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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형편이 나아지거나 출세를 하면 어려웠던 시절 도움을 받았던 이들에게 신세를 갚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가 아니라 잘 나갈 때 그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북한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고 있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시절과 관련해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 기자말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 107주년을 하루 앞두고 14일 평양에서 중앙보고대회를 열었다. 조선중앙TV가 이날 방영한 보고대회 모습.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 107주년을 하루 앞두고 14일 평양에서 중앙보고대회를 열었다. 조선중앙TV가 이날 방영한 보고대회 모습.
ⓒ 연합뉴스=조선중앙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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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일로, 북한은 그의 사망 3년 뒤인 1997년부터 4월 15일을 '태양절'로 명명하고 매해 기념하고 있다. '정권의 입'이라고 할 수 있는 <로동신문>에선 가끔 '김일성 조선'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김일성=조선, 김일성이 곧 국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북한 연구 권위자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김일성이 곧 북한이라는 나라의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했다. 사실상 김일성을 비롯해 그의 자녀들은 3대째 조선시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려오고 있다.

김일성 도왔다는 '중국인 지주'

김일성 우상화를 통해 그의 만주 항일 유격전은 북한의 신화로 자리잡았다. 신화엔 거짓과 과장이 섞여들어가곤 한다. 그러다 김일성의 말년에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간행되면서 신화를 사실에 맞추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세기와 더불어>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백현 19도구에는 조덕일이라는 중국인 대지주가 있었다. 삼촌이 죽으면서 물려준 유산을 받아가지고 30대에 일약 대부호가 된 사람이었는데 토지를 80여 정보나 가지고 있었다. (중략) 1937년 설준비를 하게 하였다. 인민혁명군의 명의로 된 통고장을 썼다.

통고장이 요구하는 대로 인민혁명군을 도와주자니 일본사람들의 눈이 무서웠고 그 요구를 묵살해 버리자니 혁명군의 징계가 두려웠다. (중략) 나는 지체없이 20여 명의 대원들을 19도구에 내려보냈다. 그때 그들은 수십대의 발구에 600여 말의 쌀과 여러 마리의 돼지 그리고 많은 사탕가루를 싣고 밀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조덕일은 그 후에도 우리에게 여러 번 상당한 양의 원군물자를 보내주었다."


김일성 자신이 화자가 된 이 회고록에서 그는 빨치산 활동 시절, 식량을 조력받았던 조덕일이라는 중국인 지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조덕일은 그뒤 김일성 부대에게 식량을 제공했던 것이 발각돼 일경에게 끌려가 고춧가루 고문을 당하는 등 큰 고초를 겪었다. <세기와 더불어>에선 여기까지만 소개하고 있고, 해방 이후 조덕일과의 인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지주로 잘살았던 조덕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지주 청산'이 시작되면서 장백현 맞은편 북한 도시인 혜산으로 도망쳐 왔다. 김일성은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 지주는 북한에서도 심한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김일성은 조덕일을 처형하거나 중국으로 송환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어려웠던 시절, 일제의 체포 대상이었던 자신을 목숨 걸고 도왔던 조덕일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김일성은 그를 자신의 생일잔치에 가끔 불렀다고 한다. 조덕일에겐 특별배급도 해줬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롤렉스 시계도 선물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를 직접 만난 이들은 '접견자'로 불리며, 자개판에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하사(?)받는 등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사실 북한에서 '화교'는 2년에 한 번씩 영주권을 갱신하는 외국인으로, 차별받는 존재로 살아간다. 하지만 조덕일의 자손들은 대학 입학도 허락받았다. 김일성의 압력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몇 번 식량을 제공한 것치곤 분에 넘치는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조덕일을 두고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중국인이라고 칭찬까지 했다. 

이는 기자가 혜산 출신 탈북민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 탈북민은 조덕일처럼 북한 화교 출신으로, 중국이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중국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전했다. 이 중국인은 북한 거주 당시에도 조덕일 일가와 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마침 조덕일의 손자 중 한 사람이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오면서 이같은 이야기가 남한에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조덕일의 손자는 남한에 잘 정착해 어려운 처지의 탈북민을 도우며 살고 있다.  

"김일성 피신시킨 중국 뱃사공의 손자는..."
 
중국 경박호(鏡泊湖)의 모습.
 중국 경박호(鏡泊湖)의 모습.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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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얘기가 하나 더 있다. 북한 정부 수립 초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 북한정치사 연구자는 김일성이 전투를 벌인 항일전적지를 답사하며 알게 된 사실을 기자에게 귀띔했다.

김일성이 일제를 상대로 치른 전투 중 '경박호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가 있다. 경박호(鏡泊湖, 징보후)는 목단강 상류가 화산 분출 시 용암에 막혀 형성된 자연 호수로, 중국 동북지방의 헤이룽장성과 지린성 사이의 경계에 있다. 발해의 첫 도읍지가 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 반 년 전인 2011년 5월 경박호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로동신문> 2011년 5월 30일자는 "경박호는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의 불멸의 항일무장투쟁 업적이 깃들어 있는 뜻 깊은 곳"이라며 "1934년 11월 200여 명의 일본군 토벌대 놈들을 소멸하고 3정의 기관총을 비롯한 100여 정의 무기를 로획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이 박사는 다음과 같이 얘기를 전했다. 

