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빅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사카 부립대학교 전기 공학과를 나왔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리메이크 된 <용의자 X의 헌신> 속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나 <탐정 갈릴레오>에서부터 그의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가는 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라플라스의 마녀>는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이 '30주년 기념작'이라고 이름 지었던 만큼, 그의 특기인 '과학'과 '스릴러'의 절묘한 결합으로 찬사를 받는 작품이었다.

일본 영화로도 만들어져 지난 9일 개봉한 <라플라스의 마녀>는 '라이프니츠'의 이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진행된다. 만약 누군가가 사물들의 내부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다면 그리고 더욱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고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억력과 지식을 가진다면 그는 예언가가 되고 거울에서처럼 현재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30년의 역작 <라플라스의 마녀>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빅

 
프랑스의 철학자 시몽 라플라스는 이런 라이프니츠의 결정론을 확장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현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미래를 유추할 수 있는 존재'로 '라플라스의 악마'가 등장한다.

늘 과학자들은 갈망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진다면, 조금 더 정확한 수치로 계산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정확한 공식을 얻는다면, 궁극에는 이 세계에 대한 '진리의 값'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과학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명적 진보를 추동했고, 그 과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판타지적 소망'이 '라플라스의 악마'로 나타난다.

'악마'라지만, 이는 우리가 그간 SF 소설 등을 통해 접했던 '시간 여행'이나, '평행우주론'의 또 다른 버전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공대 출신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30주년 역작으로 바로 그런 과학적 모티브를 끌어와 자신만의 새로운 과학적 스릴러를 탄생시키고자 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소설들을 산산조각 내서 <라플라스의 마녀>를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는 이런 작가의 30주년 역작으로서의 성과가 잘 드러났는가 여부를 놓고 살펴봐야 할 듯하다. 하지만 어쩌면 불가능한 평가일 수도 있겠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어 리메이크 된 <용의자 X의 헌신>을 봐도 그렇지만, 애초에 수백 페이지의 구구절절 장대한 원작을 두 시간여의 영화로 압축해서 만든다는게 쉽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물리적 법칙에 통달하여 뉴턴의 운동 법칙을 꿰뚫어 과거를 알고 그로 미루어 미래를 꿰뚫는 존재' 만큼 영화적 상상력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 있을까?

영화로 온 히가시노 게이고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빅

 
영화의 시작은 유명 온천 휴양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다. 영화 제작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고 그 사인은 황화수소 중독이었다. 과학자로서 이 사건에 참고인이 된 과학 교수 아오에 슈스케(사쿠라이 쇼 분)는 온천지 주변의 지형으로 미루어 보건대 '살인'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단순 사고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온천 지대에서 '황화 수소 중독' 사고가 발생했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온천 지역의 존폐가 달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거기에 나카오카 형사(타마키 히로시 분)는 죽은 사람 앞으로 들어놓은 보험금을 수상하게 여겨 죽은 제작자의 아내를 의심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온천 지역에서 황화 수소 중독 사건이 벌어진다. 이번에도 지형상으로 보면 사고사일 수밖에 없지만, 같은 독극물에 의해 온천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나카오카 형사의 조사에 따르면 오래 전 아마카스 사이세이 감독(토요카와 에츠시 분)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사건은 단순 사고사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의문의 살인 사건에서, 8년 전 벌어진 아마카스 사이세이 일가족에게 벌어진 황화수소 중독 사건으로 시점이 옮겨진다. 그리고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아마카스 감독의 아들 아마카스 겐토(후쿠시 소타 분)가 등장하고, 점점 더 사건의 늪에 빠져들어가는 아오에 교수 주변에 의문의 여성이 배회한다.

그는 '라플라스의 악마'가 아닌 '마녀' 우하라 마도카(히로세 슈즈 분)였다. 영화는 '아마카스 사이세이 감독의 일가족 몰살 사건'에 대해 감독의 블로그를 배경으로 설명한다. 이어 스스로 마녀가 된 '우하라'의 사연까지 덧붙인다.

시작은 의문의 두 사건이지만, 과거로 들어가 거기서 아마카스 감독의 일가족 독극물 중독사 혹은 미수 사건이 드러나고, 그로부터 비롯된 두 명의 '라플라스의 악마'와 '마녀'의 등장까지. 황화수소 중독으로 시작된 영화 스토리는 '라플라스의 정의'에 근거한 과학 판타지로서의 영역으로 확장되어간다.

'라플라스 과학 결정론'은 불가능한 독극물에 의한 살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정론'의 집합체가 되어버린 '실험실의 모르모트'같은 두 사람이 있다. 8년을 견디며 복수를 향해 달려온 청년과 그 청년을 사랑하게 된 여성이다. 청년과 함께하다 보니 어느덧 그를 사랑하게 되어 그의 복수 혹은 자멸을 막기 위해 여성은 자신을 던지는 순애보를 보여준다. 

짧은 러닝 타임으로 풀 수 없는 인간사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빅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오랫동안 스테디 셀러로서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적인 스릴러, 과학 스릴러, 때로는 킬링 타임용 탐정물부터 휴먼 스토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작품을 양산해 내는 작가의 성실하고도 꾸준한 작품 발표가 가장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또한 그 속에서 드러난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고뇌와 욕망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보는 이로 하여금 '만화경'처럼 인간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역시 한 몫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는 영화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특수 효과를 살려 '라플라스 이론'에 대해 설득하려 한다. 물론 냇물 사이에 아오에 교수를 몰아넣고 드라이 아이스로 감금하는 등 다소 황당해 보이는 장면도 있다. 그럼에도 클라이맥스 신에서 아마카스 감독의 낡은 세트를 배경으로 한 '다운 버스트' 상황과 그 속에서의 우하라의 순애보적 기지는 영화가 아니고서는 그려낼 수 없는 영역이긴 하다.

반면, 5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의 행간에 서려 있던 다양한 인간군상의 욕망과 고뇌, 인간관계들의 미묘함에 대해서는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적 제약이었을 수도 있고, 연출의 불균형이었을 수도 있다.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와 설명을 접어두고 보면 영화가 그려내는 단편적인 설정이나 교훈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소설 책을 단 몇 줄의 결론을 알기 위해서 읽는 건 아니지 않을까.

영화는 자신의 가족들마저도 완벽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아마카스 감독의 자기 위선에서 시작해 그 완벽주의에 맞선 어머니,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기꺼이 실험 대상으로 나섰던 아들, 그리고 그를 향한 우하라의 순애보 사랑까지 이어진다.  

물론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는 아오에 교수의 시점에서 관객들이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게 만든다. '이 영화가 사랑을 말하고 싶은 거구나' 혹은 '과학적 진리를 통해 알 수도 있게된 미래라는 게 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니구나'라고 교훈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사건과 인물의 극적인 효과가 반감되는 점은 안타깝다.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 서사의 과학적 설정은 가장 영화적이었지만, 그 서사의 행간을 채운 서사는 영화로 감당하기엔 너무 복합적이었다. 결국, 각 인물들의 면면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어야 한다. 언제나 책을 뛰어넘는 영화가 나오기는 힘들다. 하지만 책을 다시 꺼내들지 않도록 만드는 영화들은 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라플라스의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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