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약왕> 스틸 컷.

영화 <마약왕> 스틸 컷. ⓒ (주)쇼박스

 
영화 <마약왕>이 관객 186만 명을 모으는 데 그치며 스크린에서 내려왔다. 언제나 송강호 영화가 나오면 개봉하는 주에 봤다. 이번에도 지난해 12월 19일 개봉한 직후였던 23일 집 근처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극장은 꽉 찼다. 시사회로 인해 개봉하기도 전에 영화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나도는 요즘이다. 혹평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영화 끝부분이 질질 끄는 감이 있어 안타깝기는 했어도, 내게는 재미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주변 사람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혹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에겐 '재미없다'는 이야기였다.

송강호의 사랑 이야기

얼마 전에 나는 영화 <푸른 소금>에 대한 리뷰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송강호의 몇 안 되는 흥행하지 못한 영화이자 혹평 받은 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좋아한다. 벌써 열 번은 봤을 거다. 영화를 리뷰하면서, 내가 이 영화를 왜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적이 동지로, 그리고 동지가 적으로 변하는 이야기. 그 두 가지가 이 영화에는 모두 등장한다.

만듦새가 조금만 더 세련되었다면, 정말 명작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전부터 이 영화를 정말 좋아했다. 왜냐고? 송강호의 로맨스 연기다.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송강호는 여러 번 로맨스 연기에 도전했다. 송강호의 첫 주연작 <반칙왕>에서부터 등장하지 않는가. 상대 배우는 장진영이었고, 장진영이 송강호를 짝사랑하는 관계였다. 송강호가 다른 여자를 짝사랑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장진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 YMCA 야구단 >에서는 김혜수와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독립운동가 민영환의 유서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는 장면이다. 낭독자는 유서 대신 이호창(송강호)의 러브레터를 가져왔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장면이지만, 러브레터 내용이 해당 장면과 묘하게 어울리면서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연출한다. 마치 셰익스피어 희극 <십이야>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유쾌하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

영화 <박쥐>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송강호의 가장 강렬한 로맨스 연기는 역시 <박쥐>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태주(김옥빈)로 놓고 봐도 충분히 해석할 수도 있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상현(송강호)의 고뇌다. 신앙과 동정심으로 태주를 구했으나,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숙제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무한한 욕망을 상현은 죽음으로 제거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화를 내기도 하지만, 태주는 그의 결정에 따른다. 둘이 함께 마지막을 맞는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기괴한 미장센만 아니었어도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지 않았을까. 송강호라는 배우의 내면을 이렇게까지 깊게 관찰한 영화가 있을까. 더구나 그것이 로맨스라니.

'송강호의 첫 로맨틱 무비'라고 광고를 했던 영화는 <밀양>이다. 은밀한 햇빛,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된 한 여인 이신애(전도연). 그녀의 곁을 조용히 지켜주는 김종찬(송강호). 조용히 지켜보다가 다가와서 거울을 들어주는 송강호의 모습, 그리고 거울에 비친 전도연의 모습. 스크린에서조차 따스함이 묻어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를 지켜온 비밀스러운 햇빛이 화면 가득 차오르는 것 같다.

그의 모든 영화가 최고다

흥행 보증수표라고는 해도, 그의 영화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남극 일기>는 시장에서 외면 당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의 흥행 실패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반부의 기괴한 설정과 결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납득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내가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 둘 지쳐가는 대원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도달불능점만을 바라보고 온 탐험대장 최도형(송강호)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하루의 행군을 마치고 곤히 자는 대원들. 홀로 깬 최도형은 조용히 통신장치의 뚜껑을 연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을 떼어내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우두둑 우두둑. 칩을 씹어 파괴하는 최도형. 그는 잠시 씹는 걸 멈추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것들, 그러니까 주제와 갈등은 물론, 결말에 대한 복선까지를 전부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다.

<우아한 세계>는 누군가 '송강호 종합선물세트'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송강호에게 기댄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유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가족이 보내온 영상을 보면서 라면을 먹다가 집어던지고, 다시 주섬주섬 정리를 하는 마지막 장면은 역대급 엔딩의 하나로 손색이 없다.

