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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 내리면 언뜻 군사시설처럼 느껴진다. 역이 아니라 전투기 격납고 같은 모습이다.
▲ 라이프치히 기차역 모습 기차역에 내리면 언뜻 군사시설처럼 느껴진다. 역이 아니라 전투기 격납고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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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행자의 하루는 철도청(DB) 표시가 적힌 기차역이나 지하철역 매표소에서 시작된다. 1일권을 구입하기 위해서다. 역마다 자동발매기가 설치돼 있긴 하지만, 독일어로만 표시된 곳이 많아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독일의 교통비는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동선 등 여행 계획을 잘만 세우면 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다. 1일권이 큰 도움이 되는 이유다. 많은 도시에서 지하철과 트램, 버스 공용 1회권 가격이 2.5유로(한화 3200원 안팎) 정도인데, 하루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1일권 가격은 7유로(한화 9000원 안팎) 남짓에 불과하다.

세 번만 이용해도 남는 장사인 셈이다. 더욱이 어린이나 청소년을 동반한 5명 이내의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경우라면 할인 폭이 더 크다. 베를린의 경우, 가족 1일권 가격이 19.9유로(한화 2만 5000원 안팎)이며, 시내에서 20km 남짓 떨어져 있는 포츠담 등 교외까지 갈 경우에도 1유로 정도만 추가하면 된다.

문제는 사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구입 절차가 까다롭다는 뜻이 아니라 매표소 안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서다. 순번표를 뽑아 대기하는 건 우리와 다를 바 없는데, 업무 처리 속도가 우리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매표소 직원들은 전반적으로 느긋했다. 창구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하거나, 일하다 말고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손님들은 순번표를 든 채 줄 서 있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왕은 없다
 
베를린의 지하철은 역이든 객차든 좁고 낡았다. 그런 곳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사진 속 객차는 'S반'으로, 'S'는 도시 내부를 운행한다는 의미고, '반(bahn)'은 독일어로 기차라는 뜻이다.
▲ 베를린의 지하철 베를린의 지하철은 역이든 객차든 좁고 낡았다. 그런 곳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사진 속 객차는 "S반"으로, "S"는 도시 내부를 운행한다는 의미고, "반(bahn)"은 독일어로 기차라는 뜻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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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운 건, 손님들 그 누구도 서두르거나 다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같으면 대번 손님들이 창구에 몰려가 항의를 하고 사달이 났을 법한데, 독일에선 직원이나 손님 모두 여유롭다. 대기인수가 다섯 명이라는 순번표를 뽑고 나서 무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적도 있다.

독일에서 손님은 '왕'이 아니다. 직원이든 손님이든 근무 시간에 맞춰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더 하려고 하지도 않고, 더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듯 둘이 만나는 어디에서건 한가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1분 1초가 아까운 여행자들이야 발을 동동 구를 테지만 말이다.

독일은 자타공인 철도교통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손꼽힌다. 벤츠와 베엠베(BMW), 아우디와 폭스바겐으로 대표되는 명실공히 자동차의 대국이지만, 교통 체계만큼은 철저히 기차 중심이다. 혹자는 독일에서 자동차는 '생필품'이나 '신분증' 역할만 할 뿐, 실질적인 독일인들의 발은 기차나 지하철, 트램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도시를 잇는 고속열차와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 열차가 수시로 다녀 이동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대도시에는 지하철과 트램의 노선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고, 지방의 소도시에서도 트램을 이용하면 웬만한 관광지는 다 찾아갈 수 있다. 게다가 타고 내리기까지 편리해 이런 나라에 굳이 자동차가 필요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독일의 모든 기차역과 지하철역, 트램의 승강장에는 개찰구가 없다. 역 건물이라 해봐야 앞뒤로 모든 트인 공간이어서 안팎의 구분도 없다. 언뜻 모든 사람들이 무임승차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입구에 매표소도 있고, 승강장에 자동 발매기가 설치돼 있긴 하지만, 끊지 않고 승차해도 당장 문제될 게 없어 허술하게 여겨질 정도다.

객실 내에서 승차권 검사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한 달 동안 대중교통을 수도 없이 이용했지만, 고속열차를 제외하곤 검사를 받은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나마 프라이부르크나 포츠담 등 지방 소도시의 버스와 트램 안에서 경험했을 뿐이다. 검사원은 제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검사를 시작하는데 언제 다 확인하나 싶을 만큼 꼼꼼하고 느리다.

하지만 돈 몇 푼 아끼자고 무임승차를 일삼는 뻔뻔한 독일인들은 없다고 한다. 한 달 동안 눈앞에서 검사원과 승객 사이에 실랑이가 일어난 경우를 본 적도 없고, 무임승차 문제가 독일 사회의 이슈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이는 법과 규범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독일인들의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매일 승강장에 설 때마다 '신뢰가 없는 사회에선 도입하기 힘든 시스템'이라며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철도청과 시민 사이에 구축된 신뢰가 전국의 역을 앞뒤로 막고 개찰구를 세우고 승차권을 통과시키고 객실 내에서 재확인하는 데 드는 엄청난 비용을 절감시켜 주는 셈이다. 우리나라라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며 갈등만 무성할 테지만, 아무튼 부러운 모습이었다.

