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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한 독일인에 대한 잘 알려진 유머 하나. 독일인 앞에서 '술 한잔 하자'며 술집에 들어갔다간 딱 술 한 잔만 나누고 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우리에겐 '술 마시며 회포를 풀자' 정도의 의미인데, 독일인은 말 그대로 '술 한 잔'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충실한 것이다.

이런 것도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나중에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는 인사치레도 무심코 건네선 안 된다는 이야기. 우리에겐 '나중에 밥 한 끼 하자' 정도의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인데, 독일인들은 꼭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실천에 옮기고 만다는 뜻이다.

대개는 무뚝뚝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걸 꼬집는 말이지만, 우스갯소리일지언정 실제 독일인들의 원칙적이고 진지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유머라도 허언을 하지 않고, 약속했다면 끝까지 지키며, 공적 가치나 합의된 규범이라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이를 두고 독일인은 재미없고, 딱딱하고, 고지식하다며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생활 태도가 부럽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독일인에 대한 기존의 편견은 별도의 '번역'이 필요하다. 재미없고 딱딱하다는 말은 차분하고 신중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다는 건 준법성이 투철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독일산 제품이라면 틀림없고, 독일인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생겨난 이유다. 돌이켜보면 이번 여행은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겠다는 계획과는 달리 독일인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아 적잖이 불편했지만, 순간 독일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주택가 어디서든 쉽게 보이는 놀이터의 모습인데, 바닥은 죄다 모래고 놀이기구는 울퉁불퉁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 아이들의 놀이터 주택가 어디서든 쉽게 보이는 놀이터의 모습인데, 바닥은 죄다 모래고 놀이기구는 울퉁불퉁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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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만난 독일인들은 하나같이 결벽증이라 할 만큼 시간 엄수에 철저했다.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운영하는 상점들도 스스로 정한 영업시간을 철저히 지킨다. 심지어 청소를 하고 컴퓨터를 켜는 등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부터 엄연한 근무 시간으로 친다.

기차역의 매표소의 경우 주말을 제외하면 대개 오전 8시에 업무를 시작하는데,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정시가 되어야 셔터가 올라간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불도 켜지지 않았던 사무실이 정시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근무 모드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려면 근무자의 컴퓨터가 켜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한다.

북적이는 관광지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독일의 경우 대부분의 관광지가 문을 여는 시각은 대개 오전 10시다. 여름철에 견줘 해가 짧은 겨울철은 오후에 문을 닫는 시간이 두 시간 남짓 빠를 뿐이다. 겨울에 독일을 찾는 여행자라면, 가급적 아침 일찍 서둘러 일정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로 치면 오전 10시는 이른 점심을 먹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다. 독일에선 그때까지 여행자의 발이 묶이는 셈이니, 시간이 아깝고 괜스레 초조해지곤 한다. 시간 좀 벌어보자고 조금 일찍 도착해 매표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굴러보지만, 야속한 근무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특히 일요일에는 이방인 여행자들의 더욱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대도시라면 몰라도 지방의 소도시에서는 기차역과 터미널, 공항 등을 제외하곤 문을 여는 곳이 거의 없다. 병원과 약국은 물론 식당과 카페, 심지어 식자재와 생필품을 파는 마트조차 대부분 쉰다.

만약 업종에 상관없이 24시간 영업이 보편화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그들이 보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딱히 불편해 하는 독일인들은 없는 것 같다. 한 번은 주전부리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문이 닫혀 헛걸음한 뒤, 게스트하우스 관리인에게 근처의 다른 곳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가 이런 '동문서답'을 듣기도 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에요. 필요하면 내일 사세요."

그는 일요일에 마트를 찾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하긴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식당도 일요일엔 쉬는 듯 낮부터 불이 꺼져 있긴 했다. 그는 필요하면 전날 왜 사두지 않았느냐고 되물으며, 일요일에 쓸 물건은 토요일에 미리 준비하는 게 기본이라는 '독일식 상식'을 일깨워주었다. 참고로,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라면 토요일에도 문을 닫는다.

한편, 독일인들의 자연과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야 이미 정평이 나 있긴 하지만, 이방인 여행자들에겐 상당한 불편함을 주는 게 사실이다. 독일 땅을 밟은 이상, 누구든 환경 보호를 위한 불편함을 감수하라는 것 같다. 2022년까지 자국 내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고, 2030년까지 모든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과 운행을 중단하겠다는 독일 정부의 공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지만, 독일에선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비닐 봉투다. 한 달을 살면서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비닐 봉투를 주고받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누구든 장바구니나 가방을 들고 가고, 계산이 끝나면 구입한 물건을 스스로 그러담는다. 계산대의 직원이 하는 일이라곤, 말 그대로 계산뿐이다.

