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는 인터뷰 내내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답변을 하다가도 갑자기 어떤 생각의 흐름에 따라 옆길로 새 인터뷰 시간이 정해져 있는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뷰의 형식이 파괴됐다. 한석규는 묻지 않은 말로 시작해 끝을 냈다. 기자들은 주로 한석규의 말을 들었다. 한석규 특유의 웅장한 목소리가 인터뷰 장소에 울려퍼졌다. 지난 8일 있었던 이 다소 '특이한' 인터뷰 과정을 통해서 한석규가 생각하는 영화 <우상>과 연기론을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영화 '우상'의 배우 한석규

영화 '우상'의 배우 한석규 ⓒ CGV아트하우스

 
<우상>에서 처음으로 캐스팅이 확정됐던 한석규는 '이 영화가 제작이 될까' 우려했다고 한다. <우상>은 관객들이 따라가기만 하면 설명을 다 해주는 영화가 아니라 같이 추리하는 행위를 기대하는 영화다. 능동적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상>은 시나리오 자체가 인상적인 영화였다. 분위기에 압도된다는 느낌이었고 나는 이것을 인터뷰에서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뭐, 그게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지. (웃음) 또 뭐가 인상적이었냐? 하면 주제가 인상적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영화 속의 은유들을 접하게 됐는데 이수진 감독이 아무런 (투자) 결정이 안 났을 때 내게 먼저 보여주었다. 아주 고마웠다.

연기자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선택당하는 입장이다. 제의를 내게 했고 시나리오를 읽는 도중에 참 정성껏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덮고 '아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한숨이 확 나더라. '하' 하고."


한석규는 실제로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을 쉬고 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던 때가 2017년이었는데 <우상>은 동떨어진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고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한 나라에 관광을 가지 않는 이상 그 나라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영화다. 그 나라에서 만든 영화, 아무 영화가 아니라 그래도 괜찮게 만든 영화, 그 영화를 보면 '아 저 사람들은 저런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구나'를 알 수 있다.

영화는 그 사회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상>은 그것을 이야기한다. 시나리오를 받고서 든 생각이 '이 영화를 하고는 싶은데 이 영화가 제작이 될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왜 이런 투자받기 어려운 시나리오를 썼을까. 충무로에서는 뭔갈 하다가 엎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여튼 이수진 감독이 <한공주>를 개고생하면서 만들었는데 (일동 웃음) 바보가 아닌 이상 두 번째 장편 영화를 왜 이렇게 썼냐는 것이다."

  

'우상' 한석규, 하고 싶었던 역할 배우 한석규가 7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 <우상> 시사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우상>은 아들의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은 남자와 아들이 죽고 진실을 쫓는 아버지, 그리고 사건 당일 비밀은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가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을 통해 해외에서 먼저 공개된 바 있다. 20일 개봉.

배우 한석규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 <우상> 시사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 이정민

 
이수진 감독은 왜 두 번째 장편 영화로 <우상>을 만들었을까? 그는 '반응'(리액션)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건 어떤 반응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는 액션에 정신이 팔렸다가 지금은 리액션(반응)에 정신이 팔려서 한다. 연기라는 것도 결국 반응의 결과다. 연기를 하기로 마음 먹은 것도 주체적인 입장에서 결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어떤 반응(리액션) 때문에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결과물로 연기자가 된 것이구나 싶었다.

리액션이 곧 액션이구나, 그걸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는 것도 곧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구나, 나는 어떤 반응을 하면서 살아갈까. 같은 액션이 들어가도 사람들마다 반응하는 게 다 다르다. 같으면 안 된다. 달라야 한다. 같으면 이상한 사회, 병든 사회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반응하는 걸 강요하고 그래야 하는 사회는 이상한 사회다. 반응이 각양각색이지만, 건강한 각양각색의 반응이 나오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 생각한다."


한석규는 <우상>에서 자신이 맡은 구명회라는 인물도 반응을 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아들 놈이 사고를 쳤다, 그때부터 구명회의 반응이 시작된 것이다. (시체가 있는) 지하주차장 문을 여는 순간부터 '헉, 시체?' '어떻게 된 거야?' '죽었대?'라고 계속 반응하는 것이다. 아주 병든 반응을 하는 것이다. 끝까지 썩은내가 진동하는 반응을 한다.

한 사람이 반응한다는 건 어떤 걸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이지 않나. 그 기준이 무엇인가. 내가 생각했을 때 그 기준은 부끄러움인 것 같다. 그걸 무시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마취가 되는 것 같다. 한 번, 두 번 무시하고 세 번 무시하면 그때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 그 신호를 누가 이야기해줄 수도 없다. 본인이 안다. 내가 안다. 어떤 인생의 갈림길에 놓이는 정도의 선택을 할 때 부끄러움에 신호가 온다. 그걸 무시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선다.

초반부터 구명회는 신호를 무시했다. 지하주차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무시했다. 아들에게 '네가 운전했냐'고 물었을 때 구명회의 리액션은 뭔가? 마누라가 앉았던 욕실에 피가 묻은 걸 보고 난 이후에 차 트렁크를 닦는다. 내가 말하는 게 그저 허구의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는 게 섬찟한 것이다."


"연기를 통해 얻으려는 게 뭔가?"
 

 영화 '우상'의 배우 한석규

영화 '우상'의 배우 한석규 ⓒ CGV아트하우스

 
<우상>을 왜 하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한석규는 '연기를 왜 하는지'까지 확장해서 대답했다. 그가 평소 생각하고 있는 걸 인터뷰를 통해 말로 풀어낸다는 인상을 주었다.

"비겁한 인간을 해보고 싶었다. 이것 역시 반응이지. 내 연기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이 내 모습을 한 번 비겁한 인간으로 생각해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실 내가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용감하게 살고 있는 건가? 안주하는 게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든다.

연기를 왜 하나, 연기를 통해서 뭘 얻으려 하는 것인가, 참 쉬운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다. 아마 많은 젊은이들이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이따위 소리를 하는데 문제는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연기를 처음 어떻게 하게 됐나를 생각해봤다. 고맙게도 부모님이 내게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뭐가 하고 싶은지'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이야기조차 안 했다. 그저 봐줄 뿐이었다."


그저 봐줄 뿐이었던 어머니가 배우 한석규에게는 '우상'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그를 자주 극장에 데려다 주었던 것이 그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물론 부모님께서 그가 훗날 영화배우가 되리라는 걸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내게 우상이란 없지만 내게 영향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봤는데 어머니더라.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이나 반응, 화술 같은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부모는 액션을 하고 자식들은 리액션을 하지 않나.

초등학교 다닐 동안 내내 극장에 많이 갔다. <혹성탈출>을 보는데 눈이 뒤집히더라. 너무 재밌지 않나. 인간의 우매함, <혹성탈출>의 주제가 그것이지 않나. 그걸 당시에도 알겠더라. 영화를 보는 게 훈련이겠다는 걸 느꼈고 또 우리 아이들을 통해서도 느낀다. 영화를 많이 보여주러 다니는데 어떤 영화는 보면서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생각이 바보 같았다. 걔네들은 그 나이대의 수준으로 나름의 해석을 하면서 영화를 본다."

우상 한석규 천우희 설경구 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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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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