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마블 시리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블 코믹북의 팬인 남편을 둔 덕에 몇 편 보긴 했지만, 그냥 보는 것일 뿐이었다. 시리즈의 전후 사정도 전혀 모르며, 심지어 몇몇 캐릭터는 헛갈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전에 보지 못했던 정체성 고민을 하는 여성 히어로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난 통제 속에 싸워왔어"라면서 크리족의 통제장치를 뜯어버리는 장면에서는 뭉클함에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남편은 영화의 자막이 올라간 후 "뭐야. 너무 일방적이니까 시시하잖아"라며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내게 이런 건 중요치 않았다. 한 여성이 그동안의 억압을 인식하고, 자신을 받아들이며, 분노를 힘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비어스에서 캐럴로 다시 캡틴 마블로 재탄생하는 한 여성의 성장 여정을 따라가 본다.
 
억압된 여성 : 비어스
 
영화의 시작 지점. 뛰어난 능력을 갖춘 크리족의 전사 비어스(브리 라슨)는 악몽을 꾼 후 자신을 전사로 키워준 사령관 욘 로그(주드 로)를 찾아간다. 악몽의 두려움을 신체단련과 전투 훈련으로 잊으려는 비어스에게 욘 로그는 "분노를 통제해. 그렇게 감정적이어서는 멋진 전사가 될 수 없어"라고 강조한다. 비어스는 욘 로그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뜨거워지는 손을 주춤하며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압한다. 하지만, 그녀가 안으로 밀어낸 분노는 불쑥불쑥 올라오고 그럴 때마다 다시 "그렇게 감정적이어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듣는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분노하게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과거와 정체감을 찾고 싶은 비어스의 욕구는 무시하고 오직 용맹한 전사로서의 삶만을 요구하는 상황 아니었을까. 하지만, 전사로서의 능력을 떨치고 싶은 비어스는 이런 크리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몽은 잦아질 뿐이다.
 
자신들의 뜻대로 비어스의 삶을 제한하려 하고, 여성성의 특징 중 하나인 감정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 태도. 이는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규정하고, 여성적 특징들을 열등하게 생각해 억압하는 가부장적 태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영화의 초반 아직 자신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는 비어스는 이렇게 가부장제 하에 완전히 억압된 여성이었다. 그토록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직, 남성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처지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다 : 캐럴
 
 캐럴 시절의 캡틴마블

캐럴 시절의 캡틴마블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작전을 수행하던 중 사고를 당한 비어스는 자신이 과거 살았던 행성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악몽 속 기억들을 만난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에 비어스는 엄청난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과거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만나면서, 또한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해주는 절친 마리아 램보(라사냐 린치)와 딸의 도움으로 결국 자신이 캐럴임을 받아들인다.  
 
정체감이 분명해지자, 그녀는 크리족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과거엔 크리족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지 역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캐럴은 여러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녀가 택한 방법은 '비어스'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는 캐럴이야"라고 선언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살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비어스가 캐럴이 되어가는 이 과정은 가부장제에서 대상화되어 있던 여성이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하고 성장해가는 여정과 다름없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를 당당하게 표현하며 한 사람의 주체가 되어 행동할 때, 자신이 숨겨둔 잠재력을 발휘할 힘을 얻는다. 이후의 여정은 이를 증명해 보여준다.
 
잠재력의 발현 : 캡틴 마블 
  
 영화 <캡틴 마블>이 한 장면.

영화 <캡틴 마블>이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픽처스 코리아

 
여성주의 심리학자 미리암 그린스팬은 저서 <우리 속에 숨이 있는 힘>에서 여성이 지금까지 자신이 억압되어 왔음을 깨닫고, 주체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 안의 분노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것이라 했다. 남성에 의해 규정된 시선에 맞추어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마음 안엔 많은 분노가 쌓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순종적이어야만 했고 분노란 여성에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분노를 우울과 슬픔, 무기력 같은 다른 정서로 치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린스팬은 이런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고 이를 잠재력을 발휘할 힘으로 바꾸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받아들인 캐럴은 이제 분노를 힘과 잠재력으로 바꿔 가는 과정을 밟는다. 캐럴은 마리의 딸과 함께 자신의 옷 색깔을 바꾸며 이제 잠재력을 발휘할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억압했던 존재들을 만나 "난 지금까지 통제 속에 싸워왔어"라며 통제 장치를 뜯어내 버리고 분노를 정당하게 표출한다. 

이 지점에서 캐럴은 캡틴 마블로 한 단계 더 성장한다. 그녀는 위기에 몰릴 때마다 더 큰 능력을 획득해 발휘하고, 억압받은 약자들을 구해낸다. 이를 통해 여성의 억압된 분노가 정당하게 표현될 때 어떤 힘이 생겨나는지를 증명해냈다. 또한, 그녀는 영화의 말미 궁지에 몰려서도 "그렇게 분노해서는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충고하는 욘 로그에게 가차 없는 한 방을 먹인다. 이는 감정은 억압하는 게 아님을, 여성적 특징들이 얼마나 힘 있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사실, 당황스러웠고 의아했다. 어떻게 이런 통쾌한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는지.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영화의 흐름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니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는 20대까지 가부장제의 억압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시댁 중심 가부장제를 경험하고서야 내 안의 억울함과 분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40대가 된 이제서야 진짜 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마도 나의 이런 여정이 비어스에서 캡틴 마블로 성장하는 캐럴의 여정과 겹쳐졌기 때문 아니었을까.
 
캐럴, 즉 캡틴 마블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어벤져스 중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힘을 자랑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캐럴이 캡틴 마블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이 세상 많은 여성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였다. 지금 이 땅의 여성들이 자신 안의 분노를 직시하고, 이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해 간다면 어떨까? 캡틴 마블이 그랬듯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송주연 기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캡틴마블 페미니즘 여성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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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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