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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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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이라고 쓰지 말고, 그냥 '서원'이라고 쓰세요."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를 쓰다가 교육청의 담당 장학사로부터 건네받은 이야기다. 아이들이 학기 중에 프로젝트 과제를 수행하고 나서 모둠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는데 그 내용을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에 반영하려다 태클이 걸렸다. 교육부에서 전국 고등학교에 배포한 생기부 기재요령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구체적인 특정 대학명, 기관명, 상호, 강사명 등을 생기부의 어떠한 항목에도 기재할 수 없음.'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내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규정인데, 내용 자체가 모호해 일선 학교에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특히 교사들 사이에서 기관명의 경우에 어디까지를 기관으로 볼 것인지 '유권해석'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학교와 교사마다 '이현령비현령'이라는 거다.

당장 해당 장학사는 모든 기재 내용을 어떻게 교육청에서 일일이 가부를 알려주겠느냐며 언성을 높였지만 일선 학교의 고통은 거기에 비할 바 아니다. 자칫 기재요령을 학교에서 나름대로 해석해 판단했다가 이듬해 정정 대장을 쓰느라 혼이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규정을 어겼다며 해를 넘긴 뒤 생기부를 정정하는 경우가 학교마다 차고도 넘친다.

그와의 언쟁은 자못 심각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엇 하자는 꼴인가 싶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전화기 속 언성이 높아지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교사는 하나마나한 이야기 그만두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묻는 교사나 답하는 장학사나 둘 다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일 거라면서.

내용인즉슨 이렇다. '국립 5.18 민주묘지'는 되고 '필암서원'은 안 된다고 했다. 5.18 묘지는 기관이 아닌데, 필암서원은 기관이라는 것이다. 듣는 순간 황당했다. 역사 교사로서 두 곳 모두 역사 유적일 뿐이라는 생각에 기관인지 아닌지를 두부 자르듯 나누고 기재 여부를 판단하는 게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서 되물었다.

"필암서원이 기관이라면, 5.18 묘지도 기관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관 여부를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죠?"

그랬더니 그는 대뜸 '기관'의 사전적 의미를 아는지 교사가 학생에게 질문하듯 물었다.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부러 전화를 걸어 문의했던 건데, 사전적 의미를 알고 있느냐는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때마침 국어사전을 펴놓고 동료 교사와 왈가왈부하고 있던 터라 바로 답변하듯 읽어주었다.

"기관이란 개인이나 단체의 어떠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설치한 조직을 일컫는 말입니다."

질문에 답한 만큼 두 곳의 기관 여부를 명확히 밝혀줄 줄 알았더니, 되레 두루뭉수리 답변을 회피했다. 자신들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으니 학교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순간 화가 나서, 그럴 거였으면 애초 교육청에 전화를 걸지도 않았을 거라고 발끈했는데, 그 역시 높아진 언성이 잦아들진 않았다.

더욱 황당했던 건, 두루뭉수리 표현하면 될 것을 왜 굳이 '고유명사'를 써넣으려 하느냐는 그의 조언 아닌 조언 때문이다. 아예 기관명으로 의심되면 죄다 빼면 되지 않느냐는 거다. 그렇게 되면 문장의 맥락이 거세된다며 우려를 밝히자, 그럼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질문을 무질러버렸다. 사실상 이것으로 교육청 담당 장학사와의 'Q&A'는 끝났다.

그의 조언대로라면, 기관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일체의 지명도, 이름도 기재하지 않으면 된다. '보통명사'만 사용해 서술하고, 문장이 어색하면 아예 쓰지 않으면 된다는 거다. 기재요령을 꼼꼼하게 살피되, 해석상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면 애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규정을 위한 규정일 뿐, 규정을 만든 취지는 온데간데없다고 보는 게 맞을 성싶다.

'하서 김인후 선생을 배향한 필암서원에서'는 학종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고, '하서 김인후 선생을 배향한 한 서원에서'라는 표현은 괜찮다는 게 이해되는가. '한 국립묘지를 찾아 윤상원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고'는 되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윤상원 열사의 묘소를 참배하고'는 나중에 문제 될 수 있다는 게 황당하지 않나. 기재요령에 뜨끔해진 한 동료 교사는 김인후와 윤상원이라는 이름조차 익명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지 반문하기도 했다.

장학사는 연거푸 교육청이 생기부 기재요령의 '유권해석'을 내리는 곳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기재요령을 교육부와 교육청의 이름으로 모든 교사에게 하달했다면, 생기부를 작성하기 전에 명확하게 해석해줄 의무가 있다. 미주알고주알 따져 묻는다고 교사에게 화를 내기 전에 교육을 지원해야 할 행정 전문가로서 기재요령의 허점을 보완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생기부 작성에 관한 한 교사는 철저히 '을'의 입장이다. 중학교에 근무하는 아내의 경우, 한 해가 다 지난 뒤 기재요령을 어겼다며 정정하라는 지적을 받고 몇 날 며칠 컴퓨터 앞에서 전전긍긍했다. 그 이유 역시 기재하지 말아야 할 기관명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가부의 판단은 교육청이 했지만, 지금껏 그 명확한 기준을 아는 교사는 아무도 없다.

두루뭉술한 규정을 내려 보내놓고 이후에 문제가 되면 학교에 공문을 내려 고치라고 지시하면 끝나는 것인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프로그램이거나, 이윤 추구를 위한 사기업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암시하는 기관 등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는 건 옳다. 하지만 애매모호 한 규정은 나 몰라라 한 채 일선 학교에서 알아서 판단하라며 등 떠미는 건 무책임한 처사다.

한 교사는 심지어 특정 지역을 암시하는 지명과 산과 강의 이름도 적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경험을 전했다. 하긴 장학사는 언쟁 도중 광주광역시교육청도 지역 이름을 빼고 시교육청으로 적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어안이 벙벙해 더 이상 반문하진 않았지만, 순간 뿌리 깊은 전라도에 대한 지역 차별 정서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참담한 심정이었다.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두루뭉술한 기재요령은 그렇잖아도 불신에 허우적대는 생기부를 더욱 추레하게 만들고 있다. 적어도 허위 기재에 대한 징계 규정까지 포함된 추상과 같은 기재요령이라면 명확하고 공통된 기준을 교사마다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해마다 정정 대장 작성을 반복하는 일은 교육력의 낭비다.

부디 교육청은 얼버무리지 말고, 기준을 꼬치꼬치 캐묻는 학교를 탓하기보다 당장 교육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게 맞다. 아니, 그보다 생기부에 왜 '필암'과 '5.18', 나아가 '광주'와 '전남' 등의 이름이 기재되면 안 되는지 교육부와 교육청의 명쾌한 설명을 먼저 듣고 싶다. 해당 장학사처럼 왜 굳이 써넣으려고 하는지를 반문하는 동문서답식 답변이라면 정중히 사양한다.

태그:#학교생활기록부,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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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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