빵이나 과자 등을 담을 때도 비닐 대신 종이봉투를 사용한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가까운 빵집에 들러 식사를 해결하는 독일인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우리로 치면 편의점 같은 그곳에서도 비닐 봉투는 물론, 그 흔한 플라스틱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테이크아웃 커피의 뚜껑과 설탕을 넣어 젓는 막대 정도가 플라스틱 제품일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중국인과 베트남인 등이 '아시안 푸드'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운영하고 있는 패스트푸드점 정도다. 유통이 빠른 즉석 음식인데다 도시락 포장 주문이 많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처럼 여전히 비닐 봉투와 플라스틱 사용에 익숙한 탓 아닐까 싶다. 유독 독일인들이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선 그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분리수거용 쓰레기통이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쓰레기통 안팎이 말끔하게 치워져있다.
▲ 길거리의 쓰레기통 분리수거용 쓰레기통이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쓰레기통 안팎이 말끔하게 치워져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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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과 유리병을 분리수거하는 장치로, 크기와 개수에 따라 현금으로 되돌려준다. 오른쪽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 마트마다 설치된 분리수거기 플라스틱과 유리병을 분리수거하는 장치로, 크기와 개수에 따라 현금으로 되돌려준다. 오른쪽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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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의 입구마다 설치된 분리수거 장치를 통해서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유리병과 플라스틱 등을 분리해 직접 기계에 집어넣으면 용량과 개수를 환산해 현금으로 바로 되돌려주는 시스템이다. 번거로울 법도 하건만, 마트에 갈 때마다 기계 앞에서 재활용품 바구니를 들고 줄 서 있는 독일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표준화된 분리수거함도 이방인 여행자에겐 눈길을 끄는 물건이다. 길거리에도, 버스나 기차의 승강장에도, 심지어 교회나 성당의 출입문에까지도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설치되어 있다. 놀라운 건, 개수가 많아선지, 처리가 빨라선지, 아니면 애초 쓰레기의 발생량 자체가 적어선지, 아무튼 가득 차 있는 분리수거함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1회용품을 비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안내판으로, '지구를 지키자'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 호텔 화장실의 안내판 1회용품을 비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안내판으로, "지구를 지키자"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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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권은 숙소에서다. 저렴한 곳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묵은 숙소마다 화장실 벽에는 '낯선'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지구를 지키자'는 경구와 함께 비누와 수건을 제외한 1회용 물품은 비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온수는 나오나 의심이 될 정도로 난감했다. '혹시 챙겨오지 않았다면, 직원에게 요구하라'는 말이 끝에 적혀 있지 않았다면, 면도는커녕 양치질도 못할 뻔했다.

놓인 물건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워진 화장실을 보는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한 달을 사는 동안 이내 익숙해지긴 했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의 전반적인 물가는 마트에서의 물건 값 정도를 빼곤 비싼 편이다. 특히 호텔이나 식당, 카페 등 서비스 관련 업종이라면 우리 돈으로 환산해 보기가 두려울 정도다.

독일 호텔의 이런 '배짱'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사실, 값비싼 숙박비를 치렀는데 그에 걸맞은 기본적인 서비스조차 받지 못한다는 불쾌감은 어쩌면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여행해 본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는 물론, 유럽의 스페인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푸대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잉'이고 독일이 외려 '표준'일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왜 그런 것 있잖은가. 소비자로서 결제가 끝났으니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 더 이상 돈 들 일 없으니 양치질 할 때도 물을 아예 틀어놓고, 겨울철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보일러의 설정 온도는 최고로 올려놓는 짓을 서슴지 않는 모습 말이다.

화장실 안내문을 보며, 오래 전 함께 근무했던 원어민 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떠올렸다. 그는 '학교의 물건을 내 것처럼 아껴 사용하자'는 표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경험을 들려주었다. 공공의 물건이니 아껴 쓰는 것이지, 자기의 것이면 함부로 할 것 아니냐는 거다. 그때까지 들어보기는커녕 생각해 보지도 못한 해석이었다.

화장실의 안내문은 공공의 재산일수록 아껴 쓰고 1회용품은 최대한 사용하지 말라는 어쩌면 당연한 주문인 셈이다. 숙소에서 매일 제공하는 1회용품을 마땅히 누려야 할 서비스로 생각해온 관행과 무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독일이 세계 최고의 환경 선진국으로 칭송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태그:#독일 여행, #환경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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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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