"경박호 근처 마을에 갔더니 한 젊은 중국인이 북한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하더라. 알고 봤더니 경박호 전투 때 김일성을 자기 배에 태워 호수 한가운데 섬으로 피신시켰던 중국인 뱃사공의 손자였다."

위 신문 기사에서는 김일성 부대가 일본군 토벌대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매복 전투를 벌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위 발언을 보면, 실제론 매복이 아니라 토벌대의 급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박호 전투는 조중이 함께한 첫 공동전투로 기록돼 있다. 이 박사에 따르면, 김일성이 부하들을 먼저 호수 가운데 섬으로 보내고, 자신은 마지막으로 노인의 나룻배에 탔다고 한다. 만약 일본군에 붙잡혔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조선인 빨치산에게 협조한 노인도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권력을 잡은 뒤 김일성이 이 중국인에게 '보은'을 한 셈이다.

이렇게 김일성은 권력을 잡은 뒤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도왔던 이들을 잊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를 갚았다고도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예로 그는 혁명자유가족학원(후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설립해, 부모를 잃고 유랑걸식하던 항일유격대원의 자녀들을 데려와 입학시키고 북한 최고의 엘리트로 키웠다. 고아가 된 뒤 꽃제비처럼 생활하던 이들에게 김일성과 노동당이 보호자가 돼준 것이다. 이들이 나중에 김일성 권력 형성과 북한체제 유지를 위해 누구보다 발벗고 나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김일성이 자신과 막역한 사이였던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의 망명을 추진했던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김일성의 호의로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평양에서 약 13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캄보디아로 돌아간 적도 있다. 최근 BBC코리아 보도를 통해 김일성이 암살당한 적도기니 대통령의 자녀들을 평양으로 데려와 살게 한 것도 알려졌다. 김일성 시대의 북한은 아프리카·남미 등 제3세계 국가들과 폭넓은 외교관계를 다지며 주체사상을 선전하고자 했다. 그 효과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어쨌건 김일성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거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자신이 좋아하고 신뢰했던 사람에겐 아낌없이 베풀며 호의와 의리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김정일이나 김정은에게도 동일하게 관찰되는 품성이다. 

'연좌제',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의 공통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은 지난 1월 24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미고위급회담대표단을 만나 워싱턴 방문 결과에 대해 보고를 받는 모습. 뒤로 할아버지 김일성의 그림이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은 지난 1월 24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미고위급회담대표단을 만나 워싱턴 방문 결과에 대해 보고를 받는 모습. 뒤로 할아버지 김일성의 그림이 보인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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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시대엔 '연좌제'가 광범위하게 적용돼 작은 잘못이라도 포착되면 전 가족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는 일이 많았다. 반면 북한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김정일 시대엔 연좌제가 비교적 완화됐다. 김정일은 측근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이 일단 신뢰를 준 이라면 관대하게 용서했다고 한다. 

일례로,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이영국씨의 사연이 있다. 이씨는 탈북을 했다가 중국에서 한 차례 붙잡혔다. 이후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졌지만 곧 사면받았다. 학자들은 김일성 시대였다면 이씨가 처형당했을 거라고 봤다.

이후 그는 다시 탈북을 시도했고 이번엔 성공해서 서울에 왔다. 1990년대 중반 모 국가 소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 A씨 부부가 남한에 귀순했을 때도 북한의 남겨진 가족은 용서받았다. 후에 인민군 원수가 된 현철해가 그의 삼촌이었다. 현철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김정일에게 보고하자 김정일은 "조카가 남조선으로 간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라며 물러날 필요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단다. A씨의 두 자녀도 현철해가 키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원칙대로라면 A씨의 자녀들은 추방령을 받고 지방으로 가야 하고, 평양에서 살 수 없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어린 시절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봐온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책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2010)에서 김 위원장이 주변 사람을 따듯이 챙기고 배려하는 품성이 어머니 고용희를 닮은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일본으로 식료품을 사러가는 척하면서 탈북한 후지모토는 관대하게 용서했지만, 정작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은 숙청했다. 

김씨 3대가 '경쟁자' 혹은 자신을 반대할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에게 잔혹하게 보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일성 계열의 빨치산파 외엔 북한정치사에서 모두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에서 활동한 연안파, 김일성의 이름 석자를 식민지 조선에 널리 알린 보천보전투에서 함께 협력했던 갑산파, 해방 뒤 소련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입국했던 소련파 등이 모두 숙청당했다. 그중 박헌영·이승엽 등이 이끌었던 국내파가 가장 잔혹하게 숙청당했다. 김일성은 이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계열을 가장 싫어했다고 알려졌다.

김일성이 젊은 시절 약 9년간(1932~1940) 중국 동북지역에서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한 것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보여주는 경력이다. 하지만 이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북한이라는 나라를 안으로부터 잠긴 감옥 국가로 만들었다. 어떤 공산권 국가도 도달한 적이 없는 스탈린주의를 충실히 구현한, 전무후무한 감시 국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늘날 북한은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의 특수한 연구대상감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21세기, 북한 국가 수립 70년이 넘었지만 북한은 고인 물과 같은 강한 보수성과 정체된 의식으로 견뎌왔다. 핵을 머리에 이고, 경제 개발이라는 과제까지 부여받은 북한이 어디로 나아갈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태그:#김일성, #태양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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