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단이(이나영)야. 어떻게 너에 대해 글을 쓸까 고민하다,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 2회 때 네가 네 자신에게 쓴 편지에 힌트를 얻어 편지 형식으로 글을 쓰려고 해. 초면이지만, 드라마 보니 꼭 친구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해서 이리 편하게 말을 건넨단다.

처음에 널 만났을 땐, 그냥 그런 로맨스물의 여주인공인 줄 알았어. <신데렐라>나 <캔디> 같은 동화 속의 주인공 말이야. 힘들게 살다가 왕자님 같은 남자의 도움으로 인생이 쫙 펴지는 그런 캐릭터인 줄 알았지. 게다가 나이 어린 동생 같은 왕자님라니. 예전엔 나이 많은 '오빠'나 '아저씨'들이 여성을 구원했다면 이젠 연하남들도 여성의 구원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씁쓸한 그런 기분이었어.

'경단녀' 내가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

그런데 말이야. 알고 보니 네가 '경단녀(경력단절여성)'더라고. 내가 아이 엄마가 된 후 너무나 무서워했던 그 말. '경단녀'. 이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널 보면서 나도 모르게 널 응원하게 됐단다. 난 말이야, 상담하는 일을 해. 이 일이 하고 싶어서 석사과정에 진학했는데 아기가 생겼어. 아기를 낳고 학업도, 일도 몇 년간 쉬었었어.

<82년생 김지영>에서도 그랬듯, 남들은 '집에서 놀면서 커피나 사먹는' 아줌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난 정말 그 때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냈어. 수면 부족에 아기 띠를 맨 채 밥을 물에 말아 마시듯 먹어야 하는 일상들. 먹고 씻고 자는 기본적인 나의 일상조차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참 힘들었어. 몸만 힘들면 그래도 견딜 만 했을 거야. 불안하고 도태될 것 같고 나 자신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은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

난 그래서 남편이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주말에 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했어. 토요일이면 남편이 아이를 보고 난 상담을 하러 나갔지. 다행히 주말 근무자가 필요한 곳들이 있었고 난 일주일에 하루 일을 했어. 하지만, 계약직 파트타임 자리는 늘 불안했고, 아이가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발달과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스스로 경력을 단절시키고 회복해 가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었어. 사실 지금도 다시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중이야.
 
 결혼 후 11년간 육아와 살림에만 매진했던 강단이(이나영 분)는 재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지만, 경단녀를 환영해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결혼 후 11년간 육아와 살림에만 매진했던 강단이(이나영 분)는 재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지만, 경단녀를 환영해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 tvN

  
육아와 살림을 통해 배운 것들

그래서일까. 어느덧 나는 드라마 속 네가 일터로 돌아가는 모습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어. 그런데 참 화가 나더라. 왜 사람들은 살림하고 육아하고 가정을 돌보면서 자신을 헌신한 일들은 경력으로 쳐주지 않는 걸까? 너도 2회에서 말했잖아. "나 논 거 아니야. 살림이 어떤 건지 알아? 끝이 없어. 그게 살림이야. 니네는 그게 스펙이 안 된다고 하는데 인내 희생 배려 다 배우고, 일이 얼마나 간절한지도 배우는데"라고 말이야.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 나도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그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인내, 희생, 배려 그 중요한 것들을 배웠다고 자부해.

그뿐이니? 엄마로서 갖게 되는 책임감, 아이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 이런 것들이 생기면서 훨씬 더 강해지는 게 사실이잖니. 이런 것들은 보지 않고 단지 직업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거부되는 현실. 1회 한 여성면접관은 네게 이런 말을 건네지. "강단이씨가 우리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죠? 현재의 강단이씨요"라는 질문에 이런 것들을 조목조목 따지며 한 방 먹이고 싶더라고.

네가 회사에서 조직의 부당한 방침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 시키지 않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나서서 해내고 있는 것, 조직의 다른 구성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표 나지 않게 슬쩍 도울 수 있는 센스. 이런 것들은 네가 가정에 헌신하는 동안 배운 가치들에서 나온 것들일 거야. 너의 11년 육아와 살림 경력은 이렇게 멋진 현재의 너를 만든 거야. 그걸 좀 사람들이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로서의 꿈 vs. 한 개인으로서의 꿈

넌 그랬지. 3회 모든 경력을 포기하고 고졸신입사원 신분으로 입사해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도 행복하다면서 은호(이종석)에게 이렇게 말하지.

"사람들이 있잖아. 내 이름을 불러. '재희 엄마' '여보' '제수씨' '엄마' 그동안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나도 이름 있는 사람인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어. 지금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 그게 되게 신기해.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린다는 느낌"

정말 이 장면에서 마음이 얼마나 짠했는지 몰라. 엄마가 되고 일을 쉬는 동안 나 역시도 내 이름이 없어졌었고,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어. 가끔씩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써야 할 때 내가 내 이름을 쓰면서 어색하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어. 엄마들도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정말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해. 지금 이렇게 다시 이력서를 쓰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내 이름 석 자, 그러니까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

엄마라는 호칭 자체가 우리 자신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린 엄마가 됨으로 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 것도 맞아. 네가 6회에 딸 재희와 약속했듯 말이야. 6회에서 새로 시작한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딸 재희의 질문에 넌 이렇게 답하지.

