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스> 메인포스터

영화 <아이스> 메인포스터 ⓒ 마노엔터테인먼트


01.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그리 친숙하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 <쿠르스크>, <레토> 등의 작품이 국내에서 연이어 개봉하고 있는데, 일시적인 현상처럼 여겨질 정도로 일반 관객들이 극장에서 러시아의 작품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되려 인도 발리우드의 영화나 홍콩, 대만의 작품을 훨씬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동안 러시아 영화 산업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역사 속 억압된 분위기다. 러시아 영화는 1900년대 초반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지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겪었고, 이후 레닌을 중심으로 국가의 의도적 선동 아래 러시아 영화는 기록 영화에 편중되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극(Drama)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다큐(Documentary)로서의 작품이 중심이 되다 보니 오락성과 다양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스탈린의 체제 하에서는 더욱 엄격한 제제와 감시가 시행되었다. 이 때는 그 이전에 시도되던 실험적인 모습까지 모두 잃고 마는데,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두 번째 이유는 체제 붕괴 이후의 혼란이다. 1900년대 중반, 스탈린 사망을 기점으로 러시아 영화는 해빙기를 맞이하며 잠시 창작의 자유를 얻는다. 이때 중점적으로 시도되던 것이 러시아 문학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이었으며 이는 영화 산업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국 국민들의 관심을 다시 영화 산업으로 돌리는 계기가 된다. 고르바초프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검열 역시 풀리기 시작하지만, 구 소련 체제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인플레이션과 중산층의 몰락으로 러시아 영화 산업은 빚만 남긴 채로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힘들게 얻은 창작에 대한 자유와 산업의 호황이 이어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최근 러시아 영화 산업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국가 경제 상황과 더불어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개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과거의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탄압과 제제와 관련해서는 최근 개봉한 <레토>의 문제들만 보더라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레토>의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지난해 2017년 8월 영화 촬영 도중 구속, 가택 구금됐다. 극장의 공금횡령 건으로 체포됐는데 이는 명목일뿐 실상은 정치적 탄압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많다.
 
 영화 <아이스> 스틸컷

영화 <아이스> 스틸컷 ⓒ 마노엔터테인먼트


02.

영화 <아이스>는 지난 2018년 러시아 박스오피스 오프닝 스코어를 갈아치우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 2018년 2월 15일 처음 러시아(CIS) 박스오피스 차트에 등장한 이후 6주간 10위권 내 성적을 마킹하며 26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는 2800만 달러를 약간 상회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거의 같은 성적이며, 제작비의 10배를 상회하는 수익을 거둔 결과다. – 그 인기에 힘입어 벌써 속편이 논의 중일 정도로 러시아 작품으로는 이례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올레그 트로핌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CF를 연출하며 이름을 알려온 인물이다. 이번 작품이 영화 감독으로서는 첫 시도였다고 한다. <뷰티 인사이드>를 연출하며 존재감을 알린 백종열 감독과 유사한 케이스다. 백종열 감독 역시 뮤직비디오와 CF를 촬영하다 <뷰티 인사이드>를 통해 처음 연출에 나선 바 있다. 역시 CF 감독의 성향은 어딘가 유사한 부분이 있는지, 백종열 감독의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올레그 트로핌 감독의 <아이스> 또한 의외의 속도감과 스타일 넘치는 영상미로 가득하다. 특히,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만큼 얼음 위에서의 연출이 눈에 띄는데, 러시아를 상징하는 지역과도 같은 바이칼 호에서 진행되는 장면들은 압도적이다.

올레그 트로핌 감독의 데뷔작인 <아이스>는 유일한 조력자였던 엄마를 잃은 소녀 나디아(이글라야 타라소바 역)가 샤탈리나 코치(마리아 아로노바 역)를 만나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국내 최고의 선수 레오노프(밀로스 비코비치 역)의 파트너가 되어 부와 명예를 쌓아가던 중, 마지막 아이스컵 대회를 눈 앞에 두고 심각한 부상으로 더 이상 스케이팅을 할 수 없게 된 나디아. 영화는 그런 그녀가 저돌적인 아이스하키 선수 샤샤(알렉산더 페트로브 역)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하는 과정,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사랑을 그려낸다.

