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토리> 한 장면

SBS <뉴스토리> 한 장면 ⓒ SBS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하드 드라이브의 음악을 꺼내 듣는 것보다 더 큰 참여감을 주고, 궁극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레코드판이 꽂힌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디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행위, 그리고 레코드판의 표면을 긁는 듯한 음악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직전 1초 동안의 침묵.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손과 발과 눈과 귀, 심지어 (레코드 표면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가끔은 입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감각을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레코드판이 주는 경험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재미있는 경험이다."

데이비드 색스가 쓴 책 <아날로그의 반격> 서문의 일부다. 뼛속까지 디지털로 대변되는 시대에 왜 아날로그인가를 설파한 저자는 턴테이블과 필름 카메라에 열광하는 10대들을 그의 사례로 들고 있다. 초연결로 대변되는 시대,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은 되레 LP판을 찍어내는 공장이 다시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을 정도로 아날로그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필름카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싶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2일에 방영된 SBS <뉴스토리> '뉴트로에 빠진 청년들, 그들은 왜?' 편에서는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일컫는 이른바 '뉴트로(New + Retro)'에 열광하는 청년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왜 아날로그에 빠져들고 있는 걸까. 그들의 행동과 생각들을 조심스레 들여다봤다.
 
 SBS <뉴스토리> 한 장면

SBS <뉴스토리> 한 장면 ⓒ SBS

 
김세희씨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필름카메라에 푹 빠져있다. 이 카메라로 지인들을 찍고 필름을 나눠주는 일에 단단히 재미를 붙인 듯싶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과는 달리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사진이라는 사실에 새삼 뿌듯함을 느낀단다.

김준영씨 역시 마찬가지다.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필름카메라 외에도 동독에서 대략 반세기 전쯤 제조된 필름카메라를 해외 직구를 통해 구입할 정도로 옛것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북촌을 찾아 몇 시간이고 머무르면서 주변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 게 취미다.

전다솔씨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퀸의 광팬이다. 어느 정도일까? 지난해 10월 개봉해 천만 관객에 육박하는 흥행을 달성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그녀는 무려 24번이나 관람했다. 앞으로도 퀸과 퀸의 노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할 예정이란다.

김용진씨는 LP판에 심취해있는 청년이다. 1970~80년대 유행한 발라드 곡을 들으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단다. 그는 또 다른 LP판 구입을 위해 전문 판매점에 들러 '친구' '아침이슬' 등을 불렀던 가수 김민기의 앨범을 구입하더니 집에서 밤새 이를 틀어놓고 있을 만큼 심취해있었다.

낡은 필름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 찰나가 아닌 영원하고도 소중한 그 무엇인가가 살포시 다가오는 느낌이라고 김준영 씨는 말한다. 무한복제가 가능한데다 얼마든 다른 형태로 감쪽같이 둔갑시킬 수 있는 세상에서 꾸밈이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정직함이라는 정서가 그를 단단히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이러한 매력은 같은 경험을 해본 바 없는 청년세대들을 매료시키고도 남는다.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여 판을 돌릴 때마다 LP가 튀어 오르는 등 음질 또한 고음질 음원 파일에 결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뉴트로에 매료된 김용진 씨는 자신의 아버지 세대가 들어온 노래를 연거푸 들으면서 비로소 고향에 온 듯한 평온과 안식을 누린다.
 
 SBS <뉴스토리> 한 장면

SBS <뉴스토리> 한 장면 ⓒ SBS

 
그렇다면 작금의 청년들에게 있어 '뉴트로'란 과연 무엇일까? 이들은 '뉴트로'에 심취하면서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고, 때로는 이 복잡다단한 세상으로부터 잠깐이나마 몸과 마음을 은신시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청년세대에게 있어 뉴트로란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에서 혼자 생각하고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같은 개념이다.

기성세대는 과거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 아날로그를 소비하는 경향이 크다. 반면 청년세대에겐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일 것이다. 그동안 막연히 동경만 해오다 막상 직접 접해보니 더없이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지나칠 정도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삶, 이를 뒤쫓는 일만으로도 사실 버거운 노릇이다. 그 속에서 아웅다웅 다투며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야 하는 우리의 보편적인 일상 속에서 뉴트로는 지친 현대인에게 소소한 위안거리가 되어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아날로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며 흥분하기도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캐나다 출신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이를 두고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다 붙이기까지 했다. 디지털에 밀려 사라져간 아날로그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며 흥분된 어조로 그는 다음과 같이 힘주어 주장한다. 아날로그는 디지털 일색인 일상을 파고들어 더욱더 강렬하고 새로운 세상을 제시할 것이라고.
 
 SBS <뉴스토리> 한 장면

SBS <뉴스토리> 한 장면 ⓒ SBS

 
'뉴트로'는 아날로그를 경험해본 적 없는 뼛속까지 디지털인 일부 청년 세대로부터 발현되는 현상의 일종이다. 때문에 기성세대의 단순한 복고 열풍과는 그 결이 엄연히 다르다. 방송에서도 언급됐듯 이를 즐기는 청년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땅의 모든 청년세대들이 함께 겪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으로부터 잠시 물러나 주류세계에서 반 발짝 이탈한 뒤 긴 호흡을 유지하면서 다소 느릿느릿 여유를 만끽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김준영씨는 틈만 생기면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한 분위기의 북촌을 방문, 필름카메라를 이용하여 사진을 찍으며 몇 시간이고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또래들이 아이돌에 열광하는 사이 전다솔씨는 록밴드 퀸에 심취, 관련 영화를 수십 차례 관람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데이비드 색스의 주장처럼 아날로그가 새롭게 주목받으며 일상을 파고든 덕분일까? 그보다는 청년 세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막막한 현실이 이들을 도피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작금의 청년세대는 N포세대, 무민세대 등으로 불린다. 구조적인 사회 모순이 얽히고설킨 바람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가 녹록지 않다. 결국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기도 하고 비록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겠다면서 소확행을 부르짖기도 했다. 그렇다면 '뉴트로' 역시 고달픈 현실에서 오는 체념 내지 자조적 행위에 더 가까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들의 뉴트로 심취 현상. 과연 아날로그의 반격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인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새날이 올거야(https://newday21.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뉴스토리 뉴트로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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