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 디 아일>의 포스터.

영화 <인 디 아일>의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내면의 싸움에 대한 오랜 우화가 있다. 한 여행자가 현명하다고 추앙받는 어느 인디언 노인을 만나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내면의 싸움에 대해 말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안에는 개 두 마리가 있소. 한 마리는 고약하고 못된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놈이오. 못된 놈은 착한 놈에게 늘 싸움을 걸지요."
 
여행자가 어떤 개가 이기느냐고 묻자 노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내가 먹이를 더 많이 준 놈이오."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마리온(왼쪽)과 크리스티안(오른쪽)의 설레는 한 때.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마리온(왼쪽)과 크리스티안(오른쪽)의 설레는 한 때. ⓒ M&M 인터내셔널

 
영화 <인 디 아일>은 이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독일 어느 마을, 창고식 대형마트에 신입직원으로 채용된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 분)은 매일 밤 격렬하게 싸우는 두 마리 개 사이에서 갈등한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절제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대형마트 일은 새로운 삶을 향한 동아줄과 다름없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돌입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형편없었던 지난 시절과 그로부터 얻어진 고약한 습관들, 새로운 환경에서 부닥치는 유혹과 어려움들이 크리스티안을 혼란스럽게 한다. 음료 구역을 관리하는 직원으로 배치된 크리스티안은 사수인 브루노(피터 쿠스 분)의 도움으로 조금씩 마트 일에 적응해나가지만, 쉽지 않은 문제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음료 구역과 진열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사탕 구역엔 여직원 마리온(산드라 휠러 분)이 있다. 그녀는 신입으로 들어온 크리스티안에게 은근한 관심을 내비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온과 크리스티안 사이에 몇 가지 사건이 발생하고, 말수도 숫기도 없는 크리스티안은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설레는 시간은 짧았다. 크리스티안은 다른 마트 직원으로부터 마리온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절망한다. 이제 막 자리 잡은 것처럼 보였던 크리스티안의 삶은 그대로 곤두박질쳐 일어설 줄 모른다. 애써 그녀를 외면하려 하지만 마리온을 향한 마음을 되돌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창고식 대형마트에서 만난 어떤 삶들에 대하여
 
<인 디 아일>은 대형마트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디딘 크리스티안을 중심으로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의 삶을 관조한다. 창고식 대형마트가 문을 닫는 순간부터 영화는 꿈처럼 환상처럼 그 뒤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직원들이 물건을 옮기고 진열하고 청소하고 쉬는 일상들, 그곳을 중심으로 관계 맺고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누군가는 그곳을 탈출하려 하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위안을 구하며, 또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 좁은 복도 안에서.
 
나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뒤 나는 백화점이란 공간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곳임을 알게 되었다. 물건이 들어오고 배치되고 빠지는 공간과 직원들이 일하고 쉬고 살아가는 공간이 모두 백화점이란 곳을 이루고 있었다. 손님으로 찾을 땐 그저 물건을 파는 데라고만 생각했던 백화점이 누군가에겐 일터였고 삶의 터전이었다. 불이 꺼지면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가졌었던가.
 
불 꺼진 마트에서 크리스티안은 사람을 만났다. 브루노라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있었고 마리온이라는 매력적인 여자도 있었다. 그로부터 크리스티안은 상처입고 슬퍼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역시도 발견했으리라.

어떤 개에게 먹이를 더 주었을까?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신입직원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 분)과 그의 사수 브루노(피터 쿠스 분)의 대화. 평생토록 마트가 아닌 바깥 세상으로 벗어나고 싶었던 브루노가 등장하는 신은 자주 철망과 벽에 가로 막힌 형태로 연출됐다.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신입직원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 분)과 그의 사수 브루노(피터 쿠스 분)의 대화. 평생토록 마트가 아닌 바깥 세상으로 벗어나고 싶었던 브루노가 등장하는 신은 자주 철망과 벽에 가로 막힌 형태로 연출됐다. ⓒ M&M 인터내셔널

영화는 크리스티안의 등판에 새겨진 커다란 개 두 마리를 통해 그의 혼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온 몸이 문신으로 뒤덮인 크리스티안이지만 등판에 새겨진 개 두 마리를 잡아낸 장면은 관객에게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에 분명하다. 나는 그로부터 오래 전 읽었던 인디언 노인의 말, 그러니까 모두의 안에 있는 착한 개와 못된 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연 크리스티안은 어떤 개에게 먹이를 더 주었을까?
 
돌아보면 삶은 늘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대형마트 좁은 복도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원들에게도 그렇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에서 트럭 운전수로 일한 브루노는 통일 후 회사가 통합되자 다른 운전수들과 함께 마트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좁은 복도에서 수십 년을 일한 그는 전처럼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를 달리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마지막까지 음료 칸 복도를 떠나지 못한다.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한 데 모여 대화하는 마트 사람들.

영화 <인 디 아일>의 한 장면. 한 데 모여 대화하는 마트 사람들. ⓒ M&M 인터내셔널

 
브루노에겐 좁은 복도였던 곳이, 그러나 크리스티안에겐 좁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이곳에서 크리스티안은 착한 개와 못된 개 사이에서 고뇌하며, 조금씩 먹이를 주는 일의 중요함을 배워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제 삶의 균형 역시 갖게 될 테다.

<인 디 아일>은 창고 식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게차 유압장치에서 바닷소리를 찾으면서도 평생토록 직접 바다를 보러갈 생각은 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 남편에게 두드려 맞으면서도 그 곁을 떠날 생각은 하지 못하는 여자의 이야기, 동료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면서도 속사정 한마디를 듣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고단하고 쓸쓸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 하지만 어쩌면 달라질 수 있는 너와 나의 이야기다.
 
매혹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지게차의 유려한 움직임처럼 멋진 순간을 간직한, 많이 쓸쓸하지만 조금은 아름다운 <인 디 아일>은 그런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 디 아일 M&M 인터내셔널 토머스 스터버 프란츠 로고스키 김성호의 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