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TV에서 방송하는 '시상식'을 시청했다. 상을 주고 받는 일은 본래 즐겁고 행복한 일이지만, 최근 방송사가 주최하는 연말 시상식은 그 성격이 '종무식'에 가까웠다. 그 기준이 '연기'가 아니라 '출석' 여부에 따라 상에 결정되거나 출연한 배우들을 챙겨주다보니 공동수상이 남발돼 상의 권위도 추락했다. 오히려 스트레스만 유발했다. 그 외 여러 영화제도 공정성에 시비가 생길 만큼 신뢰가 떨어져 막상 지켜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백상예술대상'은 예외였다. TV 부문과 영화 부문으로 구성돼 종합적이라는 인상을 줄 뿐더러 TV 부문의 경우에는 지상파 3사와 종편, 케이블을 통합해 그 권위가 매우 높다. 상의 권위가 높기는 영화 부문도 마찬가지다. 대종상이 여러모로 망가지면서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또 공동수상 없이 각 부문별로 한 명에게만 상을 주기 때문에 상의 무게도 각별하다. 한마디로 상다운 상이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1일 진행된 제55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화면. <눈이 부시게>로 TV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배우 김혜자

1일 진행된 제55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화면. <눈이 부시게>로 TV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배우 김혜자 ⓒ JTBC


1일 열린 제55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의 주인공은 김혜자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수상은 손꼽아 기다렸던 선물이었다. JTBC <눈이 부시게>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였다. 김혜자는 한지민과 2인 1역을 맡아 20대 혜자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 혜자를 그려내며 수많은 시청자들을 웃고 울렸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동과 위로를 줬다. 내가 상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꼭 받고 싶었다.

TV 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을 tvN <미스터 션샤인>의 이병헌이, 여자최우수연기상을 JTBC < SKY 캐슬 >의 염정아가 수상하면서 대상의 윤곽은 좀더 명확해졌다. 김혜자가 남아 있었다. 물론 2016년 KBS2 <태양의 후예>, 2018년 tvN <비밀의 숲>의 경우처럼 작품이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TV 드라마 작품상을 tvN <나의 아저씨>가 받은 만큼 <미스터 션샤인>과 < SKY 캐슬 >, <눈이 부시게>가 유력한 후보였다. 

이윽고 시상자 하지원의 입이 열렸다. 긴장되는 순간, 김혜자의 이름이 불렸다. 카메라에 담긴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기쁨, 감격이 뒤섞여 있었다. 무대에 오른 김혜자는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며 수상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시청자들을 좋아해줬던 대사를 다시 한번 들려주고 싶었다며 종이 조각을 꺼내 들었다. 다 외우지 못해 대본을 찢어 왔다는 그의 말조차 감동스러웠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혜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내레이션을 읊어 나갔다. 시처럼 아름다웠던, 삶의 진리를 담고 있었던 대사였다. 수많은 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위로였다. 당시 받았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중간에 말해야 할 대사를 잊었을 때는 '어떡해!'를 연발하기도 했는데,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배우들은 기립한 채 수상소감을 듣고 있었다. 김혜수, 한지민, 염정아, 김민정 등 후배 배우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시청자들의 마음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정우성이 김향기에게 건넨, 진심이 담긴 한 마디
 
 제55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화면. 배우 정우성은 이날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제55회 백상예술대상 방송 화면. 배우 정우성은 이날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 JTBC


"향기야, 너는 그 어떤 누구보다 완벽한 나의 파트너였어."

김혜자의 수상이 꼭 받고 싶었던 선물이었다면, 정우성의 수상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었다. 시상자 문소리의 호명에 그조차도 얼어붙었다. 눈썹을 올리며 '이게 무슨 일이지?'라고 되묻는 듯 보였다.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오른 정우성은 "온당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라며 수상 소감을 이어갔다. 김혜자의 뒤를 이어 상을 받게 된 상황이 부담스러워 보였다. 앞서 김혜자가 보여준 감동이 워낙 컸던 만큼 긴장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정우성은 "너무 빨리 받게 된 게 아닌가 싶다"며 겸손해 했지만, 오히려 너무 늦게 받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배우로서 정우성은 그동안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었다. 얼굴에 가린 연기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영화 <증인>에서 정우성은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아 지우(김향기)와 소통하는 변호사 수호 역을 맡아 진정성 있는 연기를 펼쳤다. 항간에 착한 영화는 흥행할 수 없다는 공식을 뒤엎으며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도 했다. 

그는 무대 아래에서 자신의 수상을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던 김향기에게 진심을 담은 한마디를 건네기도 했다. 김향기는 또 한 번 눈물을 쏟아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영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그림자에 밝은 햇살이 비춰서 앞으로 영화라는 거울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시대가 오길 바랍니다."

'좋은 사람' 정우성의 마지막 말 역시 깊은 울림을 줬다. 

김혜자와 정우성, 백상예술대상이 선택한, 그리고 대중이 선택한 두 배우는 대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상의 무게를 견디고, 그 상을 오히려 빛낼 만큼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수상 소감도 현장의 배우들은 물론 TV를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에게도 잊지 못할 큰 감동으로 전달됐다. 시대를 비추는 배우, 그들의 존재 자체가 큰 위로가 됐던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백상예술대상 김혜자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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