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북> 영화 포스터

<그린 북> 영화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그린 북>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흑과 백으로 나뉘었다. 좌우도 아닌 위아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백은 언제나 위였다. 흑과 백이 함께하는 것은 금기였고,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1955년 미국 몽고메리에선 로자 파크스라는 여성이 만석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버스에는 흑인 지정석이 따로 있었으며, 만석일 경우 그 좌석마저도 백인에게 양보해야 하는 것이 법이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고, 거기에 불응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차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시대. 흑과 백 모두 차별에 익숙했고 순응했으며 평등은 과격한 희생을 요구했지만 변화는 더뎠다.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그린 북>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기 2년 전인 1962년 뉴욕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대도시에서 조차 사람들의 의식은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겨우 인식하는 정도.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입담이 좋아 '떠버리 토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주먹 꽤나 쓰는 다혈질이지만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따뜻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일자리 제의가 들어온다.

면접을 위해 그가 찾아간 곳은 세계 최고의 공연장 카네기 홀 꼭대기에 있는 호화로운 아파트. 그곳에서 그는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를 만난다. 온갖 희귀한 물건들로 가득한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흑인이라는 것에 토니는 흠칫하는데, 흑인 배관공이 수리하러 와서 사용한 컵을 씻는 대신 그냥 버려버릴 만큼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토니에게 셜리와의 만남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껄렁해 보이는 토니와 달리 우아한 몸짓의 셜리는 토니에게 자신의 남부 콘서트 투어를 위한 운전기사 직으로 꽤 나쁘지 않은 보수를 제안한다. 흑인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찜찜하기는 하지만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토니는 그 일을 받아들인다.

이제 두 사람에게 펼쳐질 이야기는 대충 짐작 가능하다. 흑인이 여전히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던 남부 지역에서 토니는 셜리가 당하는 인종차별들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던 토니는 셜리를 피부색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하고 변해간다. 그 과정은 꽤나 진부하고, 인종을 떠나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남자가 티격태격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우정을 쌓아 가는 모습 또한 전혀 특별할 것 없다. 하지만 이들의 여정은 잔잔한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신다. 
 
투어를 떠나기 전, 음반사 직원이 토니에게 가이드 북 하나를 건넨다. '그린 북'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머물 수 있는 호텔이 없는 지역에서 흑인 숙박을 위한 가이드 북으로,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갈수록 셜리가 당하는 차별과 수모의 강도가 세지고, 그것을 보는 관객들의 스트레스도 심해진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거기에 감정을 모두 뺏기지 않을 만큼 수위 조절을 하고 있다.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공연장을 가득 메운 돈 많은 백인들은 턱시도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셜리의 연주에 박수를 치면서도 셜리가 화장실을 쓰려고 하자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백인 전용 화장실이니 밖에서 해결하라'고 말한다. 양복점에서는 셜리가 옷을 입어보려고 하자 '그냥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입어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비교적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2005년, 미국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파리 에르메스 매장에 맨얼굴로 쇼핑을 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멸시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셜리를 토니는 이해할 수 없다. 왜 화를 내지 않느냐고, 어떻게 참느냐고 묻는 토니에게, 셜리는 화를 내는 것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답한다. 상대가 천박하게 나올수록 품위 있게 대응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백악관에도 여러 번 초청이 된 셜리에게 남부 투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인권운동이었다. 불과 몇 년 전 냇 킹 콜이 백인 전용 공연장에서 공연했다가 구타를 당한 지역들을 돌며 온갖 멸시와 차별을 견뎌내는 것이 흑인 뮤지션으로서의 견뎌야 할 십자가인 것이다.

대중음악도 모르고, 프라이드치킨도 안 먹어 본 셜리를 보고 토니가 자신이 오히려 '흑인'에 더 가깝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흑인'은 곧 '약자'와 다름없으며, 가난, 거친 언어, 건강하지 않은 식단(예를 들면 프라이드치킨), 낮은 교육 수준 등등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연상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정관념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백인들의 위선과 차별로 이어지는 고정관념에 대한 대안을 영화는 휴머니즘에서 찾는다. 진부한 결론이지만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데서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진심이 가진 힘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서로 극과 극인 두 사람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데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한몫한다.

특히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는 비고 모텐슨은 체중까지 늘리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수다쟁이 다혈질 중년 남자로 완벽하게 변신했으며, 마허샬라 알리 또한 완벽하지만 고독한 예술가의 강함과 연약함을 우아하게 연기했다. 또한 <덤 앤 더머> 시리즈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등으로 1990년대 코미디 영화를 주름잡았던 패럴리 감독의 과하지 않은 유머가 적재적소에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한다. 과연 토니와 셜리는 남부 콘서트 투어를 무사히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1월 9일 개봉.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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