03.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성장과 그 과정에서의 로맨스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극의 서사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나아간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나디아와 레오노프의 공연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수미가 상응하는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작품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이스컵 대회의 나디아와 레오노프의 첫 번째 공연이 영화의 가장 처음에 배치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시점을 전면에 놓음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주인공의 이야기를 암시하며, 후반부 해당 장면에 이르러 동일한 컷이 등장하면 잠시간의 플래시 백(Flash Back)을 일으키도록 유도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사 진행의 핵심은 간략함과 속도다. 한 인물이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정상에 오르며, 그 정상에서 다시 추락해 천신만고 끝에 복귀에 성공하는 모든 과정의 메인 스토리와 하위 내러티브를 90분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러닝 타임 내에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뮤지컬 신'(Musical Scene)이 있다. 일반적인 뮤지컬 영화에서도 뮤지컬 신은 서사의 형식을 압축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특히, 동일한 서사의 반복이 필요한 경우나, 그 과정을 통해 성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때, 혹은 주인공의 심리를 극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때 자주 활용된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초반부에 등장하는 'someone in the crowd'는 전자에 해당되며, 'Audition'과 같은 OST는 후자에 해당된다.

총 다섯 번의 뮤지컬 신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는 주로 반복되는 서사의 압축을 위해 뮤지컬 신이 활용되고 있으며, 특히 어린 나디아가 선수로 살아남기 위해 고된 훈련과 따돌림을 이겨내는 장면이 담긴 첫 번째 장면과 고된 재활훈련을 이겨내고자 하는 나디아의 모습이 담긴 세 번째 장면이 그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아이스> 스틸컷

영화 <아이스> 스틸컷 ⓒ 마노엔터테인먼트


04.

나티아는 첫 파트너였던 레오노프와의 아이스쇼 사고로 척추가 손상되고 디스크 탈출증을 얻게 되면서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나디아와 샤샤의 만남은 이 작품의 1막과 2막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 로맨스와 관련된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 레오노프와 샤샤가 나디아를 만나게 되는 계기는 각각 아이스쇼 파트너 구인과 아이스링크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로맨스와 직접적인 거리는 멀다. 하지만 샤샤는 물론 레오노프 역시 사고 이전 두 사람이 함께 화려한 생활을 만끽하던 시기에 나디아와의 이성적 관계를 잠시 이어가게 되지만, 그 결과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마지막까지 나디아를 지켜내는 샤샤와 그렇지 못하는 레오노프다.

두 사람의 차이는 대상을 대하는 모습에서부터 드러난다. 투박하기는 했지만 존재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샤샤와는 달리 레오노프는 언제나 자신의 목적이 우선이었다. 나디아가 큰 부상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는 물론, 복귀에 성공한 뒤에도 그는 나디아 그 자체보다 자신의 아이스컵 우승을 위한 파트너로서의 나디아만을 생각한다. 그와 다시 함께하게 된 나디아를 두고 "레오노프 선수의 마지막 아이스컵 여정에"라고 설명되는 인터뷰 대사만 보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지점에 방점이 놓여 있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 나디아와 샤샤가 보여주는 로맨스의 내러티브에는 전체적으로 전형적으로 여겨질 법한 구석이 많은 편이다. 특히 샤샤와 레오노프가 한 쪽에서, 나디아와 코치가 또 다른 한 쪽에서 서로를 놓아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교차하며 제시되는 지점부터는 상당히 고전적인 구조로 진행된다. 두 사람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가 압축된 이 작품의 네 번째 스코어가 그 지점의 문제를 잠시 해소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방식을 따라 흘러간다.
 
 영화 <아이스> 스틸컷

영화 <아이스> 스틸컷 ⓒ 마노엔터테인먼트


0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전형성이 단순한 신파로 변질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 녹아 있는 나디아의 성장 내러티브가 의외로 탄탄한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간략함과 속도감 있게 전개하기 때문이다. 극의 마지막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마지막 연기를 펼치는 나디아와 샤샤, 두 사람의 모습은 – 이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뮤지컬 신이다. – 전형적인 해피 엔딩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가슴 속에 일렁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 작품이 러시아 전역에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형성과 감동이 함께 이끌어낸 그 뭉클한 감정 때문인 듯 싶기도 하다. 체조와 빙상 종목에 큰 관심을 아끼지 않는 나라에서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도 탁월했고, 성장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함께 잘 이끌어낸 것 또한 매끄러웠다. 위기마다 나디아의 곁에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코치의 모습은 그 동안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바 있었던 멘토의 표준과도 같다. 적합한 요소의 적절한 배치와 영리한 연출이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의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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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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