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고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와 비슷한 처지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게 솔직한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른바 '동병상련', 저러고도 사는데, 혹은 나와 비슷하다는 연민으로 뜻밖에도 내 삶을 버텨낼 에너지를 얻는다.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온 '인간'이기에 불가피한 감정이다.

'성장 시대'를 일궈낸 '부모' 세대는 이미 그들보다 더 잘살기 힘들다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확증된 '자식' 세대에게 어쩌면 '넘지 못할 산'과도 같은 부담이다. '거산'에 막히고 전쟁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버둥거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 뜻밖에도 이들이 '공감'을 길어 올린 건 '전쟁' 시대를 살아낸 '조부' 세대이다. 12월 9일 방영된 <빛나라! 할머니>는 그 '전후 세대'의 삶을 통해 자기 삶의 당위성을 길어 올리고자 하는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역설적 존재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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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생애

이금순씨는 올해 82세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다섯 자녀를 키우고 또 그 자녀들의 손자까지 본 일가의 할머니다. 인생의 여든 고개, 그녀가 맞이한 건 '알츠하이머'. 모처럼 찾아온 손자에게 정수기에서 나오는 온수 따위 믿을 수 없다며 가스레인지에 펄펄 물을 끓여 맛난 커피를 타주고 싶은데 정작 커피가 놓인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당연히 지나온 삶의 굽이굽이 쌓였던 사연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그런 이금순씨가 말끝마다 신나게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아싸, 야로~!', 젊어 애청했다던 '여자의 일생'도 기억이 안 난다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 구절의 사연이 궁금해 손자 김빛나라씨가 할머니가 살아온 곳을 더듬는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젖이 부족해 자신의 가슴을 들이받던 아이들에게 보리죽조차 넉넉하게 먹이지 못했던 그 시절이 아픈 할머니. 군에서 제대한 할아버지와 함께 정미소를 운영했다면 서도 자식들 배를 곯렸던 시절, 그래도 할머니는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저녁을 나눠먹이던 넉넉한 품을 지니신 분이셨다. 어디 젊은 시절뿐일까. 여전히 자식들 가까이 사는 지금의 집보다, 이제는 살림살이 하나 없는 예전 집이 더 익숙한 그 동네, 동네 사람들을 보자 할머니의 안색이 빛난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내, '쨍하고 해 뜰 날'을 함께 부르며 할머니는 내년 봄의 봄놀이를 기약하신다.

그런 할머니의 삶을 따라가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손자. 서른 둘, 직장을 다니다 길을 잃어 그 길을 찾아 해외 배낭여행을 다니던 손자. 여전히 길은 막연한데, 가난하고 고생스런 삶을 버텨온 할머니를 보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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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식혜

여기 할머니의 일생을 더듬어보는 또 다른 손자가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점 개업을 준비하는 손자 정요한씨, 그는 서점의 색다른 아이템으로 밥알이 탱탱하게 살아있는 할머니의 식혜를 떠올린다.

그 식혜의 비법을 배우기 위해 들른 할머니의 집. 쌀을 불리고 찌고, 엿기름물을 만들고 밥통에 띄우기까지 '시간'의 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옛날에 밥통도 없이 쌀을 몇 말씩이나 하셨단다. 할머니의 또 다른 장기인 팥 양갱을 배우려는데 가마솥 불 피우기부터 젬병이다. 할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나뭇가지를 잘 정렬하여 불을 피우고 팥을 끓이고 그걸 다시 몇 번에 걸쳐 거르고 한천과 함께 만들어 낸 양갱. 배우긴 배우는데 공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요한씨는 연신 놀라는 중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자라면서 식혜를 먹고, 양갱을 먹을 때 그저 할머니가 심심풀이로 만드셨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학교 다니는 고등학생 할아버지를 만나 시할아버지에, 세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층층시하 밥 먹을 새도 없이 살던 그 시절 고모님이 만드신 걸 보고 어깨너머로 만들어 내셨다고. 이런 열의는 학교 근처에 가보지도 않고 시집살이 틈틈이 한글을 익히신 향학열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 할머니의 열의와 열정 앞에 서른셋의 나이에 새로운 길에 선 요한씨는 새삼 고개가 조아려진다. 할머니처럼 견디며 버티고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선택한 새 길에서도 어떤 희망이 있지 않을까 각오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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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때가 묻은 60권의 가계부

허나영씨에게는 유명 스타와의 기념사진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홍보일을 하던 시절 정신없이 바빴지만 어느덧 그 속에서 자신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설치 미술'을 하고 있는 어엿한 작가다. 그녀의 '미술적 재능'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 '예술적 DNA'는 뜻밖에도 할머니에게서 찾아진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할머니는 고운 무늬가 있는 종이를 모았다가 봉투를 만들어 명절 때 손자들 '세뱃돈' 등을 넣어 주셨다. 지금 봐도 예술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무늬며 만듦새, 그 작품의 주인공은 이제 93이 되신 오영순 할머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진짜 작품은 이 봉투가 아니라, 할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살아오신 세월과 맞먹는 60권의 가계부다. 학교 선생님이셨으나 동료 선생님이셨던 남편과 가정을 꾸리시면서 가정주부로 살아오신 시절, 박봉의 선생님 월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고심하며 살아온 그 시절이 고스란히 가계부에 담겨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가 사들인 물품 목록과 가격만이 아니다. 그 가계부의 비고란에 빽빽이 적어 내려간 그 시절의 일기, 사건들, 그 속에 90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난한 살림, 그 속에서도 세상사에 관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꾸려가느라 '곤란'했지만 애써 견디며 노력했던 할머니의 삶은 작가의 길에 들어선 손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귀감이다.

부쩍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를 조명하는 다큐들이 늘었다. <미운 우리 새끼>와 새로 시작한 <아모르 파티> 등 예능에서 새로이 조명되는 세대와 같은 연장선상일 수도 있겠다. MBC 스페셜 <엄마와의 인터뷰>, <기막힌 내 인생 누가 알랑가?>와 SBS스페셜 <빛나라! 우리 할머니>는 그저 그 세대에게 조명을 비추는 걸 넘어, 할머니, 어머니라는 가족 내 일원이 아닌 '한 사람', 그것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자기 극복의 표본으로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주목'의 시선에는 바로 현재, 그들만큼 힘들다 느끼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있다. 다큐는 결국, 그러니 우리도 버텨보자, 살아내 보자며 다독인다.

사회적 변화와 발전에 대한 도전 대신, 할머니 세대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통해 막연한 현실의 삶에 위로를 받자는 다큐.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부쩍 늘어난 세대 공감 이야기들의 당의정에 혹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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