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타: 배틀 엔젤 포스터

▲ 알리타: 배틀 엔젤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무협지엔 자주 등장하는 규칙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중요한 건 기연이다. 특별할 것 없고, 가끔은 불우하기까지 한 주인공이 절정의 고수를 만나 신비의 무공을 배운다. 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도 큰 도움을 줄 때가 있는데, 대부분은 주인공이 제 안에 든 힘을 깨우치도록 돕는 경우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내공을 비약적으로 키우는 영약까지 복용하게 되면, 어린 시절부터 부단히 무공을 연마한 자도 감히 대적할 수 없다.
 
기연 다음은 출생의 비밀이다. 무협지엔 수많은 고아와 기억상실증 환자가 등장하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귀한 핏줄이다. 물론 개중 상당수는 이미 몰락한 문파와 귀족가문이지만 말이다. 이들의 탄생과 문파 또는 가문의 몰락엔 수많은 사연이 얽혀 있어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보는 맛이 쏠쏠하다.
 
기연을 통해 강해진 주인공은 여러 고난을 뚫고 마침내 제 자리를 되찾는다. 한때는 저와 제 뿌리를 괴롭힌 자들을 몰살시키는 게 유행이기도 했고, 다른 한때는 모두를 용서하고 무림에 정의를 세우는 것으로 끝맺음되기도 했으나, 어찌되었든 정의는 바로 서고 주인공이 영웅이 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무협지가 떠오르는 SF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군중들이 열광하는 폭력적인 스포츠의 장에서 알리타가 영웅으로 떠오르는 과정이 일견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를 연상시킨다.

▲ 알리타: 배틀 엔젤 군중들이 열광하는 폭력적인 스포츠의 장에서 알리타가 영웅으로 떠오르는 과정이 일견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를 연상시킨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알리타: 배틀 엔젤>은 여러모로 무협지가 떠오르는 영화다. 주인공 알리타(로사 살라자르 분)이 기억을 잃은 채 쓰레기장에서 발견됐다는 사실부터, 그녀 안에 어마어마한 힘이 잠들어 있다는 것, 심지어 그 힘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실전된 무술에서 비롯된다는 것까지가 모두 그렇다. 그녀를 구한 건 사이보그 엔지니어 이도 박사(크리스토프 왈츠 분)으로, 그는 알리타가 제 힘을 찾아나가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처음 알리타는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지만, 여러 사건을 겪으며 조금씩 기억을 되찾는다. 그녀는 되찾은 기억을 통해 자신이 지금은 몰락한 전투집단의 일원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동료 대부분이 300년 전 '대추락'이라 불리는 사건 때 죽음을 맞았고, 자신이 그 집단의 유일한 생존자란 사실도 함께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뒤의 미래, 공중에 뜬 도시 자렘과 그곳에서 버린 물건들로 가득한 고철도시가 영화의 배경이다. 자렘은 그야말로 미지의 공간이다. 고철도시의 모두가 자렘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누구도 그곳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고철도시의 모든 등장인물 가운데 자렘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오직 둘 뿐인데, 장애인 딸을 낳아 자렘에서 추방당한 이도 박사 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영화는 자렘을 포함해 아주 많은 것들을 관객에게 내보이지 않는다. 자렘의 실상은 물론, 알리타와 이도 부부의 과거, 대추락의 진실, 자렘의 지배자 노바(에드워드 노튼 분)과 그에 맞서 싸우던 화성연합공화국(URM)의 정체 같은 것 말이다. 이 모두의 정체를 감추고서 영화는 알리타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뒤따른다. 목적지는 당연히 제가 온 곳, 자렘일 수밖에 없다.

<미션> 빼다 박은 <아바타>, <솔저>와 판박이 <알리타>
 
알리타: 배틀 엔젤 기계 몸 안에 깃든 인간의 정신이란 소재는 수많은 SF영화에서 애용하는 설정이다.