보호자와 함께 열차 타는 반려견들
 
객차 내부 벽에 반입 금지 물품을 표시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생활한 한 달 동안 반려견을 금지한 지하철은 보지 못했다.
▲ 지하철 반입 금지 물품 객차 내부 벽에 반입 금지 물품을 표시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생활한 한 달 동안 반려견을 금지한 지하철은 보지 못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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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 내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낯선 풍경이 있다. 붐비는 출퇴근길 객실 내에서조차 자전거와 반려견이 쉽게 눈에 띈다는 점이다. 객실에 음식물은 반입할 수 없지만, 개는 태울 수 있다는 게 이방인 여행자의 눈에는 무척 당황스럽다. 실제로 곰만 한 크기의 개와 나란히 앉아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

독일에선 고속열차에도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곳이 따로 마련돼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바다. 그만큼 자전거 이용자들이 많다는 뜻일 테지만, 반려견의 대우에 견줄 바는 못 된다. 도시 내 지하철과 트램의 객실 출입문 입구에는 '반입 가능 대상'을 스티커로 붙여놓았는데, 자전거를 금지시킨 경우는 종종 봤어도 반려견 동반을 막는 경우는 보질 못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반려견의 배설물 자국은 없다. 훈련이 잘 된 탓인지는 모르지만, 반려견 동반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다면 대중교통이 그들을 허용했을 리 없다. 동물의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반려견을 키우기는커녕 다가서는 것조차 께름칙하지만, 반려견조차 나름 대우를 받는 곳이라면 하물며 그들의 보호자인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기본적인 독일어를 모르면 기차를 이용하는 데 다소 불편하다. 도시의 이름은 물론 안내판도 승차권도 죄다 독일어로만 적혀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진 속 'Flugh'는 'Flughhafen'의 줄임말로, 공항이라는 뜻이다. 'Airport'를 병기하지 않은 그들의 배짱(?)이 놀랍다.
▲ 독일 기차엔 오로지 독일어만 있다 기본적인 독일어를 모르면 기차를 이용하는 데 다소 불편하다. 도시의 이름은 물론 안내판도 승차권도 죄다 독일어로만 적혀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진 속 "Flugh"는 "Flughhafen"의 줄임말로, 공항이라는 뜻이다. "Airport"를 병기하지 않은 그들의 배짱(?)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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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베를린의 지하철에 대해 흉 아닌 흉 좀 봐야겠다. 명색이 독일의 수도를 사통팔달 관통하는 동맥인데,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객실이 좁고 낡고 허름하다. 객차와 객차 사이에 통로가 없는 건 기본이고, 키 큰 이들이라면 머리가 닿을 정도로 객실 천정이 낮다. 평행하게 놓인 좌석에 앉아 다리를 뻗으면 가운데로 사람이 지나갈 수조차 없다.

객차의 출입문과 승강장의 높이가 맞는 지하철역이 드물고, 철로와 바퀴가 부딪히는 소음이 유난히 크다. 덩달아 지하철역도 비좁아 승강장에 서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언뜻 지하철역이 아니라 방공호 같은 군사시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두세 노선이 교차하는 결절점이라면 역끼리 연결 통로가 있기 마련인데, 갈아타기 위해 아예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역도 있다. 안내판은 죄다 독일어로만 써 있는데다 동선 역시 그렇듯 복잡하니 이방인 여행자들에겐 여러모로 불편하다. 모르긴 해도, 건설된 후 한 번도 손보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된 듯하다.

따지고 보면, 독일은 낡은 것투성이다. 현대적 감각의 예술 작품처럼 지어진 최신 건축물을 제외하면 새뜻한 게 별로 없다. 내로라는 자동차 브랜드를 지닌 나라라지만, 거리에 돌아다니는 자동차들을 보면 솔직히 굴러갈까 싶은 것들이 부지기수다. 오래된 디자인의 소형차가 대부분인데다 휠은 녹슬었고 페인트는 벗겨져 있다.

자전거도 그렇다. 한껏 멋을 낸 젊은 독일인이 족히 20년은 더 돼 보이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봄과 가을에는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여름과 겨울은 더위와 추위를 핑계로 못 타고 베란다에 처박아둔 내 자전거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낡고 오래된 물건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건, 건물이든, 기차든, 자동차든, 자전거든 그만큼 독일 제품의 견고함을 자랑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인들의 몸에 밴 검소한 생활습관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유명 관광지를 찾아가지 않고, 그저 기차나 지하철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태그:#독일 여행, #독일 기차, #베를린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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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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