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손흥민(토트넘 핫스퍼)의 존재 유무는 차이가 컸다. 2019 아시안컵 조별리그 2차전까지 약체 필리핀과 키르기스스탄을 상대로 1-0 승리에 그쳤던 한국은 이탈리아 출신의 명장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이끄는 중국을 2-0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비행시간을 포함해 48시간도 쉬지 못하고 선발 출전한 손흥민은 경기 88분을 소화하며 전반 선제골 페널티킥을 유도했고 후반에는 김민재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만점 활약을 펼쳤다.
 
기뻐하는 김민재 16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알 나얀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중국의 아시안컵 조별리그 C조 3차전에서 헤더슛으로 두번째 골을 넣은 김민재가 손흥민, 황인범과 기뻐하고 있다.

▲ 기뻐하는 김민재 16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알 나얀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중국의 아시안컵 조별리그 C조 3차전에서 헤더슛으로 두번째 골을 넣은 김민재가 손흥민, 황인범과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손흥민의 합류로 공격력이 살아난 것도 고무적이지만 조별리그에서 1실점도 허락하지 않은 수비 조직력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일찌감치 한국축구를 이끌 대형 센터백으로 주목 받았던 김민재(전북 현대)는 조별리그에서 탄탄한 수비와 함께 헤더로 2골을 기록하며 '골 넣는 수비수'의 계보를 잇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을 기점으로 더욱 노련한 수비수로 거듭난 김영권(광저우 헝다)도 손흥민 합류 전까지 주장 완장을 차며 선수단을 잘 이끌었다.

사실 김민재, 김영권, 이용(김문환), 홍철(김진수)로 구성된 4백 라인은 대회 전부터 예상 가능했지만 한국 수비의 최후방을 지키는 골키퍼 경쟁은 조별리그 첫 경기의 선수명단이 발표될 때까지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조별리그 3경기를 치른 현재 2019 아시안컵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는 어느 정도 정해진 듯하다. A대표팀 생활 7년 만에 드디어 빛을 보고 있는 김승규(비셀 고베)가 그 주인공이다.
 
인터뷰하는 김승규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의 김승규가 13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뉴욕 대학교 육상경기장 그라운드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인터뷰하는 김승규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의 김승규가 13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뉴욕 대학교 육상경기장 그라운드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조용하지만 묵묵히 성공적인 J리그 생활 이어가는 김승규

울산 출신의 김승규는 울산 현대의 유스팀 현대중학교 시절부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울산과 프로 계약을 맺으며 주목 받았다. 물론 당시 울산의 주전 골키퍼는 국가대표 출신 김영광(서울 이랜드)이었기 때문에 입단 초반부터 많은 경기 출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프로 구단에서 쟁쟁한 선배들과 체계적인 훈련을 하며 얻은 노하우는 유망주 김승규에게 아주 값진 경험이었다.

2012년까지 김영광에 가려 백업 골키퍼에 머물러 있던 김승규는 2013년 김영광이 부상을 당한 틈을 타 울산의 주전 골키퍼로 도약했다. 2015년까지 3년 동안 울산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김승규는 2016 시즌을 앞두고 J리그의 비셀 고베로 이적했다. 비셀 고베는 과거 김도훈, 하석주, 최성용, 김남일, 정우영(알 사드) 등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했던 팀으로 한국의 축구팬들에게도 비교적 익숙한 구단이다.

사실 많은 연봉을 주는 중국이나 중동의 경우엔 자국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골키퍼 영입이 금지돼 있다(이는 K리그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외국인 골키퍼를 제한하지 않는 J리그는 울산과 김승규에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현재 J리그에는 김승규 외에도 김진현(세레소 오사카), 권순태(가시마 앤틀러스), 정성룡(가와사키 프론탈레) 등 전·현직 국가대표 출신 한국인 골키퍼들이 대거 활약하고 있다.

