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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운상가는 도심 제조업의 심장 같은 곳이다. 수백여 제조업 장인들이 모여, 인공위성 부품까지도 뚝딱 만들어낸다. 을지면옥과 같은 오래된 식당도 여기 있다. 하지만 몇년새 이곳은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곧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이미 일부 구역은 철거됐고 나머지도 조만간 철거를 앞두고 있다. 세운 3구역 재개발을 둘러싼 속살을 들여다본다.[편집자말]
 을지로 세운공구상가는 시간이 얽혀 있다. 30년 이상된 붓글씨 낡은 간판과 현대식 간판이 공존하고 젊은 작업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기계를 조작한다. 골목 너머로 서울타워가 미세먼지 속에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을지로 세운공구상가는 시간이 얽혀 있다. 30년 이상된 붓글씨 낡은 간판과 현대식 간판이 공존하고 젊은 작업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기계를 조작한다. 골목 너머로 서울타워가 미세먼지 속에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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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거리가 줄어 공장을 닫는 날이 늘었다고 했다. 닫힌 셔터문 위로 낡은 간판 위로 녹물이 흘러 내렸다. 지난 세월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일거리가 줄어 공장을 닫는 날이 늘었다고 했다. 닫힌 셔터문 위로 낡은 간판 위로 녹물이 흘러 내렸다. 지난 세월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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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제조 산업의 정글 같은 곳이었다. 정밀 공구 제조업체들이 모여 있는 서울 세운정밀공구단지(도시계획상 세운 3구역). 우리에겐 '세운상가'라는 말이 더 낯익다. 이곳에 가면 지금도 옛 도심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공구단지를 실핏줄처럼 연결하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보면, 1970년대식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길 옆에는 1~2층 높이의 낡은 벽돌식 건물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다. 이곳에만 공구 제조업체 500여 곳이 들어차 있다. 업체들마다 금속재를 비롯해 정밀하게 만들어진 기계가공부품 등을 빼곡하게 내걸어 놓았다.

이곳 간판들은 대부분 옛날식 붓글씨체다. 예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화가가 업체들의 이름을 써줬고, 수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간판을 온전히 달고 있다고 한다. 또 이들 출입구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낡아버린 미닫이식이었다.  

지난달 25일 오후 기자가 찾았던 이곳은 활력이 넘쳤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기계로 금속을 깎고 다듬는 소리, 망치 소리, 톱날 소리가 곳곳에서 배어나왔다. '쿵쿵'거리는 큰 소리도 나왔는데, 주로 프레스기기를 움직이는 소리라고 했다.

골목길 한 켠에선 검은 기름때에 젖은 셔츠를 입은 50대 남성들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한 남성은 바구니에 공구를 싣고 부지런히 골목길을 오갔다. 보자기에 커피와 같은 마실 것을 담아 어디론가로 움직이는 40대 여성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제법 유명세를 탔던 '을지면옥'과 '안성집' 등 노포(老鋪)들도 이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정착한 음식점들이다.

도깨비방망이
 
 좁은 공장 내부는 얼핏 봤을 때 복잡해 보이지만 기계와 공구는 제자리를 지키며 작업자와 세월을 함께 해왔다.
 좁은 공장 내부는 얼핏 봤을 때 복잡해 보이지만 기계와 공구는 제자리를 지키며 작업자와 세월을 함께 해왔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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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기름이 묻은 손을 반복해서 왕복하며 드릴로 구멍을 뚫었다. 20년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이곳을 곧 떠나야 한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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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업체들은 서로 거미줄처럼 끈끈한 분업 구조를 이루고 있다. 분업 구조는 나무가 열매를 내고, 열매를 먹은 짐승들의 배설물이 다시 나무의 거름이 되는 자연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닮아있다.

"여기는 분업 체계가 확실히 정착돼 있어요. 도면을 보여주면 그 도면을 금형 하는 집에 보내요. 이걸 플라스틱 금형을 할 건지 프레스 금형을 할 건지 파악해서, 또 다시 그 집으로 보내서 견적 내죠. 그리고 양산하고, 조립하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구조예요. 망가졌던 부품도 여기 들어가면 살아서 나와요."

30년 넘게 금속가공업체를 운영해온 이영건(57)씨는 공구상가 제조업 생태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도 "이건 콤프레셔 소리"라며 단번에 기계 이름을 맞혔다.

세월이 쌓이며 촘촘해진 분업 구조는 최적의 효율성과 기술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이곳은 도깨비방망이 같은 곳이다. 일반 기계 부품과 철골, 각종 상패를 비롯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인공위성 부품도 뚝딱 만들져 나온다.

1~2개의 소량 제품을 주문해도 이 업체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탱크도 만들어낸다"는 말도 허언이 아니다. 모두 긴밀한 분업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씨는 "웬만한 기업들이 몇 달에 걸쳐서 생산하는 부품도 우리는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며 "기술에 숙련된 사람들과 협업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장인들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비철 가공을 하는 김학률 신아주물 사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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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우리는 이런거 만들어요. 여기 아파트 들어온다는데 기계 돌리면 사람들이 가만있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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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철 가공을 하는 김학률(61) 사장은 '장인'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동이나 아연 등 비철을 제작하는 기술은 대한민국 누구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온도 1300도를 정확히 맞춰야 하는 동(洞)작업도 별다른 장비 없이 색깔과 냄새만으로 구분한다.

