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포스터

영화 <소공녀>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두 달 후면 상가 임대계약 만기일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출근하자마자 아파트 대출금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 달 들어가는 생활비를 목록별로 적어본다. 폐업 순서를 어떻게 할 지도 적는다.

18년째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해왔는데 글쓰는 일을 '연습'하기 위해서 우선 '그만두기'부터 하려고 한다. 앞에 몇 줄 읽어봐서 눈치 챘겠지만 필력이라고 하면 우스운 이 솜씨로 말이다.

수업하는 내내 머릿속은 폐업 순서를 생각하느라 복잡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뛰었다. 그동안 이 결정을 못해서 괜한 술만 마시고 신세한탄을 무던히도 했었다.
영화 <소공녀>는 쌀이 떨어지고 집이 없는 척박한 현실 앞에서도 여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는 주인공 미소가 잠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예전 밴드 친구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영화 <소공녀> 스틸 컷

영화 <소공녀> 스틸 컷 ⓒ CGV 아트하우스

 
미소의 친구들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월급의 절반이상을 아파트 대출금을 갚으며 감옥이라고 하는 대용, 점심시간에 링거를 맞으며 대기업에 다니는 문영, 남편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정미, 시부모를 모시며 식모 취급을 받는 현정까지 말이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 미소 친구들과 나는 다르다며 아무리 손사래를 쳐봐도 소용없다.

매달 아파트 대출 이자 50만 원과 상가 임대료 150만 원을 버거워 하면서 이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꾸역꾸역 하고 있는 나에게 미소가 찾아 온다면 어떨까. 과연 그 친구들과 다른 그림이 그려질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미소가 큰 트렁크 가방을 끌고 계란 한 판을 들고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미소는 가사도우미 일을 해서 일당 4만5000원을 받는다. 거기서 약값, 밥값, 위스키값, 담배값을 제하는데 집세와 담뱃값이 오르면서 집을 나오게 된다. 자신의 취향인 위스키와 담배는 포기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 미소를 친구들은 동정하고 한심해하며 심지어 염치없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따뜻한 미소(그래서 이름이 '미소'다)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위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친구를 판단이나 평가하고 충고나 조언따위를 하지 않는다. 바로 '충조평판 안하기'를 실천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영화 <소공녀> 스틸 컷

영화 <소공녀> 스틸 컷 ⓒ CGV 아트하우스

 
감독은 뭘 보여주려 했을까? 가진 것 없이는 반칙없이는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가도 척박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 구조와 그 현실 속에서 우리가 포기하는 건 결국 나의 '취향'과 '삶의 목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같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정미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주거가 안정이 되자 담배를 500원 차이가 나는 '디스'에서 '에쎄'로 바꾸는 장면이나 그 상황이 본인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또한 웹툰 작가의 꿈을 버리고 월급을 더 많이 주는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남자 친구에게 미소는 배신자라고 한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남자친구는 회사에서 사준 양복을 입고 나오는데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대로 사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인이 아닌 삶'을 미소의 시선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삶은 여행이다' 이런 말을 한다면 허세로 보일까? 실제로는 삶의 무게에 눌려 고통스러워 하면서 말로만 한다면 쿨한 척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주인공 미소는 진정 여행자의 삶을 누구보다 충실히 살고 있는 인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폐업 소공녀 취향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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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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