"힘들지, 힘든 건 사실이야. 근데 난 네 엄마잖아. 너한테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정말 안 듣고 싶어. 내가 외할머니한테 그런 말 한 적이 있거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넌 그런 말 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말 안 들어보려고 노력하려고. 재희야 나는 너가 내가 롤 모델이라고 말해줬음 좋겠어. 그런 엄마가 되고 싶어. 너한테."

이 대사가 얼마나 마음에 와 닿던지. 엄마이기 때문에 더 잘 살고 싶고,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정말 공감해. 나도 내 아이가 닮고 싶은 엄마, 훗날 아이가 날 떠올렸을 때 행복한 느낌을 주는 엄마가 되는 게 목표거든. 때문에 어쩌면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육아와 일은 서로 어울릴 수 없다고들 하지만, 엄마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아이의 롤 모델이 되고 싶은 이 목표가 직장에서도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더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된다고 믿어. 이렇게 엄마로서의 목표와 일에서의 목표를 통합시킨다면, 우리는 분명 잠재력을 발휘하고 성장해갈 수 있을 거야.

여성이 잠재력을 발휘하는 세상이 되려면 

육아하고 살림한 경험이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더 성숙한 한 사람이 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게 명백한데도 여전히 세상은 엄마들에겐 너무 가혹한 것 같아.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경단녀는 185만 명으로 2017년보다도 1만5천명이 늘었다고 해. 경단녀가 된 이유는 결혼, 육아, 임신출산 순이었고, 초등학교까지의 자녀가 있는 30대 여성이 전체 경단녀의 48%를 차지했대. 정부에서 '여성 새로 일하기 센터' 등 여러 가지로 여성들의 재취업을 돕고 있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현실은 여전히 힘든 것 같아. 그 이유가 뭘까?
 
 고졸신입으로 경단녀 신분을 감추고 입사에 성공한 단이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하며 일한다.

고졸신입으로 경단녀 신분을 감추고 입사에 성공한 단이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하며 일한다. ⓒ tvN

   
8회에는 고유진 이사(김유미)가 술에 취해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는 장면이 나오지. 이 장면서 고 이사는 과거 웨딩촬영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해. "날 잡아놓고 도망쳤어 내가. 시월드도 무섭고, 애 낳아 키우는 것도 무섭고, 공부도 더 하고 싶고, 일도 더 잘하고 싶고."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대사가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 여전히, 여성은 결혼하면 시댁 우선, 아이 우선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오래된 사고방식. 일상에 퍼져 있는 이런 사고들이 여성의 자아실현과 결혼생활은 양립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 같아. 때문에 여성들 스스로도, 함께 사는 가족들도 마땅히 결혼하면 가정에만 헌신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편견에 갇히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정말 그럴까? 육아와 살림을 통해 배운 지혜가 일터에서 발휘된다면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은 엄청 날 거야. 반대로 여성들이 자신의 꿈과 목표를 가지고 일하게 되면, 아이들에게는 '닮고 싶은' 더 좋은 엄마가 되고, 가정도 더 행복해지겠지.

페미니즘 작가 치아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엄마는 페미니스트>에서 이렇게 말했어. 진정한 평등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의 두 가지 전제는 '나는 똑같이 중요하다'와 '**을 반대로 뒤집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가'라고. '나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아무 조건 없이 나 자신을 중요하게 여겨주는 거야. 남편이, 시댁이, 아이가 중요한 만큼 우리 자신도 중요하게 대해주는 거야. '**을 반대로 뒤집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가'는 남자와 여자를 반대로 뒤집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거야. 예를 들면 이런 거 말이야. 남자는 결혼해서 아빠가 되어도 꿈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여자는 결혼해서 엄마가 되면 이름을 잃어 버리고 개인적인 꿈과 목표를 접어야 한다면 불공평하다는 거지.

일상에서부터 결혼한 여자도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한 명제(남자들에겐 당연한 명제이듯이)로 받아들이고 작은 실천 방법부터 찾아보면 조금씩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또한, 꼭 직장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여성이 존중받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도록 돌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

단이야. 난 2회에서 스스로에게 네가 약속한 것들을 기억해. '업신여겨서 미안하고 함부로 취급해서 미안해. 그래도 웃으면서 잘 견뎠어. 고생 했어 단이야. ……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다시 한 번 찾아봐.' 이 말을 잊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드라마에서 엄마가 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한 경력이 얼마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보여주었으면 해. 나도 너처럼 나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해주려고. 우리가 헌신하는 다른 가족구성원들과 똑같이 우리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드라마를 보니 은호와의 로맨스가 본격화되는 것 같아 조금은 걱정되기도 해. 왕자님 같은 멋진 은호가 주는 안락함에 또 다시 너 자신을 잃어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응원할게. 이 세상의 경단녀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길 바라며. 힘내. 강단이!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에도 실립니다.
로맨스는별책부록 이나영 이종석 강단이 경단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