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몇 년 전 어느 모임에서 맡은 역할이 있었다. 구성원들의 요구를 취합해 모임이 해 나갈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큰 규모는 아니었으나 모임의 방향과 구성원의 만족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업무로, 중요하다면 무척 중요한 자리였다.

이 모임은 전문적인 분야에 공통된 관심을 가진 이들로 구성됐기에 일을 맡으려면 해당 분야의 지식이 필수였다. 나는 상대적으로 이 분야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모임에 대한 열정도, 관심도 컸기에 스스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역할을 수락하기 얼마 전 쯤으로 기억한다. 모임의 어른 한 분과 따로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 분이 대뜸 다른 역할을 맡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신 것이었다. 내가 맡을 일은 생각보다 큰 책임이 따르는 것이므로 모임에도 내게도 좋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노력하겠다는 말로 자리를 무마했으나 속으로는 못내 불쾌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딱히 책임을 질 일이 많을 것 같지도 않았고 책임지지 못할 건 또 무엇이냐는 생각이었다.

후회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가진 지식이란 구성원들의 요구를 온전히 파악하기에도 버거운 수준이어서 프로젝트의 기획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았다. 뒤늦게 이를 메우려 하다 보니 취미가 일이 되어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처음 목적했던 수준에는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결과만 뒤따랐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책임이란 그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손해를 복구하거나 자리를 내려놓는 종류의 것만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어느 자리에 어울리는 자질을 갖추는 것, 그것이 책임의 시작이었다.

1997년 한국에서 몰락하던 대한제국이 보인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한시현(김혜수 분)이 자주 막아서야 했던 건 침탈하려는 외국의 자본보다 한국의 정책당국자인 경우가 많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한시현(김혜수 분)이 자주 막아서야 했던 건 침탈하려는 외국의 자본보다 한국의 정책당국자인 경우가 많다. ⓒ CJ 엔터테인먼트

 
<국가부도의 날>은 책임에 대한 영화다. 한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1997년 금융위기 사태를 다룬 작품으로, 국가부도를 일주일 여 앞둔 한국의 상황을 내부자의 시선에서 그렸다. 여기서 내부자라 함은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정부당국자를 뜻한다. 영화의 주요배역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김혜수 분), 한국은행장(권해효 분), 기획재정부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 청와대 경제수석(엄효섭, 김홍파 분) 등으로 꾸려졌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영화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 한국은행장을 찾아가 급박한 위기상황을 보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도한 환율방어로 외환보유고가 급격하게 소진됐으며 외국자본까지 회수되고 있어 국가부도사태가 예견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으로, 보고를 받은 정부는 급히 비공개 대책팀을 꾸려 문제해결에 나선다.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국가경제를 책임진다는 실권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까운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는 가운데 하나둘 드러나는 한국경제의 민낯은 믿기 어려울 만큼 허술하고 참담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엘리트 의식에 절어 있는 재정국 차관이 사사건건 한시현과 대립해 대책팀 내부의 불신만 깊어진다. 미국 정부와 모종의 이해관계를 가진 듯 보이는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정부 사이의 협상에선 한 세기 전 무너지던 대한제국의 모습까지 떠오른다. 관료는 나라를 팔아먹기 바쁘고 고통은 백성들이 떠안던 그 시절이 말이다. 골든타임을 놓치고 표류하는 이 나라의 상황이 스크린 위에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동안 관객들은 분노하고 탄식할 밖에 도리가 없다.

내부자의 시선으로 책임을 말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국가가 부도사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느긋한 대화를 나누는 청와대 경제수석(김홍파 분)과 기재부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 영화는 시종일관 정부당국자의 무능과 무책임을 꾸짖는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국가가 부도사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느긋한 대화를 나누는 청와대 경제수석(김홍파 분)과 기재부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 영화는 시종일관 정부당국자의 무능과 무책임을 꾸짖는다.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건 오롯이 경제위기 당시 정부당국자들의 무책임함을 전면에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다. 이는 <국가부도의 날>과 여러모로 비교되는 아담 맥케이의 2016년 작 <빅쇼트>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최국희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이 기획단계에서부터 상당부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빅쇼트>는 2008년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다뤘다. <국가부도의 날>은 구성의 측면에서 이 영화와 상당히 유사한데, 특히 경제위기를 기화로 한 몫 잡으려는 투자자의 캐릭터가 그렇다.

종합금융사에서 금융맨으로 일하던 윤정학(유아인 분)은 한국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고 사표를 던진 뒤 투자자를 모아 한국의 파국에 배팅하는 인물이다. 철저하게 정부를 불신하는 그는 금융사를 찾아다니며 풋옵션 상품을 만들어 투자하고 헐값에 나온 부동산을 사들이며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 한다.

윤정학은 <빅쇼트>의 주역인 투기꾼들의 캐릭터를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다. 특히 경제위기를 직감하고 은행을 박차고 나온 뒤 공매도로 큰돈을 벌게 되는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 분)의 캐릭터가 그렇다. 건들건들한 외양 너머 기회의 냄새를 놓치지 않는 자본사냥꾼 자레드 베넷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무능하고 비겁한 자를 책임지는 자리에 세우지 말라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윤정학(유아인 분)은 라디오에 전달된 사연엽서를 구해 한국경제가 바닥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알아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윤정학(유아인 분)은 라디오에 전달된 사연엽서를 구해 한국경제가 바닥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알아챈다. ⓒ CJ 엔터테인먼트

  
더욱이 윤정학이 경제위기를 확신하는 장면은 <빅쇼트>에서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이 서류 위에서 발견한 위험을 근교 주택단지를 방문해가며 현실로 확인하는 에피소드와 유사하다. 윤정학은 업무 중 외국인 투자자의 수상쩍은 자본유출 흐름을 파악하는데, 이후 라디오프로그램에 온 사연엽서를 입수해 한국경제가 바닥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두 영화 속 에피소드의 역할과 전개가 어찌나 유사한지 오래 전 보았던 <빅쇼트> 속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을 정도다.

윤정학을 제외한 <국가부도의 날> 속 다른 인물들은 <빅쇼트>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다. <빅쇼트>가 주요배역 대부분을 투자자로 설정해 시스템 바깥에서 금융시스템의 허실을 풍자하는데 집중한 것과 대비되는 선택이다. <빅쇼트>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당시 문제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앨런 그린스펀이 전부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역시 후반부 강연장면에서 잠시 등장할 뿐이고, 신용평가기관이나 금융감독원 사람도 단역에 가까운 조연에 불과하다.

반면 <국가부도의 날>은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윤정학의 캐릭터를 다른 주요 배역들의 외곽에 배치한다. 그의 역할은 내부자를 철저히 불신하며 그 무능함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이다. 영화 속 주요한 사건은 모두 내부에서 벌어지며, 관객의 감정선은 윤정학이 아닌 한시현의 뒤를 따른다. 그녀가 무책임한 정부당국자의 앞을 가로막고 책임에 대해 역설하는 장면도 수차례나 비장하게 등장할 정도다.

요컨대 외부의 시선에서 풍자와 조롱을 하는 게 아니라 내부자의 시선에서 무책임과 무능을 명확히 비판하고 비난하는 게 <국가부도의 날>의 목적이다. 제 자리에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 무능하고 비겁한 인간들을 지목해 책임을 묻는 것,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오늘에 실제적인 피해를 남겼다고 외치는 것, 나아가 한국의 오늘과 내일을 만드는 자리에 다시는 그와 같은 인간들이 설 수 없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명확한 지향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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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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