한때 작업을 하다가 큰 화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는 이 일을 놓지 않았다. 제작 과정이 까다로운 샹들리에 가로등을 도면만 보고 뚝딱 만들어낸 일화를 소개할 때 그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여기는 전부 다 장인이에요. 기술자 수준을 뛰어 넘은 사람이에요. 장인은 이것저것 다 창작할 수 있고 모든 걸 다 포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디다 내놔도 꿀리지 않아요. 다른 공장에서 못하겠다고 빠꾸(거절)시킨 거, 나는 단 한 번도 빠구 시킨 적 없어요."

자부심 넘치는 이곳 장인들은 요즘 근심을 안고 산다. 이들이 자리한 세운 3구역은 현재 총 10개 형태의 개별 필지로 쪼개져 재개발될 예정이다. 언제 가게를 비울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미 청계천변에 위치한 세운 3-1구역, 3-4구역, 3-5구역은 지난해 12월 철거됐다. 수십년간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공구를 제작하던 300여개 제조업체들이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제조업체들이 떠난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쇠를 깎는 톱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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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밀한 가공을 마치고 완성된 부속. 이 부속은 또 다른 공정을 거쳐 또 다른 완제품이 된다.
 정밀한 가공을 마치고 완성된 부속. 이 부속은 또 다른 공정을 거쳐 또 다른 완제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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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쇠를 다듬는 연마기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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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배상 청구서

이곳 상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만 없었다. 이들은 재개발에 맞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반발했고, 사업 시행자는 소송으로 압박했다. 퇴거를 거부하는 상인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비상대책위원회에 있었던 최아무개(43)씨는 "(시행사에서) 내용증명을 2주에 1번씩 보내고, 10월에는 손해배상 청구도 들어왔다"며 "11월에 은행에서 연락이 왔는데, 사업자 통장이 가압류됐다는 문자였다"고 말했다.

연이은 압박에 비상대책위원회도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최씨는 "비대위에서 마지막으로 20명이 남아있었는데, 손해배상 소송 금액이 꽤 크게 걸린 업체도 있어서, 소송을 취하해준다는 조건으로 나가게 됐다"고 토로했다.

그렇게 세운공구상가의 한 축이 찢겨져 나갔다. 떠난 상인들은 악착 같이 주변 빈 상가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지 못한 상인들은 폐업했다. 분업체계가 긴밀하게 갖춰진 이곳을 떠나 사업을 영위할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관계자는 "철거된 지역에 계셨던 분 가운데 10%는 폐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청계천을 떠나면 밥을 굶어야 하는데, 가게를 못열어서 창고로 들어간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주물을 만드는 공장 밖으로 이미 철거된 지역의 안전 펜스가 설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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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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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앞축기를 만드는 공장 입구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공기앞축기를 만드는 공장 입구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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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구역도 전면 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중구청에 따르면 세운 3구역은 총 10개 세부 구역으로 나뉜다. 철거가 이뤄진 세운 3-1,4,5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도 전면 철거를 피하기 어려운 운명이다.

세운 3-2, 6, 7 구역은 사업시행 인가를 취득한 상태다. 이 지역은 구청의 관리처분인가만 받으면 철거가 진행된다. 나머지 구역도 사업시행자가 사업시행 인가를 얻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사업 진행이 잠시 늦춰졌다는 사실이다. 올해 초 을지면옥 등 상가 보존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면서, 서울시는 세운 3구역 일대 사업 진행을 잠정 보류했다. 올해 12월까지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12월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는 이미 철거가 되거나, 사업시행 인가가 난 지역에 대해 사업을 취소할 권한이 없다. 그래서 장인들은 답답하다.

"언제 나갈지 몰라 불안해, 이젠 우울증도 왔어"
   
 기름떼가 낀 기계가 멈췄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기계들이 침묵은 직면한 을지로의 쇠락의 모습 처럼 보였다.
 기름떼가 낀 기계가 멈췄다. 요란한 소리를 내던 기계들이 침묵은 직면한 을지로의 쇠락의 모습 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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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와 상패를 만드는 황민석씨는 "사업시행자나 구청이나 무슨 일을 하는지 세입자인 우리에게는 어떤 설명도 없다"며 "요즘 서울시 코디네이터가 나와서 뭘 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를 만난 적은 없다, 언제 나갈지 몰라 불안하니 이젠 우울증이 왔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토지를 팔지 않은 땅주인들도 시행사가 보낸 내용증명 문서를 보고 안절부절하고 있다. 사업시행 인가가 이뤄진 지역의 사람들이다.

이곳에 땅을 갖고 있는 A씨는 "공시지가보다 조금 더 쳐주겠다는데, 그 돈으로는 다른데 가서 전세도 못 얻는다"라며 "툭하면 법원에 공탁을 걸겠다고 하고, 내용증명도 세 번이나 보냈는데,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공구 상가에 남아있는 이들의 소망은 하나다. 지금처럼 장사하는 것. 이영건 사장은 "이곳에 기술장인들이 많이 있다"며 "이렇게 기술 장인이 많은 곳은 서울시 차원에서 보호해야 하는데, 전혀 대책 없이 물러나게만 하니까 좀 그렇다"고 말했다.

자신의 기술에 대해 자부심을 내비쳤던 '장인' 김학률 사장도 최근 상황에 대해 묻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찼다.

"여기가 최후의 보루예요. 가공업체 없어졌지, 칠집(도색)없어졌지, 여기 떠나면 폐업해야지."
   
 을지로 세운공구상가
 오후 6시가 되자 골목골목을 돌아 작은 간판하나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대충 비누로 씻은 손으로 마주 잡은 소주잔을 부딪혔다. 고단하고 지루한 하루를 한잔의 술로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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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경제부 소속입니다. 주로 땅을 보러 다니고, 세종에도 종종 내려갑니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이희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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