<변호인> 역시 배우 송강호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영화다. 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한 한줄 평을 '송강호라는 거인의 사자후'라고 표현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을 외치는, 그 눈물 나는 장면만을 의미한 것은 아닐 거다. 곽도원을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호연이 있었지만, 이 거대한 영화, 그 뜨거운 에너지를 이끌고 가는 것은 결국 송강호라는 거인의 어깨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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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영화 <밀정>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밀정>의 법정 장면 역시 기억에 두고 남는다. 황옥 경부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고, 아직까지도 기록에 남아 있는 그 재판 장면이 어떻게 재현될지 정말 기대가 많았다. 영화가 결말부를 너무 길게 끌고 간 점은 아쉽지만, 억울한 듯 눈물을 흘리며 '김우진(공유)은 동료도 친구도 아닙니다'라고 울부짖는 그 장면은, 송강호라는 배우의 프로필 장면으로 써도 좋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예스러운 도시의 야경, 그 불빛들 사이에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추는 아름다운 화면, 루이 암스트롱의 정겨운 노랫가락에 대비되어 하나 둘 스러져가는 우국지사들의 모습이 아스라이 전개되는 명장면도 기억에 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결국 재판 장면이다. 별다른 기법도, 감미로운 음악도 없는 이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가 뭐겠는가.

시너지를 끌어내는 배우

배우 류수영은 지난 2015년 SBS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에 출연해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변호인>을 꼽았다. 이 영화에서 류수영이 등장하는 장면은 다 합쳐서 3분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류수영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사회의 수많은 방관자들은 그의 입을 빌려 행동하지 않는 자신들을 변호한다. 짧지만, 그의 한 마디는 영화를 빛나게 했고, 동시에 배우 류수영을 빛나게 했다.

송강호와 함께 영화 찍는 그들은, 내 입장에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을 만큼 부러운 이들이다. 단순히 배울 것이 많다든가, 흥행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분량을 어떻게 가져가게 될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들은 아마도 인생 최고의 순간을 영상으로 남기게 될 것이다.

나는 배우 천정명에게 최고의 영화는 <푸른 소금>이라고 생각한다. 은퇴한 보스 송강호를 정말 가족처럼 챙기는, 현역 보스 천정명. 그가 여느 때처럼 보스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런데 송강호는 신세경과 함께 있다. 송강호는 인터폰에 대고 말한다.

"왜?"

벙찐 천정명의 대답이 이어진다.

"예?"

여느 때처럼 문을 열지 못하는 송강호. 송강호의 짧은 의문문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천정명. 정말 절묘하지 않은가. 단순히 웃기는 장면이 아니다. 두 사람의 신뢰의 깊이, 그리고 천정명의 천진난만함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짧은 장면이다. 이보다 매력적인 천정명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해일은 스스로도 엄청난 배우다. 하지만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그 대사는 송강호뿐 아니라 박해일에게도 트레이드마크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영화 <사도>의 한 장면. ⓒ 쇼박스

 
뒤주의 안과 밖이라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속을 터놓는 부자의 회한. <사도>의 그 장면에 송강호의 허스키한 영조 목소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송강호의 목소리는 원래 하이톤이다. <사도>가 배우 유아인을 크게 성장하게 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엎드린 유아인을 지나쳐가는 송강호, 그 포스터에서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영화 교과서에 나와야 할 것 같은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장면은 또 어떤가. 무겁게 깔리는 음악, 사냥개들이 컹컹거리는 가운데 공기를 찢고 나타나 느린 화면 위로 다가오는 패거리들. 그 사이에 야심만만 한 미소를 띠고 등장하는 이정재의 카리스마. 거기에 '관상가 양반'의 내레이션이 없었다면 이 장면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완성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윤태구(송강호)를 속여 지도를 탈취하려는 아편굴 주인으로 등장한 손병호도 기억에 남는다. 잠시 동안의 등장이지만, 극중극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아주 예외적인 모범 사례다. 오랜 관록의 배우 손병호의 최고 연기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의 탈을 쓴 아편굴 주인이다.

송강호라는 상대역이 없었다면 배우 김상경이 <살인의 추억>의 서태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가 감독 데뷔를 했다면 충무로의 여러 감독이 밥줄을 잃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신뢰의 계좌

스티븐 코비는 '감정 계좌'라는 말을 들어 인간관계를 이야기한다. 평소에 신뢰가 쌓인 관계는 한두 번의 실수로 무너지지 않는다. 둘 사이에 형성된 감정 계좌에 아직 충분한 신뢰가 남아 있기 때문에, 한두 푼쯤 빠진다고 해서 계좌가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다.

<마약왕>은 아쉬운 영화다. <하울링>과 함께 송강호 영화 중에서 빼먹어도 되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하지만 내게 배우 송강호의 신뢰 계좌는 아직도 차고 넘친다. 그의 다음 번 영화도, 나는 개봉 첫 주에 누구보다 빨리 찾아가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믿고 본다는 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송강호를 믿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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