발하는 행위를 하는 건 비단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환장할 우리 가족>의 저자는 이렇듯 결혼하여 새 가정을 꾸린 자식과 기존의 부모 관계에 대해, 우리가 '사랑'이나 '효도'라 여겨 차마 거부하지 못했던 그것을 과감하게 '주객전도 현상'이라고 표현한다.
 
자식 입장에서 신체발부수지부모 가족관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만드는 당사자인 자기가 그 일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에 빠지면 피상적으로는 자기 결혼이라고 생각해도 여전히 반쯤은 부모의 마리오네트나 꼭두각시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주체가 부모를 자기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일정 지분이 있는 주체로 대우하고, 그 영향력 아래에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나머지 의도하지 않은 주객전도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109p)

이처럼 실제로 '개인'보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일은 나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끔 해주신 감사한 부모님에게 내 삶의 주체 의식과 결정권을 나누어 드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나 혹은 부부끼리 때로 거짓되고 어두운 얼굴을 보여야 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나라는 개인을 억압한다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선으로 선택해야 할까.

가족 내에서 주체적인 나를 찾기

시가 식구들과 가족이 되기 위한 노력을 나는 결국 잠시 미뤄 놓았다. 제사에는 남편만 참여했고, 어버이날에는 '감사합니다' 대신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안부 문자를 보냈다. 결혼이라는 나의 의지로 내 가족을 형성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남편과 살아가는 방식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였다.

처음에는 일단 서로에게 생기는 희로애락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소 어색했다. 하지만 그보다 서로의 행동이 각자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을 때가 더 문제였다. 나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그의 인간관계가 못마땅하고,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트러블이 생기면 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했을까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했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내가 '나의 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나름대로 가치 판단을 한다 한들 바꿀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지만, 우리는 성인이고 살아가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자 개인의 책임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는 오히려 남편과 나를 분리시키려 노력했다. 나는 여태껏 '유부남'이나 '유부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은연중에 자제해 왔는데, 어떤 사람을 단지 '남편이 있는 여자'나 '아내가 있는 남자'로 정의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나를 수식할 수 있는 많은 요소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별개로 꺼내놓는 것을 방해하는 수식어이기도 했다.
 
한국의 사회체제는 '개인'을 기본 단위로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 기본 단위는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개인을 그가 속한 집단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당사자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타인을 보는 시각도 그렇다. (8p)

같이 또 따로, 비정상 가족

도서 <환장할 우리 가족>의 저자는 남편과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그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레 커다란 불행이 닥치게 되자 저자는 자신의 삶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남편이 암에 걸린 것은 마치 자신이 암에 걸린 것과 동일한 크기로 아내를 짓눌렀다. 주변 사람들 역시 저자 자신이 암에 걸리기라도 한 듯한 시선으로 동정했다.

주변에서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이혼을 권했고 저자는 그 선택지 앞에서 고민했다고 한다. 이혼하고 다른 가정을 꾸린다면 어려움 없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차피 내 삶에 찾아온 고난이라면 결국 다른 형태로 나를 따라오지는 않을까?

생각해보니 결국 이 고난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내 삶에 닥쳐온 일 중의 하나였다. 저자는 내 잘못도 아닌 일을 피해자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나 '개인'의 일로 인식하고 비로소 내 의지로 꾸린 가족 공동체의 주체로 설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에서 '나'를 분리하는 시도는 의식적 측면의 내적 변화다. 따라서 투병하는 남편과 그 옆에서 투병을 돕는 내 상태는 여전했다. (중략) 나는 남편의 투병을 '우리', 즉 가족의 일이라기보다 '나'의 일로 받아들였다. 비록 내 의지나 잘못으로 겪은 일이 아니지만, 무력한 피해자로서 어쩔 수 없이 불행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내 삶에 등장한 내 일로, 그 일에 대한 내 책임을 수용하려고 했다. (12p)

가족에 대한 공동체 의식이 특별하고 강해질수록 가족 안에서 생기는 문제는 온 구성원의 불행이 되며, 가족 밖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한 곳이 된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깊게 공감했다. 또한 내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나'라는 개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큰 위로로 다가왔다.

우리 사회는 가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듯한 인식이 뿌리 깊고,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의 경계를 또렷하게 긋는다. 그래서 흔히 생각하는 가족 구성원 중 누가 없거나, 아프거나, 다를 경우엔 사회에 나올 때부터 핸디캡을 안는다.

가족 내에서 나의 역할이 곧 나 자신을 대체하거나 대표하기도 한다. 가족의 울타리는 나를 안심시키고 보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선택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내 삶을 뿌리째 뒤흔들 위험 요소도 품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결혼을 통해 내 가족을 무작정 '확장시키는' 것이 반갑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가 부여한 '정상 가족' 내의 역할을 맡기 이전에 '개인'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 그리고 두 명이 만나 하나의 작은 가족을 이룬 우리 부부가 건강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길 원한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고 '개인'과 '개인'의 새로운 가족관이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지 않을까? '환장할' 우리 가족의 문제가 뭔지 함께 고민하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가족의 해체가 반갑다. 그 가족은 전근대의 '집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가족이 해체돼야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할 수 있다. 새로운 가족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구성원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애처로운 가족이 아니라, 각자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함께하는 밝고 건설적인 가족이어야 하지 않을까. (13p)

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은이), 문예출판사(2019)


태그:#서평, #환장할우리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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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개 고양이 집사입니다 :) sogon_about@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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