▲ 알리타: 배틀 엔젤 기계 몸 안에 깃든 인간의 정신이란 소재는 수많은 SF영화에서 애용하는 설정이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 깨나 본 관객이라면 <알리타: 배틀 엔젤>을 보는 내내 다른 작품을 여럿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기계화된 육체 안에 깃들었다는 점부터 <터미네이터>와 <로보캅>, <공각기동대> <블레이드 러너> 류의 영화가 우선 떠오른다. 전투집단의 일원이던 전사가 쓰레기로 버려졌다 발견되고, 자신을 구해준 이들을 위해 자신을 버린 집단과 맞선다는 이야기는 아예 커트 러셀 주연의 <솔저>를 빼다 박았다. 잠깐만 둘러봐도 SF고전이 여럿 떠오르는 이 영화가 결코 새로운 이야기일 수 없다는 점에는 영화를 본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많은 면에서 새롭다. 기술적인 측면에선 더욱 그렇다. 최첨단 아이맥스 3D 촬영은 물론이고, 주인공 알리타 캐릭터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해 인간 배우로는 해낼 수 없는 영상을 얻어낸 선택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견 실사영화 가운데 만화 캐릭터를 등장시킨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와 <스페이스 잼>, 혹은 CG를 입힌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한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연상하게도 되지만 영상의 완성도에서 차원이 다르다.
 
여러모로 영화는 제작자 제임스 캐머런이 직접 감독한 <아바타>를 떠올리게 한다. 3D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아바타>는, 그러나 영화가 거둔 어마어마한 성취와는 별개로 내용면에선 새로울 것이 거의 없는 작품이었다. 물론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 형편없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예술을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정신으로 이해한다면 <아바타>는 적어도 내용의 측면에서만큼은 훌륭한 예술이 못되는 것이었다.
 
<아바타>는 판도라 행성에서 살아가는 나비족과 이들을 몰아내고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탐하려는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처음엔 침략자로 왔으나 나비족의 편에서 인간과 맞서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는 롤랑 조페의 1986년 작 <미션>과 흡사한 구성으로, 판도라를 남아메리카 오지로 바꾸고 주인공들을 선교사로 치환하면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요컨대 <아바타>는 혁신적인 기술력과 기존에 있는 이야기의 안정된 변주가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점 탐색하기
 
알리타: 배틀 엔젤 알리타 캐릭터는 최첨단 기술력이 집약된 CG 기술을 통해 솜털과 모공, 머리카락 질감까지 그대로 재현해 만들어졌다.

▲ 알리타: 배틀 엔젤 알리타 캐릭터는 최첨단 기술력이 집약된 CG 기술을 통해 솜털과 모공, 머리카락 질감까지 그대로 재현해 만들어졌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이렇게 보면 <알리타: 배틀 엔젤>은 <아바타>와 꼭 같은 성질의 작품이다. 원작인 <총몽> 위에 기존에 존재하는 전형적 서사를 그대로 입혔고, 오직 기술력으로 차별화를 꾀했단 점에서 그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는 하지만, 전형을 답습하는 것과 새 길을 모색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럼에 제임스 캐머런과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목적 역시 분명해진다. 현재의 기술로 이룰 수 있는 극점을 탐색하기, 즉 영화적 실험이다.
 
물론 실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제임스 캐머런 필생의 시도가 될 <아바타> 프로젝트를 위한 것인지, 혹은 비슷한 내용에 첨단 기술 한 스푼을 얹어 상업성을 짐작하기 위한 연습이었는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다만 아이맥스 3D로 구현되는 최첨단 영상이 이야기로 빚어낼 수 있는 감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는 점을 고백한다.
 
제임스 캐머런은 전 세계 영화산업의 최전선에 선 작가다. <알리타: 배틀 엔젤>은 그 스스로 지명한 연출자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함께 작업한 2000억 원짜리 결과물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큰 영화사적 의미를 가진 작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 뒤에 숨은 제임스 캐머런의 의도가 몹시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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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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