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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새로운 장소, 낯선 것들을 경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상은 지루하기도 하고, 안락하기도 하다. 일상의 속박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여행과 같은-을 꿈꾸게 하지만, 일상의 안락함과 익숙함은 여행으로부터 결국 일상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관성으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매일의 일상이 역동적일 수 있고 호기심이 넘쳐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최소한 일상의 가까운 곳에서부터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본다면, 이전까지의 지루함과 안락함으로부터 벗어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 '동네 골목 걷기'를 추천하고 싶다. 특히 자신이 대도시의 아파트촌에 사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리고 차를 타고 다니느라, 또는 대로변으로만 다녀서 잘 걸어보지 못했던 동네 골목을 걷다보면, 틀림없이 동네 골목만의 매력, 더 나아가 우리시대의 한 자화상을 새로이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 골목 탐방이 어떻게 '여행'이 될 수 있냐고요?

우선 동네 골목 탐방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직 내 한 몸뿐이다. 그런 만큼 여행을 꿈꾸지만,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나 시간이 없어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동네 골목 탐방은 제격이라 할 수 있다. 즉, 또 하나의 '소확행'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신체 운동도 저절로 된다. 한창 새로운 골목을 찾아 이 골목, 저 골목 미로같이 얽힌 길들을 걷다보면 시간은 금세 훌쩍 지나간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시간을 비롯한 제반 여건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먼 곳으로의 여행은 휴가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네 골목 탐방이 어떻게 '여행'이 될 수 있느냐는 점일 것이다.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낯섦의 감각'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부딪히게 되는 지점에 있을 것이다. 낯선 길로 잘못 들어가거나 낯선 풍경 앞에 당황하게 되는 건 여행의 과정 중 대부분 겪을 수밖에 없는 사태다. 그런데 평상시 21세기의 아파트촌과 마트, 편의점, 프랜차이즈, 자동차가 안겨주는 안락함에 젖어있었다면, 평소 잘 다니지 않던 동네 골목에서 그러한 '낯섦의 감각'을 마주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우선 동네 골목 탐방 중 부딪히게 되는 첫 번째 사항은 미로같이 얽힌 골목길에서 자연 길을 헤매게 되는 점이다. 아파트촌에서의 삶에 익숙해, 또는 차량 이동과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네 골목 걷기에 나섰을 때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채 길을 헤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결코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몸에서 낯섦의 감각은 그렇게 가동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던 방향감각 역시 깨어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길을 헤매면서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태도 또한 요구된다. 그렇게 한참 헤매고 다니다보면 어느덧 그 동네 골목에서 가장 매력적이라 느끼게 되는 장소들을 하나둘씩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골목 탐방에 처음 나선 경우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하지만 곧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던 방향 감각이 싹트면서 모든 길은 이어져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 어느 동네 골목의 갈림길 동네골목 탐방에 처음 나선 경우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하지만 곧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던 방향 감각이 싹트면서 모든 길은 이어져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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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의 인도가 왠지 규정되고 정해진, 공장에서 획일적으로 찍어낸 상품과 같은 느낌이라면 골목길은 정해진 규범 없이, 그리고 정처(定處)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골목)길은 단절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미로 같은 길에 당황하더라도, 이곳저곳 다니다보면 금세 모든 길은 이어져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 각종 기술문명의 안락함에 길들여져 잃어버리고 있던 '사람다움', '인간적인 것', '나 다움' 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기 말의 모습, 최후의 인간적 정취를 간직한 동네 골목들

필자가 동네 골목 여행에 나선 건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운동하러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시작한 일이 어느덧 취미가 되고 말았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근 2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정작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그동안 대로변 인도와 근처 시장, 마트 위주로 다녔을 뿐, 동네 주택가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다닌 적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철길 변을 따라 예전 어린 시절에 살던 5층짜리 아파트 단지-지금은 재개발되었다-뒷골목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때로는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동네의 골목까지 발길이 닿았다. 신암1동, 신암2동, 신암3동, 신암5동, 신천1,2동, 신천3동, 동인동, 대현동…. 대략 지금까지 필자가 구석구석 돌아다닌 동네의 이름들이다.