2016 시즌 전반기까지 생애 첫 해외리그에 적응하지 못해 다소 고전했던 김승규는 후반기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전기리그 12위였던 고베의 순위를 7위까지 끌어 올렸다. 김승규는 이적 첫 시즌부터 J리그 사무국에서 선정한 '2016 J리그 우수선수상' 골키퍼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그 해 J리그 우수선수상 수상자 33명 중 한국 선수는 김승규가 유일했다.

김승규는 작년 시즌까지 고베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성공적인 해외 리그 생활을 이어갔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감바 오사카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던 황의조처럼 김승규 역시 J리그에서 묵묵히 좋은 커리어를 쌓고 있었다. 특히 페널티킥 방어만큼은 '레전드' 이운재(중국 U-25 대표팀 골키퍼 코치)도 인정할 만큼 한국 골키퍼들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정성룡-김진현-조현우에 밀렸던 2인자 설움, 아시안컵으로 훌훌

김승규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프로구단과 계약했던 '특급 유망주' 출신답게 어린 시절부터 연령별 대표팀에도 꾸준히 선발됐다. 2007년 U-17 월드컵과 2009년 U-20월드컵에서 주전골키퍼로 활약한 김승규는 한국의 차세대 골키퍼로 순조롭게 성장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정성룡이 와일드카드로 합류하며 엔트리에서 제외됐지만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 병역 혜택까지 받았다.

하지만 연령별 대표팀 생활을 끝내고 A대표팀에 올라온 후 김승규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경험 많은 정성룡에게 주전 자리를 내어주고 벨기에와의 마지막 경기에만 선발로 출전했다. 2015년 아시안컵에서는 김진현이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신임을 얻으며 다시 백업으로 밀려났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갑작스럽게 스타로 등극한 조현우(대구FC)에게 밀려 한 번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실점 위기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11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알아인 하자 빈 자예드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2차전 키르기스스탄과의 경기에서 김승규가 공을 잡아내고 있다.

▲ 실점 위기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11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알아인 하자 빈 자예드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2차전 키르기스스탄과의 경기에서 김승규가 공을 잡아내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게 오랜 기간 대표팀의 2번째 골키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디던 김승규는 파울루 벤투 감독이 선임되면서 다시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9월 7일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클린시트(무실점)로 한국의 2-0 승리를 이끌었고 10월 2일 우루과이전에서도 주전으로 출전해 안정된 경기 운영을 선보였다. 실제로 김승규는 벤투 감독 부임 후 7번의 평가전에서 4번 선발 출전하며 '월드컵 스타' 조현우와의 주전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벤투 감독 부임 후 자신감을 부쩍 끌어 올린 김승규는 이번 아시안컵에서도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주전으로 출전해 무실점을 기록했다. 물론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조별리그 3연속 클린시트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만 김승규는 3경기에서 상대가 때린 7개의 유효슈팅을 모두 여유 있게 막아냈다. 중국전에서는 상대의 전방 압박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수비수들과 노련하게 공을 주고 받으며 중국의 압박을 무력화시켰다.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리그 한국과 중국의 경기를 앞두고 13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뉴욕 대학교 육상경기장에서 김승규와 조현우가 몸을 풀고 있다.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리그 한국과 중국의 경기를 앞두고 13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뉴욕 대학교 육상경기장에서 김승규와 조현우가 몸을 풀고 있다. ⓒ 연합뉴스

 
골키퍼는 한 번 주전으로 낙점되면 부상 변수 등을 제외하면 대회 기간 내내 좀처럼 교체되는 일이 없다. 따라서 김승규 역시 토너먼트에서도 한국의 골문을 지킬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토너먼트에서 만날 상대들은 조별리그에서 붙었던 팀들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김승규가 토너먼트에서도 조별리그 같은 안정된 경기 운영과 빠른 판단력을 선보인다면 2019 아시안컵은 김승규와 한국축구에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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