글쓴이 같은 90년대 초반 생의 입장에서 보면, 골목길과 낡은 주택가는 어릴 적 네발 자전거를 몰고 이 골목 저 골목 누비던 아련한 추억 속에 맴돌 뿐이었다. 왜냐면 그 이후 2000년대, 특히 2010년대 들어 숱한 고층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고, 편의점과 같은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다수 입점하면서 동네의 풍경 또한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 1990년대, 그러니까 세기 말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필자가 찾은 동네 골목 곳곳에는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세기 말의 모습이 아직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70∼80년대에 건축한 5층짜리 계단식 아파트 단지, 지붕이 기와로 된 주택,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목욕탕, 철공소, 목공소, 이발소, 자전거방, 양곡집 등등….

물론 지금은 문을 닫은 채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오래된 간판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동자', '○○장군'과 같은 점집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풍경이 아닌가? 21세기에서 20세기 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특히 동인동의 어느 골목에서 '큰 사랑 할인 슈퍼'라는, 예전 동네슈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가게를 목격했을 때는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중·대형 마트와 편의점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세상. '동네 슈퍼'는 이제 완전히 멸종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옛 모습의 동네슈퍼를 만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암2동에서 대현동 쪽으로 가는 골목에는 변변한 간판 없이 동네 몇 가구를 상대로 장사하는 슈퍼 역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동네슈퍼들은 인근 주민들이 자주 모여 대화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획일화된 소비 풍조가 일반화된 이 시대에, 최후로 남아 있는 인간적 정취가 아닐까?

사라질 위기에 처한 동네 골목들

그렇지만 이런 정경도 앞으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 신암뉴타운 등 '뉴타운'이라는 미명하에 진행되고 있는 시 당국의 재개발 정책 때문이다.

필자가 탐방한 동네 골목 거의 대부분이 이미 재개발 지구로 지정되었거나 기존의 주택가를 철거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담벼락에 시뻘건 페인트로 '철거'라 쓰인 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던 주택이 얼마 뒤에 가보면 포클레인에 의해 모두 뜯겨져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물론 이미 재개발이 완료돼 새 아파트가 건설된 곳도 있다. 문제는, 이 경우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지 않은 기존의 낡은 아파트와 주택은 주변 사방의 최신식 고층아파트에 의해 포위되어 마치 섬처럼 덩그러니 고립된 채 잔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삶에 대한, 그리고 건축과 도시·사회에 대한 철학이 너무도 빈곤한 우리 사회의 민낯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건대, '뉴타운'의 우리말은 '새마을'이다. 새마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그 말이 아닌가? 박정희 시대, 즉 1960~70년대 '개발 제일주의' 또는 '성장 제일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유령은, 이처럼 지금도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사상의 빈곤', '철학의 빈곤', '윤리의 빈곤'이 뉴타운과 같은 발상, 즉 박정희 시대와의 결별을 아직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막무가내식의 아파트 건설 제일주의와 통제 불능의 집값 상승 욕망에서 벗어나 어떻게 좀 더 인간적이며 사람다운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를 위한 공간을 어떻게 조성해야 할지 근본에서부터 다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공생의 원리와 자율적 삶의 원리가 발 딛고 설 수 있는 공간은, 불행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낡은 주택이라고 해서, 오래된 점포라고 해서 무조건 뜯어내고 새로 주상복합 단지를 건설하는 것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보존과 재생, 보완과 생성이 어우러진 새로운 모델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당장 필자 자신만 하더라도, 집 주변에서 여행의 기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가는 것만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갈수록 주상복합단지와 유리외벽 건물로 획일화되어가는 거리의 모습에서 인간적 정취 또는 우리 고유의 미학적 감수성과 다양성을 발견해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태그:#동네 골목 여행, #동네 슈퍼, #인간적 정취, #재개발, #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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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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